22.06.11 11:04최종 업데이트 22.10.25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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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과 차림새가 셜록 홈스를 연상케 했던 친일 형사가 있다. 악명 높았던 김태석(1882~?)이 바로 그다.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된 뒤에 발행된 1949년 5월 21일자 <경향신문> 2면 등에 실린 그의 사진은 한국인 얼굴의 영국 신사를 보여준다.
  
셜록 홈스를 연상케 하는 사진을 남겼지만, 그의 수사 방식은 셜록 홈스와 거리가 멀었다. 셜록 홈스는 범행 현장에서 포착한 단서에 대한 추리를 통해 사건을 해결하는 데 비해, 김태석은 주로 정보원과 고문을 활용해 사건을 처리했다.
 

김태석이 소개된 <경향신문> 보도. ⓒ 경향신문

 
'고문치사'의 달인

그는 악질적인 고문으로 억지 자백을 받아내는 수준에 그치지 않았다. 고문을 해서 사람을 죽이는 일로도 유명했다. 1949년 2월 12일자 <조선일보> 기사 '김태석의 죄상'은 "현재 반민(反民) 혐의자로 체포되여 있는 그 당시 고등계 형사주임으로 고문치사에 유명하든 김태석", "일제의 충실한 악독 고문 경관이든 김태석"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고문치상'도 아니고 '고문치사'로 악명을 날렸던 것이다.


김태석은 임오군란 발발 4개월 뒤인 1882년 11월 23일, 평안남도 양덕군에서 출생했다. 평안도·함경도·황해도가 만나는 곳이 그의 고향이다.

대한제국 시절인 1908년에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평양보통학교 훈도가 된 그는 니혼대학 법대 유학 이후인 1912년에 일본 경찰로 변신했다.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국권 침탈 뒤에 일제 경찰로 직업을 바꿨던 것이다.

처음에는 함경북도 옹기군 경찰서에서 통역 일을 했다. 일반 경찰이 된 것은 이듬해였다. 이때 받은 초임 계급은 경부였다. 경찰서 과장급으로 출발했던 것이다. 31세인 이때부터 식민지배에 가담해 해방 때까지 33년간 일제의 녹봉과 밥을 먹고 살았다.

일제 경찰이 된 그는 마치 사람 사냥하는 특기라도 있는 듯이 독립투사 잡아들이는 분야에서 괴력을 발휘했다. 1915년에는 비밀 독립운동단체인 일심사의 조직원들을 체포했다. 3·1운동이 벌어진 뒤인 1919년 가을에는 사이토 마코토 총독에게 수류탄을 던진 강우규 선생을 체포했다.

강우규는 군중이 밀집된 남대문역(서울역)에서 의거를 단행했다. 폭탄 파편이 사이토의 칼에 맞는 데 그친 직후, 그는 군중들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 뒤 경복궁 광화문에서 서쪽 15분 거리인 사직동의 여인숙에 은신했다. 누가 폭탄을 던졌는지조차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미궁에 빠지기 쉬웠다.

독립투사들의 행적을 정리한 <기려수필>에 따르면, 성격이 호탕했던 강우규는 자신의 의거로 인해 서울이 발칵 뒤집혀 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여관 사람들 앞에서 "경찰이 죄 없는 사람들을 잡아가고 있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경찰에 체포되는 사람들을 보고 '죄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단정한 그의 한마디는 여관 내에 있던 김태석 정보원의 귀로 들어갔고, 보고를 받고 느낌이 이상해진 김태석은 형사들을 데리고 여관을 급습했다. 총독 암살 미수자를 잡아들인 이 사건으로 김태석은 일제의 인정을 받고 승승장구하게 됐다.

칠가살

그가 처리한 독립운동 사건은 한둘이 아니다. 고종의 아들인 의친왕의 국외 망명을 기획한 대동단의 거사 계획을 알아내고, 김원봉이 단장인 의열단의 독립투쟁에도 지장을 줬다.

위 <조선일보> '김태석의 죄상'은 "29년 전 우리의 원수 왜놈들을 폭사시킬 계획으로 김원봉 단장으로 조직된 의렬단 조선 총책임자 김재수 씨가 그 당시 총독부와 일인의 요인을 암살할 계획으로 상해로부터 폭발탄 탄환 등을 밀수입"했지만 "거사를 앞둔 수일 전에" 김태석에게 체포됐다고 설명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김태석을 칠가살(七可殺)의 하나로 규정했다. 죽여야 할 일곱 명에 포함된 그는 경찰직을 떠난 뒤에도 '친일 마일리지'를 쌓아갔다. 1924년에 일반 행정관료로 변신해 가평·연천·부천 군수를 역임하고 함경남도·경상남도 참여관(부지사 상당)을 지낸 그는 징용과 공출 분야에서도 악명을 남겼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은 "(경남) 도내에서 소 466마리와 돼지 5417마리를 비롯해 모피 4만 9014매를 공출하는 등 각종 군용물자를 수집하는 데 앞장서 '공출의 귀감'으로 평가되었다"고 설명한다. 고문왕에 이어 공출왕 타이틀까지 얻었던 것이다. 일제가 그에게 중추원 참의 타이틀을 줘서 국회의원 비슷한 위상을 부여한 것은 일본에 대한 그의 충성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반민특위에 끌려간 뒤에는 어이없게도 발뺌으로 일관했다. 반민특위 재판 때는 자신이 그저 심부름꾼에 불과했다고 변명했다. 한국인 사상범을 잡아들인 일도 없다고 주장했다. 3·1운동 때는 자신도 독립운동을 했노라며 확인할 수 없는 말까지 입에 담았다.

심지어, 자신이 잡은 독립투사들은 가짜였다는 황당한 주장까지 내놓았다. 가짜 독립투사들을 잡아들인 것이므로 죄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변호인 오숭은을 통한 최후변론에서 그런 주장을 펼쳤다. 1977년 8월 19일자 <경향신문> '비화 한 세대 196: 반민특위 50'에 따르면, 최후변론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독립운동가가 사태가 나다시피 많았다. 최자남·황삼규 같이 폭탄을 일시 맡았다는 것으로써는 애국지사라고 할 수 없다. 피고는 그러한 가짜 혁명투사를 잡았던 것이다."

노태우 정부 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 최자남 선생은 강우규 의거 때 수류탄을 보관해줬다. 박정희 군사정권 때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황상규(황삼규) 선생은 김원봉과 함께 의열단 활동을 했다. 독립운동가라는 이유로 최자남·황상규 등을 체포했던 김태석이 1949년에는 그들을 가짜로 몰아세웠던 것이다.
 

MBC <선을 넘는 녀석들>에 소개된 김태석 ⓒ MBC

 
사형이 구형됐지만...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다. 재판부는 무기징역과 재산몰수 50만원을 선고했다. 적지 않은 형량이 선고됐지만, 추상같은 형벌 집행이 이미 불가능해진 뒤였다.

그에게 사형이 구형된 것은 1949년 5월 20일이다. 이 시기는 반민특위가 친일세력의 공격에 시달릴 때였다. 6월 2일에는 친일단체들이 국회 앞에서 친일파 석방을 요구했고, 6월 3일에는 친일파 시위대가 반민특위를 습격했다. 6월 6일에는 경찰도 반민특위를 습격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김태석은 검찰이 구형한 사형이 아니라 무기징역 및 재산몰수형을 받았고, 이듬해인 1950년 한국전쟁 직전에 감옥 문을 나오게 됐다. 그에 대한 형벌이 흐지부지됐던 것이다. 이랬기 때문에 무기징역뿐 아니라 재산몰수형도 제대로 집행되기 어려웠다.

재판부는 그가 일제 치하에서 받은 물질적 혜택을 근거로 50만원 재산몰수형을 선고했다. 적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1945년에 체감되는 50만원의 가치와 1949년에 체감되는 50만원의 가치는 크게 달랐다. 해방 직후의 극심한 인플레이션 때문이었다.

해방 직후의 물가상승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서울 집값 변동에서도 나타난다. 1946년 11월 9일자 <동아일보> 2면 우상단 기사는 금융기관 통계를 근거로 서울 부동산 가격의 폭등 실태를 보도했다.

이 기사는 중급 한옥 1칸의 매매가에 관해 "해방 전 중급 가옥 매간(每間) 9백 80원 정도이든 것이 금년 일월에는 2천 6백 50원이었고, 7월에 접어들자 일약 1만 3천원으로 등귀하였는데, 지난 9월에는 2만 1천원으로 폭등하야 해방 직전보다 20여 배나 올랐는데"라고 보도했다. 해방 직후의 해외 인구 유입과 더불어 건축자재 가격 상승 등으로 인한 결과였다.

일반 물가는 훨씬 크게 폭등했다. 조흥은행 조사 결과에 기초한 1947년 9월 20일자 <동아일보> 중상단 기사는 "1945년 8월을 기준, 백(100)으로 하면 금년 7월 현재의 곡물은 945.42, 식료퓸은 1224.69, 직물은 3432.70, 연료는 698.40"이라고 보도했다.

몰수 금액을 정할 때에 인플레이션이 감안되지는 않는다. 김태석이 친일로 벌어들인 금액 중 일부에 대한 몰수가 일제강점기 화폐 단위를 기준으로 선고됐을 뿐이다. 해방 뒤에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았기 때문에, 김태석이 느끼는 50만원의 가치는 1945년 이전에 비해 현저히 낮을 수밖에 없었다.

김태석은 친일파라는 수식어보다 고문왕·공출왕이라는 수식어가 더 어울리는 반민족행위자였다. 그런 그에 대한 무기징역 집행이 유야무야됐을 뿐 아니라, 재산몰수형 역시 실질적 타격이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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