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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을 뭐라고 번역하시나요? 우린 '성평등주의'로 읽습니다. 성별로 인한 차별을 없애자는 얘기죠(오바마도 페미니스트라네요!). 페미니즘이 오해받는 한국, 그 안에서 페미니스트로 사는 두 여성의 이야기. 2주마다 한번씩 편지를 주고받으며, 연대와 성장을 꾀해봅니다.[편집자말]
안희정을 기억하는 당신에게, 성애가 드립니다

(* 아래 오디오 버튼을 누르시면 편지를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편지낭독 서비스는 오마이뉴스 페이지에서만 가능합니다.)

당신 곁의 페미니즘 · 김건희는 모른다, 미투 뒤 피해자가 겪어낸 일을

혜미씨, 부끄러운 고백으로 편지를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저는 '차기 대통령은 안희정일 것'이라 믿었었거든요.

자칭 '민주주의 직업정치인'이라는 젊은 도지사, 인권조례를 옹호하고 페미니즘 서적을 읽는 남성 정치인... 민주당 대선경선에선 최종득표율 2위를 기록하기도 했죠. 그를 공개지지한 한 국회의원은 "안희정은 이제 시작"이라고 공공연히 떠들곤 했습니다. 

저는 2017년 대선 때 민주당 경선후보였던 안희정의 마크맨 기자였습니다. 한 정치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다니며 발언을 보도하고 속내를 분석하는 고정 출입기자 말이죠. 첫 출마선언부터 경선 패배까지 70여 일 넘게 보도했고, 마지막엔 3개월간의 기록을 모아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 취지의 종합 기사도 썼어요.

국회 출입 초창기던 당시의 저는 캠프 측 관계자들의 '그대안(그래도 대통령감은 안희정)' 건배사를 들었고, 대선 직후엔 다른 출입기자 20여 명과 함께 충남 관사에 초대받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좋게 말하면 관계 유지, 거칠게 말하면 나중을 위한 '언론 관리'였겠죠.

그러나 얼마 뒤인 2018년 3월, 안희정에 의한 성폭행 피해사실이 세상에 밝혀졌습니다. 김지은씨의 인터뷰가 있던 날 저녁, 저는 황당함이 가시질 않아 쉽사리 퇴근할 수 없었습니다. 취재수첩 이곳 저곳을 펼쳐보면서 나는 왜 까맣게 몰랐나, 단서는 없었을까 되짚어봤던 기억이 나요.

"나랑 아저씬 안희정 편"이라는 김건희 
 
2017년 3월24일, 더불어민주당 대선경선에 출마한 당시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지지를 호소하는 모습.
 2017년 3월24일, 더불어민주당 대선경선에 출마한 당시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지지를 호소하는 모습.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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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기억이 떠오른 이유는 갑자기 소환된 안희정 때문입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배우자 김건희씨가 "나와 아저씨(윤석열)는 안희정편"이라고 <서울의소리> 기자와의 통화에서 말했었죠. 

김건희씨는 "돈을 안 챙겨줘서 미투가 터진다" "보수는 돈 챙겨주니 미투가 별로 안 터지는 것"이란 문제적 발언을 했고, 이는 결국 외신에까지 보도됐습니다. 이 분은 '터치' 박희태(새누리당 상임고문), '그립' 윤창중(박근혜 청와대 대변인) 등 보수 정치인들의 성추행은 잊으셨나 봐요.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사적 통화'라 주장하며 2차 가해는 아니라고 김씨를 두둔했지만, 그건 피해자가 판단할 일이죠. 더구나 안희정은 앞서 대법관들이 "업무상 위력으로 피해자를 추행했다"며 징역 3년 6개월, 성폭력 치료강의 40시간 이수 등 유죄판결을 내렸었잖아요.

결국 김지은씨는 17일 배우자 김건희씨 측에 공식 사과를 요청했습니다. "당신들이 생각없이 내뱉은 말들이 2차 가해의 씨앗이 돼 지금도 악플에 시달리고 있다. 당신들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지만, 변화의 노력에 장애물이 되지는 말아달라"고요(기사 보기). 

'석열이형·건희누나'가 봐야 할 책 
 
MBC 시사프로그램 <스트레이트>가 16일 방송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 부인 김건희씨가 이명수 기자와 통화하며 발언한 내용.
 MBC 시사프로그램 <스트레이트>가 16일 방송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 부인 김건희씨가 이명수 기자와 통화하며 발언한 내용.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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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희씨는 기자에게 자신을 '누나'라 부르라고 했다죠? 윤 후보 측은 초기 자신을 '석열이형'이라 칭하며 2030남성을 향한 구애를 드러냈고요. 그러나 '건희누나'와 '석열이형'은, 아마 이 책은 평생 집어들지도 펼쳐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안희정 성폭력 피해자의 이야기가 담긴 책 <김지은입니다>(2020년, 봄알람) 말이에요. 김지은씨는 말합니다.

"사람들은 제게 묻습니다. 왜 네 번이냐 당했냐고요. 제가 피고인(안희정)에 되묻고 싶습니다. '그러지 않겠다'더니 왜 폭력까지 써가며 한 번 더, 거절의사를 표해도 제압하면서, 왜 네 번이나 그랬냐고 묻고 싶습니다. 제게는 네 번이 아니라 한 번 한 번 다 다르게 갑자기 당한 성폭행이었습니다." (347쪽, 1심 결심공판 최후진술 발언 중)

"세 분 판사님. 안희정에게 물으셨습니까? 왜 미안하다면서도 그렇게 여러 차례 농락했느냐 물어보셨습니까? 왜 페이스북에 '합의에 의한 관계가 아니었다'고 썼느냐고 물으셨습니까? 왜 검찰 출두 직후 자신의 휴대폰을 파기했느냐 물으셨습니까? 왜 제게는 물으시고 가해자에게는 묻지 않으십니까? 왜 제 답변은 듣지 않으시고, 답하지 않는 가해자 말은 귀담아 들으십니까?" (357쪽, 미투운동과 함께 하는 시민행동 집회 발언 중)


김건희씨 자신도 여성혐오적 손가락질에 시달렸던 사람인데, 그런 그조차 가해남성에 자신을 이입하고 다른 여성을 비난하는 게 역설적이라고 느껴져요.

'부적절한 발언이었다'는 해명이 진심이라면, 김건희씨가 지금이라도 이 책을 펼쳐 피해자의 고통도 상상해보길 권합니다. "처음 미투 뒤 밥을 먹지 못해 30kg 후반까지 살이 빠졌고, 먹는 족족 토했다(326쪽)"는 심정을요.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았던 안희정은 예정대로면 오는 8월 출소하게 됩니다. 대선도 다 끝나 있을 그때, 그 여름 우리는 어떤 세상을 살고 있을까요. 피해자보다는 가해자를 추궁하는 사회, 김지은씨가 지금보다 조금은 숨 쉬기 편한 세상이길 기대해봅니다.

▲ 당신에게 추천합니다: 한국의 미투 운동을 촉발했던 서지현 검사와 일본의 성폭력을 공개 폭로한 이토시오리 기자가 만났습니다. "피해자들에겐 해줄 말이 없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라며 "피해자의 용기 없이도 범죄자들이 처벌받는 사회가 돼야 한다"는 서 검사의 말을 함께 듣고 싶어요(영상 보기).   

2022년 1월 19일
'김지은들'에게 진한 연대를 보내며, 성애 드림

덧붙이는 글 | 기사는 추후 개인브런치에도 게재됩니다.

<김혜미>
연재는 처음이라. 마포에 살고, 녹색 정치를 하며, 사회 정책에 관심있게 움직이는 사람. 셰어하우스에 살며 분리수거를 잘 하고싶은 페미니스트. 삶과 이상을 잇고-짓고 싶은 사회복지사. 날기싫은 비행기와 춤추고 싶은 멋쟁이 토마토를 간신히 연주할 수 있는 우쿨렐레 초보. 토마토 음식으로 해장하는 사람.

<유성애>
아픈 몸을 사는 사람, 편집노동자. 스스로 장애인-비장애인 경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20대 초반 한 팔 두 다리가 부러졌던 경험이, 의도치 않게 여자로 태어나 살며 겪었던 일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다. 소외된 사람들 목소리에 마음이 더 기운다. 성평등한 국회, 성평등한 오늘을 꿈꾸는 페미니스트.


태그:#김건희, #윤석열, #안희정, #김지은입니다, #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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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플러스 에디터. 여성·정치·언론·장애 분야, 목소리 작은 이들에 마음이 기웁니다. 성실히 묻고, 세심히 듣고, 정확히 쓰겠습니다. Mainly interested in stories of women, politics, media, and people with small voice. Let's find h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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