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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는 철권통치로 민중을 억압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했다. 군사정권의 붕괴는 힘이 아닌 양심과 진실에 의해서였다. (박군 고문치사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는 정의구현사제단)
▲ 신군부는 철권통치로 민중을 억압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했다. 군사정권의 붕괴는 힘이 아닌 양심과 진실에 의해서였다. (박군 고문치사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는 정의구현사제단) 신군부는 철권통치로 민중을 억압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했다. 군사정권의 붕괴는 힘이 아닌 양심과 진실에 의해서였다. (박군 고문치사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는 정의구현사제단)
ⓒ 정의구현사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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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혁명과 4월혁명 그리고 반유신운동과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은 국민이다. 전두환 세력의 폭압통치에 언제까지 침묵하지 않았다. 부천서 성고문사건과 대학생 고문치사사건은 여성들과 넥타이부대 시민들까지 분기시켰다.

3월 3일 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평화대행진'이 경찰의 저지로 무산되자 전국 주요 도시에서 가두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리고 5월 27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었다. 

서울 중구 태평로 대한성공회에서는 재야와 야권의 연합기구인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의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및 호헌철폐규탄 국민대회〉가 열렸다.  

민주세력은 박군 고문살해와 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선거를 실시하겠다는 전두환의 이른바 '4ㆍ13호헌조치'에 반대하여 민정당 전당대회가 열리는 같은 시각에 맞춰 서울을 비롯, 전국 주요도시에서 일제히 규탄집회에 들어갔다. 각 대학들은 출정식을 갖고 '독재타도', '직선제개헌'을 외치며 도심으로 몰려들었다.

이날 오후 6시 정각, 국민대회가 열리는 대한성공회 종탑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퍼지고 성당의 종이 42번 울리는 것을 신호로 성당 구내에 있던 차량들이 경적을 울리고 도심을 지나던 차량들도 일제히 따라 경적을 울렸다. 이로써 6ㆍ10대회, 나아가서 6월 민중항쟁이 공식적으로(?) 막을 올린 것이다. 이날 서울을 비롯한 전국 22개 도시에서 동시에 시위가 벌어졌다.
 
6·10대회 이후 명동성당에서 열린 사제단 시위(1987년 6월 12일)
 6·10대회 이후 명동성당에서 열린 사제단 시위(1987년 6월 12일)
ⓒ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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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세력의 대한성공회 6ㆍ10대회는 아침부터 전경들에게 에워싸여 일반시민들이 접근할 수 조차 없었다. 따라서 출정식을 가진 학생들은 각 대학별로 오후 5시경 을지로 2가 로타리, 을지로 네거리를 점거하고 연좌농성을 벌였고, 이를 지켜보던 시민들이 박수를 치며 학생들을 격려했다. 경찰은 사과탄을 마구 쏘아 이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학생들은 소단위로 신세계백화점, 남대문시장, 퇴계로 2가, 을지로 입구 등지에 나타나 시위를 벌였다.

시장상인들도 경찰에 쫓기는 학생들을 숨겨주며 정부를 비난했다. 학생들과 야당의원들은 여기저기서 노상 약식규탄대회를 열고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쟁취' 등을 외쳤다. 오후 6시가 지나자 학생들의 시위는 점차 격렬해지고 시민들의 합세도 점점 늘어났다. 서울역, 만리동입구, 신세계 앞, 서부역 등에서 최루탄과 돌멩이가 난무했다. 퇴계로 2가 파출소를 지키던 전경들이 시위대의 급습을 받고 무장을 해제당한 채 감금되기도 했다. 

가두시위를 벌이던 학생 3천여 명이 경찰에 쫓겨 명동성당 안으로 들어가 시위를 벌였다. 명동성당 점거농성은 6월항쟁의 '태풍의 눈'이 되었다. 15일 해산 때까지 5박6일 동안 농성이 계속되는 가운데 성당 밖에서는 연일 대학생들과 합세한 인근 사무직 노동자들의 지원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경찰이 성당 구내에까지 최루탄을 발사하자 학생들도 화염병을 투척하는 등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다. 광주에서 수백 명을 학살하고, 바로 한 해 전인 1986년 10월 26일 26개 대학생이 건국대에서 집회하자 최루탄과 소이탄(헬기에서 발사)을 쏘면서 경찰 8,000여 여명을 투입하여 학생 1,525명을 연행하고 이들 중 1,287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한 정권이다. 

여차하면 광주학살과 유사한 대량살상 사태로 치달을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만약 경찰이나 군인을 명동성당에 투입하면 자신이 맨 앞에 가서 누워 있겠다고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함세웅이 정부와 대화 창구로 선정되었다. 

제가 꼭 필요해서라기보다는 교구청 홍보국 일을 했으니까… 조그만 공동체에서는 저희들이 한가족이죠. 한집에 살고 있으니 늘 보게 되고 아무 때나 만나면서 말씀드리고 보고 드리는 사이였습니다. 추기경은 명동성당에 공권력이 투입되면 절대 안 된다는 확신을 갖고 계셨고, 광주비극을 늘 염두에 두고 계셨어요. 그래서 그런 물리적 진압 방식은 꼭 막아야 겠다고 확신하고 계셨고요.

나중에 교황청 대사한테 들은 건데, 전두환 정권에서 고민했던 것은 88올림픽을 앞두고 만일 명동성당에 공권력이 투입되면 가톨릭 국가들, 남미와 유럽의 가톨릭 국가에서 88올림픽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통보할 것을 우려했다고 해요. 한국정부에 그 사람들이 압박을 가했더라고요. 제 생각에도 88서울올림픽이 자승자박이야, 무리하게 돈을 써서 한국에 유치했는데, 그 88올림픽 때문에 자기 존재를 걸고 광주처럼 그런 비극을 자행할 수가 없었던 거니까요. 이게 국제적인 사안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게 자승자박이구나. 그렇게 해석했어요. 외교관들도 저희들한테 정보를 많이 줬습니다. (주석 5)


주석
5> 앞의 책, 430~431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정의의 구도자 함세웅 신부 평전]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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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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