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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쉽게 어른이 세상의 기본 값인 것처럼 생각한다. 식당에서 뛰지 않고, 비행기에서 울지 않고, 버스를 기다릴 땐 가만히 앉아있는 게 인간 덕목의 기본인 것처럼 말한다.

등산 초보자를 등산과 어린이의 줄임말인 '등린이'라고 부르고, 요리에 서툰 사람을 요리와 어린이를 줄여 '요린이'라고 부르는 걸 방송 매체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어른을 기준으로 인간을 나누게 두면 어른이 되지 못한 건 기준선 아래에 있는 것이 된다. 어린이는 아직 부족하고, 덜 채워져 있고, 더 많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세상의 모범과 위인은 다 어른들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근사한 생각과 배우고 싶은 태도는 어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교사가 되어 하루의 대부분을 학교에서 보내게 된 뒤 나는 아이들은 단순하지 않다는 걸 선명하게 느꼈다.

5학년 사회 2단원의 제목은 '인권 존중과 정의로운 사회'다. 단원의 첫 페이지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달리기 시합을 하는 삽화가 있다. 근육질 운동선수, 어린이, 다리를 다쳐 목발을 짚는 사람, 노인, 오토바이를 탄 사람. 누가 먼저 도착할까 묻기도 전에 불공평하다며 원성이 난다.

공평한 경기를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물었다. 출발선을 바꿔요, 오토바이에서 내려야 해요 정도를 기대했는데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오토바이 뒷자리에 다친 사람이나 노인을 태우고 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럼 그 사람들이 무조건 1등 할 텐데? 누군가 말하니 답변자 성현이는 그래도 저 사람들은 어떡하냐고 저걸 타야 도착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 그건 그러네 동의하는 아~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아이들에게 중요한 건 누가 1등을 하는지가 아니라 모두가 도착하는 것이었다.

감동 받아 잠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소희가 물었다. "근데 선생님, 저런 걸 왜 하는 거예요? 그냥 안 하면 안돼요?" 턱, 말문이 막혔다. 같은 출발선이 항상 평등한 건 아니라고 보여주는 그림이다 어물쩍 대답했다. 소희는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지만 나는 마음 한 편이 불편했다.
 
함양 어린이공원의 봄소풍.
 함양 어린이공원의 봄소풍.
ⓒ 함양군청 김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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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가고 난 뒤 교실에서 천천히 생각해 보니 아무리 비유일지언정 산다는 것이 경기가 아닌데, 그 말을 하고 넘어갈 걸 후회가 됐다. 출발선이고 도착선이고 그런 게 왜 필요할까. 우리한테 필요한 건 예쁜 경기장이 아니다. 최종 목표를 도착에 두지 말고, 각자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을 가도록 경기장 대신 운동장이 필요하다.

공을 차고 싶은 사람은 가운데로, 뛰고 싶은 사람은 운동장 테두리로, 쉬고 싶은 사람은 벤치에 앉을 수 있도록. 평등의 목표는 같은 도착지가 아니라 다양한 길이란 걸 가르쳤어야 했는데 이걸 수업이 다 가고 나서야 생각하다니. 소희의 멋진 질문에 미안해졌다.

내가 등록한 헬스장을 안 가고 늦잠 자는 모습으로만 이루어진 인간이 아닌 것처럼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장난치다 힘 조절을 못해 꼭 한 번씩 언쟁이 붙는 정원이는 친구의 고민에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나아질 수 있다고 대답하는 아이다.

활동지만 받으면 크트머리를 작게 찢어 책상 위가 더러워지는 성현이는 1등보다 중요한 건 모두를 챙기는 것이라고 말하는 아이다. 문제 푸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소희는 우리가 시합을 해야 되냐고 묻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아이다.

아이들은 복도에서 뛰는 모습으로만, 교과서에 낙서하는 모습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도 어린이었을 때는 그랬지, 하는 마음도 좋지만 지금의 나도 그렇지, 하는 마음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어른들도 카페에서 시끄러울 때가 있고, 또 동시에 누군가에게 따뜻하게 공감할 때도 있다. 마찬가지다. 어린이도 어른처럼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없다.

태그:#어린이날, #어린이, #학교, #교실,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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