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2.28 20:13최종 업데이트 22.07.27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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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이주자는 살아 숨 쉬는 자인가. 존 버거는 <제7의 인간>에서 이들을 가리켜 "불사의 존재, 끊임없이 대체 가능하므로 죽음이란 없는 존재"라 했다. 오직 노동하는 몸으로 기능하기를 요구받고, 표류함이 당연시 여겨지고, 존재할 권리를 국가의 허락에 구해야 하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와 난민의 현주소이다. 체류권을 '허가'받은 이주민들조차 한국 사회의 성원권을 제대로 획득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국가는 잔혹하고, 사회는 무심하다. 그럼에도 사람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계속되는 일. 한국사회에서 살아 숨 쉬는 이주민들의 삶을 르포르타주로 담고자 한다.[편집자말]

안산시 뗏골(선부동) 거리 풍경. 근로자 파견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 이소연

 
중국어 간판이 즐비한 원곡동 다문화거리(경기도 안산시)를 지나면 이내 낯선 키릴 문자들이 간판에 등장한다. 시화공업단지에 일하는 고려인 노동자들이 값싼 월세 방을 찾아 모여든 마을, 뗏골이다. '당일 임금 지급'이라고 써붙인 인력사무소를 지나 골목에 들어서니 80년대에 지어진 빨간 벽돌 다가구 주택에 '무보증금, 월세 20만 원'의 세입자를 찾는 낡은 종이가 눈에 들어온다.

이 골목 끝에 고려인 지원단체 사단법인 '너머'가 있다. 너머는 고려인들을 위한 한글 야학으로 시작하여 안산시고려인문화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국내의 대표적인 재외동포 지원 단체다.


이곳에서 고려인 상담사 권 스베틀라나(36세, 이하 스베따)씨를 만났다. 2019년 한국에 온 스베따씨는 카자흐스탄 출신으로 안산고려인문화센터의 러시아어 상담사로 일하며 고려인들에게 생기는 각양각색의 사건들을 해결해 주고 있다. 센터에 들어오는 상담의 종류를 묻자 한국어 이야기를 꺼낸다.

"한국어를 못하니 고용 계약서의 내용을 모른 채 서명을 해서 생기는 문제들이 많아요. 고려인들은 대부분 직업소개소나 지인 소개로 일자리를 소개받는데 채용 시 통역사가 있는 곳은 없으니까요. 어떤 근무 조건인지 모른 채 일을 해야 하니 믿고 계약서에 서명을 하는 거죠. 모든 문제는 한국어에서 시작돼요. 고려인들이 한국어를 못하니 생기는 문제들이죠. 입국 초기의 고려인들은 한국 사람을 믿기 때문에 나쁜 일이 생길 거라 의심을 하지 않거든요."

할아버지의 나라에 오며 품었던 고려인들의 기대와 희망은 입국한 지 몇 달이 되지 않아 깨지고 마는 유리 같은 슬픈 사랑이다. 한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모진 세월을 살아온 고려인들에게 돌아오는 건 동포라는 환대가 아닌 한국말 못 하는 외국인이라는 시선이다.

"조선족은 한국말을 하는데 고려인은 왜 못 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한국인들이 고려인에게 자주 하는 질문은 늘 이런 식이다. 고려인이 왜 재외 동포냐 라는 뿌리를 모르는 질문이 말하듯 그들의 존재는 우리에게 낯설고 생경하다. 이런 질문을 하는 이를 탓할 수 없는 것이 역사학자가 아닌 평범한 한국인이 살아오면서 고려인에 대해 듣고 본 적이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유랑 끝내려는 몸부림 맘버림

"한국인들이 안중근 의사는 알지만 의사의 독립운동 활동을 지원하고 도운 최재형 선생에 대해서는 몰라요."

지난 겨울, 최재형 장학회 10주년 사업회에서 만난 문영숙 작가는 최재형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저격했을 때 그 총을 주고 연습장까지 마련해 준 사람이 바로 최재형 선생입니다. 하얼빈 의거 후 안중근 의사 가족의 안전을 위해 가족을 연해주로 모시고 와 돌보기도 했어요. 고려인 독립운동가의 대부인 최재형 선생과 고려인 독립 운동가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대중들에게 잊힌 그와 고려인 독립 운동가들의 존재는 증발된 수증기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자세히 알지 못하는 이들, 한국인에게 고려인은 그런 멀고 먼 존재다. 한 번도 주인공이 되어 보지 못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문장과 문장 사이에 찍힌 마침표 같은 존재. 그들의 비극적인 디아스포라는 깊고도 짙어 누구도 섣불리 발을 디디려고 하지 않는다.

안산역에서 수인선을 타고 송도 한 정거장 전의 연수 역에서 내렸다. 이곳에 주민 대비 고려인 거주 비율이 전국에서 가장 높은 함박마을이 있다. 고려인들의 거주율이 급격하게 증가하여 너머에서 몇 년 전부터 지부를 운영하며 체류 지원을 하고 있다.

사무실 앞에서 만난 예카테리나씨는 익숙하게 13개월 아들이 탄 유모차를 번쩍 들어 2층 계단을 오른다. 천하장사가 따로 없다. 곧이어 아이를 데리고 계단을 올라오는 엄마들의 소란스러움과 러시아어 인사말로 사무실이 시끌벅적해졌다. 매주 금요일 진행되는 고려인 엄마들의 워크숍 프로그램에 참가하러 온 일곱 명의 고려인 엄마들과 일곱 명의 아이들이었다.
 

인천너머고려인문화원의 고려인 엄마들과 아이들 ⓒ 이소연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러시아. 출신 국적이 다른 이들의 공통점은 6세 미만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는 것. 무엇보다도 인천 함박마을에 사는 러시아어를 쓰는 고려인 3-4세라는 것이 이들을 강한 연대로 묶고 있었다.

"아이들은 한국에서 태어났어요. 여기가 고향이에요. 한국이 집이에요."

'인천 엄마들 모임' 대표인 채 예카테리나씨가 한국어로 말을 꺼냈다. 이어 고려인 엄마들의 하소연이 러시아어로 속사포처럼 쏟아졌다. 예카테리나 외에는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아이들이 점점 늘고 있어요. 아이들과 관련된 비자 문제도 해결해야 되지만 어린 아이들을 키우는 고려인 엄마들의 가장 큰 문제는 어린이집 원비예요. 정부의 보육비 지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월 50만 원의 원비를 내야 합니다. 고려인 가족들은 아이가 2명인 경우가 많아요. 저도 4세, 2세의 두 아들이 있어요. 저처럼 2명을 보내야 할 경우 100만 원이 필요해요. 이 비용을 지원할 수 있는 가족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어린이집에 보내는 것을 포기하게 돼요. 이 문제가 해결되면 더 많은 고려인 아이들이 한국 사람으로 자랄 거예요. 한국어도 잘하게 되고 고려인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문제들이 사라질 거예요."

예카테리나가 살고 있는 인천 함박마을은 주민 만 사천 명 중 7천여 명이 고려인이다.

1860년 무렵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농업 이민, 항일독립운동 등으로 현재의 러시아 및 구소련 지역(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우크라이나·키르기스스탄·투르크메니스탄·타지키스탄 등)으로 이주한 세대를 고려인 1세대라고 한다. 조선에서 연해주로 향했던 이들은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기차에 실려 중앙아시아에 정착하게 되었다.

중앙아시아 각 나라들이 독립을 하게 되면서 민족주의적인 정책을 펴자 소련 내 소수민족으로 러시아어를 구사했던 고려인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됐다. 그러면서 국내로 일자리를 찾아오는 고려인들의 숫자가 급격하게 늘어나게 되었다.

안산에서 만난 카자흐스탄 국적의 스베따와 인천에서 만난 우즈베키스탄 국적의 예카테리나는 출신 국적도 다르고 서로 만난 적도 없다. 하지만 이 둘은 고려인 4세대로서의 동일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몇 세대에 걸친 선조들의 유랑의 세월은 이 둘을 필연처럼 모국인 한국 땅으로 이끌었다. 이 가족들의 유랑의 세월은 이제 끝날 수 있을까?

고려인에게 흔한 일

인천시에서 발간한 연수구 체류 고려인 연구보고서를 보면 고려인들의 체류 상황을 내밀하게 알 수 있다. 연수구 체류 고려인 인구 7천 명 중 20~30대는 3천여 명, 아동청소년이 1200여 명이다. 미취학, 취학 아동들을 키우는 젊은 가족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뜻이다.

고려인 가족의 한 달 수입 평균은 최저임금 수준으로 199만 원이다. 평균적으로 이 가족들은 보증금 268만 원, 월세 46만 원의 15.6평 빌라에 살고 있다. 그래서일까 고려인 마을 부동산에는 무보증 월세 공고가 자주 눈에 띈다. 이런 수입과 지출 구조에서 어린이집 원비 50만 원은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엄마들은 육아로 일을 하지 못하기에 대부분 외벌이 아빠의 수입으로 살고 있다. 고려인 아빠는 공장 또는 건설 노동자로 고용보험, 산재보험에 미 가입된 일용직, 임시근로자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어를 못하니 좋은 일을 구하기가 어려워요. 공장에서 단순한 일이나 일용직, 아르바이트를 하죠. 아침마다 직업소개소에 모여 차를 타고 가기도 해요."

너머에는 고려인들의 다급한 상담 요청이 자주 들어온다. 임금 체불, 퇴직금 체불 상담 건은 스테디셀러로 비수기가 따로 없다. 사장님들은 이주민만 보면 임금을 체불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것일까.
 

안산시 뗏골(선부동) 거리 풍경. 일자리 전단이 러시아어로 되어 있다. ⓒ 이소연

 
"고등학생인데 건강보험비가 따로 나왔어요. 한 달에 15만 원이나 따로 내야 해요.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의 경우 대사관에서 가족관계증명서를 발급받아 제출할 수 있지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경우 가족관계증명서라는 것이 없어요. 혼인 증명서와 자녀임을 확인할 수 있는 출생신고서 등의 서류를 아포스티유 번역 공증해서 가족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데 서류를 준비하는 것이 쉽지 않아요."

아포스티유란 외국에서 발행한 문서를 인정받기 위해서 협약에 따라 문서의 서명 등을 대조하여 진위를 확인하고 발급하는 것을 말한다.

국민건강보험이 국내 입국 후 6개월이 지나면 자동 가입, 무조건 가입으로 바뀌었다. 일용직으로 일을 많이 하는 고려인들의 특성상 일자리를 자주 옮겨 다니게 되는데 그때마다 피부양자 등록, 세대 합가를 해야 하다 보니 누락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같은 주소지에 거주하더라도 성인이 되면 건강보험료를 따로 내야 하는데 중도 입국 고려인 청소년의 경우 한 살에서 두 살 아래로 학교를 다니는 경우가 많다. 실제 나이는 만 19세 이상이지만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경우다. 아직 학생 신분으로 일을 할 수 없는데 만 19세 이상이라고 매월 15만 원의 건강보험 고지서가 날라 온다.

가족 중 직장가입자가 없을 경우 모시는 부모님은 세대 합가를 할 수 없어 실제 같은 주소에 살고 있지만 할머니, 부모, 자녀가 각각 건강보험을 내야 한다. 가족의 건강보험비가 월세만큼 빠져나가니 경제적으로 많은 부담이 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의 세대 합가, 피부양자 등록도 내국인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서류를 받고 공증을 위해 여기저기 다니며 시간과 돈을 쓰다 보면 건강보험에 가입하기도 전에 진이 빠진다. 이 외에도 체류지가 불안정하고 재입국하면서 생기는 건강보험과 관련된 여러 문제들이 있다.

"6개월마다 회사 이름을 바꾼 곳이 있어요. 사장이 고려인들에게 퇴직금을 안 주려고요. 같은 공장에서 1년 5개월을 일했는데 그래서 줄 수가 없대요."

스베따 상담사가 뽑은 2021년도 사건은 6개월마다 노동자 몰래 이름을 바꾼 회사의 이야기다. 최 알렉세이(가명)씨는 2019년 12월 5일부터 2021년 5월 6일까지 한 인력사무소를 통해 공장에서 일을 했다. 퇴직금을 줄 수 없다는 이야기에 안산고려인문화센터에 상담을 요청하여 고용노동부 진정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최 알렉세이씨는 퇴직금 소송을 포기했다. 당장 일을 해야 먹고사는 처지에 시간과 돈을 투자해 소송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고려인들이 한국어를 못하고 생계형 노동자가 많다는 약점을 악용하는 이런 노동 상담 사례는 이곳에서는 흔한 일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요

"방과 후에 갈 곳이 없는 아이들이 많아요. 맞벌이일 경우 집에서 혼자 게임만 하거나 길거리에서 노는데 나쁜 목적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방과 후 센터가 있으면 좋겠어요."

"러시아 학교를 다니다가 한국 학교로 편입하는 절차가 복잡해요. 서류를 준비하다가 시기를 놓치는 경우도 있어요. 한국에 입국할 때 서류를 챙겨 오지 않으면 다시 출국해서 서류를 가지고 와야 할 수도 있어요."

"아이가 한국어를 못하니 한국 학교에 보내야 할지, 러시아어 학교에 보내야 할지 고민이 돼요."


집에서 러시아어를 사용하니 러시아어를 잘할 거라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한국에서 자란 고려인 청소년들 중에는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보니 고려인 청소년들끼리 러시아어로 이야기할 때 끼지 못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진다. 러시아어도, 한국어도 잘하지 못한 채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하는 이들이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면 맞벌이를 해야 하는 가정이 많기에 고려인 아이들이 돌봄과 교육을 온전히 누리지 못해 생기는 환경 문제들이 있다. 이들에게는 하루하루 일이 생존임을 알기에 아이의 한국어와 학습을 챙기라는 말이 나오다 목구멍에서 삼켜지는 일이 허다하다.

인천에서 만난 고려인 청소년들의 경우 진로를 정함에 있어서 필요한 진학 정보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선생님들의 관심이 이들에게는 미치지 못해서일까. 어차피 대학은 못 간다고 생각해서일까. 아니면 부모님이 한국어에 서투르기 때문일까.

"고려인은 가족 단위로 이주를 하는 경우가 많아요. 대부분 한국에서 아이들이 대학을 가거나 그 이후까지 정착해서 살 수 있기를 바라죠.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면 아이들에게 미래가 없어요. 한국에 계속 체류하길 희망하는 비율이 90%가 넘어요."

예카테리나씨의 소원은 한국에서 태어나 자라는 고려인 아이들이 한국 국적을 받아 이 나라 저 나라 떠돌아다니지 않고 한국에서 안전하게 자라는 것이다. 원고를 쓰는 사이 2022년 1월 3일부터 국내 거주 재외동포의 초중고 재학 자녀에게 재외동포 F4 비자 자격을 부여한다는 발표가 났다.
 

인천너머고려인문화원의 아이들 ⓒ 이소연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고려인 자녀들이 성인이 되면 비자 문제로 가족을 떠나 혼자 중앙아시아, 러시아로 돌아가 살아야 했다. 고려인 지원 단체 사단법인 너머를 중심으로 문제 제기를 하고 투쟁하여 고려인 4세대도 가족과 함께 국내에 체류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새해부터는 아이들이 불안정했던 F1 동반 비자에서 F4 비자로 바뀌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숫자의 바뀜으로 보이겠지만 고려인 아이들에게는 삶의 생태계가 달라지는 법률 개정이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우리를 외국인이라 하고, 한국에 오니 여기서도 외국인이라고 해요. 우리는 고려 사람, 한인이에요. 고려인들은 설, 한식, 추석 명절을 중요하게 보내요. 돌잔치도 하고 환갑잔치도 하죠. 한국인들이 고려인들을 동포로 대해 주면 좋겠어요. 외국인이 아닌 같은 한인 동포요. 요즘 한국의 출산율이 낮아서 문제잖아요. 한국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고려인 아이들을 한국인으로 바라보았으면 좋겠어요."

고려인들에게 삶은 언제나 투쟁의 연속이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두만강을 건너 황무지를 개척하던 농사꾼일 때도,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을 하며 연해주를 누빌 때도, 40일 동안 시베리아 벌판을 달리던 강제이주 열차에 있을 때도, 살아야 했고 살아남아야 했다.

토굴을 파고 겨울을 나야 했던 혹독한 1937년의 겨울에도 이들은 살아남아서 이듬해 봄 씨앗을 뿌렸다. 그 씨앗은 황무지를 대 농장으로 만드는 기적을 일구었다. 반겨주는 이 없는 곳에서 정착해 살아야 했던 이들이 고국에 돌아와 저마다 삶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 이듬해 봄에는 어떤 싹이 움트고 있을까.
덧붙이는 글 <이주민 르포 :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사람들>은 '익천문화재단 길동무'와 <오마이뉴스> 공동 기획으로 2021년부터 진행되고 있습니다. 익천문화재단 길동무는 한국사회 민주주의의 심화 발전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위한 소박한 일들에 힘을 보태기 위해 김판수·염무웅 선생님, 송경동 시인, 민변 조영선 회장, 김소연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 운영위원장 등의 발의와 참여로 만들어졌습니다. '길동무 청년문학학교', '길동무문학·예술창작기금', '한국사회기층문화보고' 등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gildongmu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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