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3.19 18:37최종 업데이트 22.03.19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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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청산 열기가 가장 뜨거웠던 해방 공간에서 국민적 공분이 쏟아진 인물 중 하나가 박흥식이다. 그가 미움을 산 것은 화신백화점으로 상징되는 식민지 조선 1호 부자였기 때문은 아니다. 적극적인 친일의 결과로 거부를 축적했다는 사실이 세상을 분노케 만들었다.

기업인들의 친일은 헌금 기부 방식으로 이뤄지는 게 일반적이었다. 박흥식은 그 정도에서 머물지 않았다. '1호' 타이틀이 붙을 만했다. 기업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글과 말로도 친일을 했을 뿐 아니라 일본군에 비행기를 제공할 목적으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까지 차렸을 정도다.
 

반민특위 체포대상 1호, 친일기업인 박흥식 ⓒ JTBC 화면캡처


1호 부역자

조선비행기공업은 태생적인 친일 기업이었다. 설립자 박흥식이 친일파이기 때문에 이 회사가 친일 기업이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처음부터 친일을 목적으로 설립된 기업이었다. 박흥식 자신의 진술에서 이 점이 나타난다.


해방 직후에 자금 횡령 혐의로 법정에 섰을 때였다. 1946년 3월 19일의 일이다. 이날 재판장이 비행기회사의 설립 동기를 질문했다. 다음날 발행된 <조선일보> 기사 '박흥식 공판'에 따르면, 박흥식은 "당시 조선총독부와 조선군 당국에서 징병제 실시에 대한 기념사업으로 전쟁 수행에 불가결인 비행기 제작회사를 만들 터이니 사장으로 취임하여 달라고 누차 권유"해서 부득이 취임하게 됐노라고 답변했다.

마지못해 설립했다고는 했지만, 설립 목적이 친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의 진술에서 드러났다. 친일을 위해 비행기 회사까지 만들었으니 '1호' 타이틀이 붙을 만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활동 개시 사흘 뒤인 1949년 1월 8일 체포됐다. 이것이 반민특위 체포 1호 사건이다. 상징적 의미가 큰 사건이었다. 사흘 뒤 발행된 <동아일보>는 '반민법 첫 발동'이라는 부제목으로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구속 기간은 짧았다. 103일 만인 그해 4월 21일 보석으로 석방됐다. 보석 사유는 다음날 발행된 <경향신문> 4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수면 부족과 신경 쇠약이었다. A급 친일파가 이런 식으로 빠져나갔으니, 국민적 분노가 클 수밖에 없었다. 보석을 허가해준 재판부를 향해 국민적 분노가 쏟아졌다. 반민특위 검찰관(검사)들의 집단 사퇴는 그런 분위기를 반영한다.

박흥식은 1961년 5·16 쿠데타 직후에도 체포됐다. 부정축재 혐의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100일도 안 되는 그해 7월 풀려났다. 군사정권이 잠시나마 그를 가뒀던 것은 그에 대한 원성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존경받을 수 없는 방식으로 돈을 번 그에 대한 분노가 산더미처럼 불어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대중의 미움을 사면서도 그는 부귀와 영화를 이어갔다. 대중은 그를 친일파라고 손가락질했지만, 그는 대중들보다 훨씬 편한 데서 살았다. 그곳에서 분주하고 정신없이 기업 활동을 이어갔다. 일제강점기 때만큼은 아닐지라도 그의 물질적 부는 여전히 풍요로웠다.

박흥식 월드

그를 집중 조명한 1988년 5월 18일자 <중앙일보> 기사 '화신과 영욕 함께한 박흥식 씨 근황'에 시선을 끄는 구절이 있다. 그의 부동산 규모에 관한 대목이다. 기사는 "해방 이후 한때 반민특위에 구속됐지만 화신백화점·화신산업·흥한방적 등을 중심으로 그는 여전히 재계의 선두자리를 지켜나갔다"고 한 뒤 이렇게 언급했다.
 
"화신백화점에서 안국동으로 이르는 대부분의 부동산이 그의 소유로 알려졌을 정도였다."
 
화신백화점은 서울 종각역 3번 출구 근처에 있었다. '바르게 살자'라는 돌비석 밑에 화신백화점 터를 알려주는 표지석이 놓여 있다. 이곳에서 안국동까지의 부동산 대부분이 박흥식 소유였다는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그랬다는 것이다. 친일파이냐 아니냐가 그의 해방 이후 생활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화신백화점 터. ⓒ 김종성

   

종각역에서 안국역까지. ⓒ 구글 지도 편집

  
사망 6년 전에 나온 위 <중앙일보> 기사에 따르면, 그는 대지 900평, 건평 120평 규모의 서울 종로구 가회동 177-1호에 살고 있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대중의 정치적 에너지가 강할 때였다. 또다시 세상이 뒤집히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그를 엄습했을 수도 있는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도 여전히 그는 친일의 결과물인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었다.

사망 7년 전인 1987년 11월 4일에 박흥식의 위 주택이 경매로 넘어갔다. 자금난의 결과였다. 낙찰가는 10억 3천만 원이었다. 그런데 위 기사가 나온 시점인 1988년 5월 18일 당시에는 그 집이 박흥식에게 돌아가 있었다. "박씨는 그 집을 대리인을 세워 다시 사들인 것으로 알려졌다"고 기사는 보도했다.

1987년 11월에 넘어간 집을 1988년 5월 이전에 도로 사들였다. 경매된 집을 도로 사려면 경매가보다 훨씬 높은 값을 치를 수밖에 없다. 1988년 시점에도 그가 상당한 자금력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기반이 해방 뒤에도 여전했다는 점은 1973년 뉴스에서도 나타난다. 그해 9월 1일 일본 소니사와 합작해 화신소니를 설립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9월 4일자 <매일경제> 4면은 "자본금을 10억 원으로 하여 화신 측이 51%, 소니 측이 49%를 출자"한다고 보도했다.

국민들은 박흥식이 제대로 처벌받지 않은 것을 원통해 했다. 그가 참회하고 사죄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위와 같은 경제력을 유지하면서 세상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사업에만 열중했다. 8·15 해방으로 타격을 받은 '박흥식 월드'를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만 고민했을 뿐이다.

위의 <중앙일보> 기사는 "기업을 어떻게든 다시 일으키겠다는 의욕이 대단하다는 주변의 얘기다", "요즘 그는 잔여 재산목록과 설계도면을 바라보는 것이 유일한 취미"라고 전했다. 친일청산이나 참회·사죄 등은 안중에도 없는 나날을 이어갔던 것이다.

반성은 없다 

그 같은 의식 세계는 그의 윤리적 둔감함에서도 나타난다.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이자 A급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의 생활비를 대준 일이 1950년대에 있었다.

박흥식과 접촉했던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은 1999년 10월 2일자 <문화일보> '비화(秘話) 내가 겪은 한국 외교 (15)'에서 "박씨는 그때 전범으로 스가모형무소에 복역하다 풀려난 기시 노부스케를 화신의 도쿄사무소 고문으로 위촉해 생활비를 돌봐주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 자신이 친일 행적 때문에 반민특위에 체포된 적이 있으므로 더욱 더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됐고, 또 기시 노부스케가 어떤 인물인지 몰랐을 리 없는 박흥식이었다. 그런 박흥식이 A급 전범의 생활비까지 대줬다는 것은 반민특위에 체포된 동안에 그가 반성을 했을지 원통해 했을지를 짐작케 한다.

기시 노부스케와의 인연은 그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눈감아주고 위안부·강제징용·강제징병을 사실상 덮은 한일기본조약과 부속협정들이 체결될 때도 그는 기시 노부스케와의 인연을 활용했다.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 사이의 친서를 전달하는 밀사 역할을 수행했다. '반성한 일본'이 아니라 '반성하지 않은 일본'의 영향력을 도로 끌어오는 데도 앞장섰던 것이다.

친일파들의 죄악이 8·15 해방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그것은 8·15 이후에도 변함없이 이어졌다. 그들은 친일의 결과물인 영향력과 재산을 이용해 대한민국의 진보와 역사청산을 저해했다. 박흥식의 예에서 나타나듯이 그들 상당수는 예전처럼 분주하고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1호' 친일파 박흥식의 해방 이후 행적은 친일 문제가 과거지사가 아닌 현재의 문제임을 똑똑히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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