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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과 정혜진 세종노조 조합원(왼쪽)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과 정혜진 세종노조 조합원(왼쪽)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세종호텔 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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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명동에 위치한 세종호텔은 별이 4개인 일명 '특급호텔'이다. 명동역 10번 출구로 나와서 30초면 도착 가능한 초역세권에 위치했고 가성비가 좋은 호텔로도 유명하다. 이름에서 많이들 추측하듯 세종대학교, 세종사이버대학교와 같은 재단인 대양학원이 운영하는 곳이기도 하다.

지난해 12월, 세종호텔은 영어시험을 기준으로 셰프와 주방 보조 등을 해고했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그 의혹은 실제로 밝혀졌는데 3년간 쌓인 인사고과와 영어시험, 재산 보유내역을 회사에 제출하게 한 것이다.

이는 공정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해고 기준이라며 관광레져산업노동조합 세종호텔 지부 노동조합원들은 해당 과정을 모두 거부했다. 이후 15명의 조합원이 해고되었다. 그중 공채 1기로 호텔에 입사하여 26년간 지배인으로 일해온 정혜진씨를 지난 17일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했다. 

세종호텔에 입사했다
 
세종호텔 정문 앞, 해고철회를 촉구하는 문화제에 정혜진 조합원이 참여해서 박수를 치고 있다.
 세종호텔 정문 앞, 해고철회를 촉구하는 문화제에 정혜진 조합원이 참여해서 박수를 치고 있다.
ⓒ 세종호텔 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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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월 3일, 혜진씨가 세종호텔에 입사했다. 첫 근무지는 호텔 1층에 있는 '피렌체'라는 경양식 겸 라운지 식당이었다. 입사 초기는 감히 고객의 주문을 받거나 서빙을 할 수 없었다. 백룸에서 온갖 그릇, 컵, 집기를 닦는 일로 시작했다. 9개월이 지나니 호텔 내 일식당으로 발령이 났다. 거기선 막내까진 아니었다. 고객의 식사 주문을 받고 서빙하고 계산도 할 수 있었다.

많은 대한민국의 노동자가 그러하듯, 혜진씨도 주인정신을 지닌 욕심 많은 성격이었다. 그래서 탄력적으로 일하며 자신의 시간, 체력을 많이 써서 일했다. 그로 인해 혜진씨를 찾는 단골 고객이 점점 생겨났다. 유창한 수준까진 아니었지만 약간의 영어와 중국어 실력도 도움이 됐다. 혜진씨를 찾는 외국인 단골이 조금씩 생기고 늘어간 것이다.

일식당에서 2년 조금 넘게 일하자,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담당 지배인이 캡틴도 아니고 주임도 아닌 '혜진 사원'을 콕 집어서 가라오케 바에서 일해보겠냐는 제안한 것이다. 약간의 고민은 했지만, 역시 욕심쟁이 성격인지라 하겠노라 수락했다.

사실 가라오케 바는 세종호텔에서 위기를 맞은 사업장이었다. 호텔에선 혜진씨에게 "지난 담당자 실적의 60%만해도 잘하는거야"라고 했다. 하지만 일식당에서 혜진씨를 찾던 고객들은 역시나 혜진씨를 찾았다. 술을 안 마시는 고객이 매출을 올려준다며, 일부러 찾아와서 비싼 양주의 뚜껑만 따고 계산하고 나가는 일도 있었다.

그 덕에 작년 대비 60%가 목표실적이었는데 작년 대비 160%라는 엄청난 실적을 찍었고 혜진씨는 호텔에서 조금씩 인정받아갔다. 하지만 혜진씨는 결혼 후 가라오케 바에서 일하는 것이 조금 부담스러워지고 있었다. 사업장의 특성상, 오후 6시에 출근해서 새벽 3시에 퇴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동안의 실적을 고려해서 낮에 일하는 사업장으로 바꿔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그 부탁을 회사에서 오만하게 느꼈는지 결혼한 여성에 대한 차별 때문이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갑자기 호텔 밖 외식사업체로 좌천됐다. 원하던 낮 시간에 일할 수는 있었지만, '좌천'이라는 상황은 일 욕심 많은 혜진씨에겐 큰 스트레스였다. 그럼에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그런지, 2개의 외식사업체에서 총 6년 6개월간 그럭저럭 일했다.

그 중 두 번째 외식사업체인 서울대병원 식당은 장단점이 명확했는데, 일은 물론 많이 힘들었다. 온갖 손님을 다 받아야 하는 것도 있었지만 돌솥비빔밥의 기억이 강렬하다. 보통 식당에서 쓰는 돌솥이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돌'솥이었다. 돌솥비빔밥을 50개씩 서빙하던 날엔 인대에 너무 무리가 가서 끊어지기도 했다.

그래도 병원 사람들은 좋았다. 친해져서 손목 치료를 할인해주거나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서 몇 가지 검사를 무료로 더 해주기도 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투쟁하기엔 용기가 부족
 
해고철회를 촉구하는 50리길 행진에서 피켓을 들고 걷는 정혜진 조합원
 해고철회를 촉구하는 50리길 행진에서 피켓을 들고 걷는 정혜진 조합원
ⓒ 세종호텔 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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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다시 호텔로 발령이 났다. 사우나 안에 있는 식당이었다. 2개월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일했고 그 후엔 다시 피렌체로 돌아왔다. 입사 후 처음으로 일했던 식당에 13년만에 복귀한 것이다.

그 후 피렌체에서 11년을 일했다. 피렌체는 시간이 지나면서 이탈리안 식당 '베르디'로 이름을 바꿨고 거기에서 이주형 조합원을 처음 만났다. 워낙 재치있고 흥이 많은 주형씨뿐만 아니라 베르디 직원들과 일하는 게 혜진씨에겐 즐거웠다. 사람들과 잘 맞았다.

하지만 당연히 일은 힘들었다. 베르디만 담당하는 게 아니라 룸서비스와 베이커리도 함께 담당해야 했다. 홀로 그 모든 사업장의 손님 응대를 해야 하는 시간도 종종 있었다. 투덜거리고 화를 낼 법하기도 했지만, 혜진씨는 역시나 특유의 주인정신으로 열심히 일했고 혼자서 3명치 업무는 우습게 해냈다.

2012년 1월 1일, 세종노조 조합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혜진씨가 연합노조(사측노조) 소속이었던 시절이다. 세종노조 조합원과 연합노조 조합원들은 서로 얼굴에 침을 뱉고 쌍욕을 하며 싸웠다. 혜진씨를 포함해서 식음료부서 직원들은 그 싸움에 끼지 않으려 애썼다. 자기들끼린 "세종노조 투쟁이 옳지"라고 말하면서도 함께 투쟁하기엔 용기가 부족했다.

프론트를 사수하려던 세종노조 조합원을 끌어내던 연합노조원들을 바라만 보았던 때를 혜진씨는 아직도 기억한다. 당시에도 세종노조는 매주 목요일에 문화제를 했는데, 관리자들은 고객들에게 시끄럽다는 컴플레인이 들어왔다고 가짜로 일지에 적게 했다. 혜진씨는 억지로 일지에 적어야만 할 때 속이 많이 상했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혜진씨는 너무 창피해서 지금도 쥐구멍에 숨고 싶다고 한다. 

2020년, 혜진씨는 정든 베르디를 떠나서 연회팀으로 발령이 났다. 그때부터 혜진씨의 지옥이 시작됐다. 회사는 '품격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경력 많은 직원이 맡아주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회사의 진짜 의도를 모르는 직원이 없었다. '이렇게 힘든 일을 시키면 못 견디고 나가겠지? 20대도 힘들어서 그만두는 팀이잖아.'

연회팀에서 처음으로 일했던 날, 코피를 쏟았다. 체력, 시간, 인력이 모두 부족했다. 베르디에선 10명 정도의 손님을 응대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아무리 많아도 90명이 최대였다. 하지만 웨딩을 진행하는 연회팀에선 하루에 500~1200명의 손님을 응대해야 했다. 기존에 하던 서빙, 계산, 주문뿐만 아니라 웨딩 전체를 책임져야 했다.

다행히도 능력좋은 계약직 직원 4명이 함께 했지만 2020년에 계약이 종료되면서 모두 '계약만료'라는 이름으로 해고되었다. 결국 종종 실수가 있었고 그건 '책임자니까'라는 명분으로 혜진씨만의 잘못이 되었다. 시말서, 경위서를 쓰는 일도 있었다. 권한없이 의무와 책임만 맡게 되는 자리였다. 무인도에 혼자 고립된 거 같았다.

행복하게 살기 위한 활동
 
세종호텔 정문 앞에서 선전전 진행 중인 정혜진 조합원
 세종호텔 정문 앞에서 선전전 진행 중인 정혜진 조합원
ⓒ 세종호텔 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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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회사엔 구조조정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호텔엔 어느 노조가 교섭권을 가져갈 것인지 눈치싸움이 시작됐다. 어느 날 일이 끝나고 직원들과 밥을 먹고 있는데, 주형씨가 전화를 하더니 중요한 일이니까 지금 만나자고 했다. 가보니 친한 베르디 직원도 같이 있었다. 그리고 책상 위엔 연합노조 탈퇴서와 세종노조 가입서가 있었다.

혜진씨는 망설이지도 않고 모두 작성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활동하고 싶었다. 내가 나로서 목소리내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 후 해고되었지만, 혜진씨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 투쟁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4개월이 넘어가는 투쟁으로 속이 답답해질 때도 있지만, 평생 처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이 시기가 '힐링'의 시간이라고도 생각한다.

혜진씨는 해고된 후에 자신 안에 있는 열정을 싹 틔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씨앗은 무엇을 향한 것일까' 고민했고 '요리'를 향해 심장이 뛰는 걸 깨달았다. 혜진씨는 작년 12월에 양식조리사 자격증을 땄다. 그리고 지금은 한식조리사와 중식조리사 자격증을 준비하고 있다. 자격증을 따서 취업하거나 창업하겠다는 생각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요리가 좋을 뿐이다. 요리라는 것 자체를 향한 열정이다.

혜진씨의 복직투쟁, 요리 연습은 모두 행복하게 살기 위한 활동이다. 혜진씨는 행복해지고 싶다. 그래서 투쟁한다. 그래서 요리한다. 승리를 향한 투사가 되어야만 노동조합이 잘 굴러가는 건 아니다. 어쩌면 노동조합에겐 행복해지고 싶은 평범한 사람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강렬한 투사보단 평범한 사람에게 노동조합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혜진씨는 자신을 포함해서 세상의  평범한 사람들이 좋은 사람들과 주체적으로 존재하길, 그래서 행복해지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세종호텔 노동조합은 매주 목요일 오후 6시 30분에 세종호텔 정문(명동역 10번 출구)에서 문화제를 진행합니다. 해고철회를 촉구하는 문화제에 함께 하고 싶은 분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세종호텔 노동조합의 인스타그램(@sejonghotel_union)도 많이 놀러와주세요.


태그:#세종호텔, #노동조합, #복직투쟁, #명동역, #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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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어렵다고 안 할 것인가'라는 좌우명을 가지고 살고 있는 이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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