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1.11 06:10최종 업데이트 22.01.11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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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1일 멕시코 대통령 AMLO의 취임식은 수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멕시코 대통령궁 앞 헌법광장 소깔로Zocalo에서 거행되었다. 취임 행사와 관련하여 그가 내건 약속은 초대받은 자와 초대받지 못한 자를 구분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약속대로 그의 취임식은 야외에서 거행되었고 시민들 누구든 광장에 입장할 수 있었다. 세 시간 넘게 진행된 취임식 문화행사 대부분은 멕시코 원주민 전통 방식으로 재현되었다. 이 자리에 그의 부인 베아트리스 구티에레스Beatriz Gutierrez도 동석하였다. ⓒ 멕시코 대통령처

 
지난 12월 31일, 멕시코 대통령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Andrés Manuel López Obrador, 이하 AMLO)가 대통령궁 마당에서 송년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례적이었던 것은, 그의 부인 베아트리스 구티에레스(Beatriz Gutierrez)가 동석했다는 점이다. 물론, 그녀가 별도의 메시지를 더하진 않았지만, 남편 AMLO 옆에 같이 선 것만으로도 충분히 드문 일이었다.

영부인 혹은 퍼스트레이디, 동의어는 아니지만 둘 다 국가 원수의 부인을 지칭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최근 대선을 앞둔 대한민국에서 모 후보가 자신의 배우자 관련 학력 및 경력 위조 의혹이 제기되자 엉뚱하게도 "청와대의 제2부속실을 폐지하겠다"고 하고, 그의 부인은 "남편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아내 역할에만 충실하겠다"는 말로 두루뭉실하게 넘어가면서 그 말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과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였다. 숱한 의혹의 중심에 있는 후보의 배우자가 자신에 대한 사회적 공분을 잠재우기 위한 마지막 카드로 생각하고 던진 수일 텐데 오히려 역효과가 초래된 듯하다. 그간 대한민국 대선에서 영부인에 대한 쟁점이 이번처럼 첨예하게 불거졌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영부인의 지위 혹은 역할과 관련하여, 사실 멕시코에서도 2018년 현 대통령 선거를 위한 승부수가 한참 띄워질 때 당선 가능성을 놓고 접전을 보이던 후보가 매우 흡사한 발언을 했다. 자신이 대통령으로 당선이 된다 해도 자신의 아내는 멕시코에서 프리메라 다마(Primera Dama, First Lady의 스페인어 표현)로 살지 않을 것이란 내용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작금 대한민국에서 사회적 공분을 사고 있는 모 후보의 발언과 동일해 보이지만, 그 의도와 속내가 현저히 다름을 미리 밝힌다. 

이례적인 퍼스트레이디

역사적으로 멕시코 대통령의 배우자는 임기 동안 상징적이고 의례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다. 또 하나의 '권력'이기도 했다. 그런데 당선이 유력한 후보가 그와 반대되는 내용을 발표하자 사회적 관심이 촉발되었다. 

실제로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이번엔 그의 부인이 직접 나서서 영부인 역할을 수행하지 않을 것을 재차 확인하여 발표했다. 기자회견에서 그녀가 언급한 내용은 '굳이' 그간 정형화된 영부인의 역할이 아니더라도 그녀 자신이 멕시코를 보다 더 좋은 나라로 만들기 위해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하고 있던 자신의 일 역시 멕시코의 발전을 위해 중요할 뿐 아니라 특히 늘 바쁠 아빠를 대신해 열 살 먹은 아이의 엄마 역할을 온전히 감당해 내는 것도 중요한 일이란 점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당선된 대통령도 자신의 아내는 현재 근무하고 있는 대학교의 교수로서 그리고 작가로서, 또 무엇보다 중요한 엄마로서 역할을 수행할 것임을 강조하면서 아내의 발언에 힘을 실어줬다. 그간 멕시코에서 영부인이 점해온 상징적 혹은 사회적 지위를 생각해보면 대통령으로 당선된 AMLO와 그의 아내 베아트리스의 제안은 가히 이례적이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미국의 영향을 받아 대통령 부인에 대해 퍼스트레이디라는 지칭을 스페인어로 바꿔 프리메라 다마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간 라틴아메리카 모든 나라들을 통틀어 대통령 부인 중 가장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이는 아마도 아르헨티나의 에바 페론일 것이다. 3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퍼스트레이디로서 동시에 노동복지부 장관으로서 가난한 자, 병든 자, 약한 자의 편이 되어주었기에 많은 이들로부터 구원자 혹은 성녀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1951년 연설하고 있는 에바 페론. ⓒ wiki commons


결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멕시코 역시 1960년대 이후 대통령 부인들이 기존에 비해 좀 더 적극적으로 사회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확인은 어렵지만, 그녀들의 롤모델은 아르헨티나의 에바 페론이었을 것이다. 성녀와 구원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약하고 소외된 자들을 껴안을 수 있는 국모 상이길 원했을 것이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영부인이 주도하여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국가적 프로젝트들이 진행되었다.

감투와 벽돌

이를 관장하기 위해 국가 기관들이 만들어졌다. 1961년 '국가 아동보호처(Instituto Nacional de Protección a la Infancia)'가 신설되었고 이후 여러 번 조직이 개편되면서 현재 '국가 통합 가족부(Sistema Nacional para el Desarrollo Integral de la Familia)'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대통령처 직속기관으로 탄생한 이들 조직에서 의례적으로 영부인들이 수장을 맡는 전형이 만들어졌다. 이로써 멕시코 내 아동, 가족, 빈곤, 소외 같은 문제들은 국모 격인 영부인에 의해 보호받고 위로 받는다는 이미지들이 수십 년 동안 재생되었다.

이 시스템은 연방정부뿐 아니라 각 주정부와 시, 군, 읍/면 단위 지방정부까지 적용되어 어디든 수장이 있는 곳이라면 '통합가족부'가 만들어졌다. 물론 통합가족부의 리더는 주지사를 포함해 각 시, 군, 읍/면 장의 부인이 맡았다. 지방정부 수장이 여성이거나, 혹 남성이지만 부인이 없는 경우 가족 중 여성 형제가 맡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통합가족부에서 하는 일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가난한 자들에게 음식이나 생필품을 지원해주는 것이다. 문제는 공공예산을 집행하여 물자를 구입하고 분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잡음이다. 그 중 가장 고질적인 것은 전문성 부족과 부정부패로 인한 예산의 오용과 유용이다. 특히 규모가 작은 지방정부일수록 적절한 감시시스템을 갖추기 어려운 상황에서, 부정부패를 하기로 마음먹는다면 통합가족부야 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다름 아니다. 게다가 수장이 바뀔 때마다 전 직원이 통째로 바뀌면서 개인의 사조직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흔하다.

그럼에도 멕시코에서 여전히 이런 시스템이 유지되는 것은 연방정부든 지방정부든 각 정부 수장의 여성 배우자 혹은 형제들이 사회적 약자들을 끌어안아야 한다는 사회적 기대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를 둘러싼 관련자들의 이해관계가 계속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지사든 시장이든 혹은 읍∙면장까지 그들의 부인 혹은 여자형제들 중 혈연을 이유로 상당한 정치적∙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할 이는 흔치 않다. 한국에 '감투'가 있다면 멕시코엔 '벽돌'이 있다. 아주 작은 지위라도 오를 수만 있다면 밟고 올라 사람을 아래로 내려다보고 싶은 욕망이 표현된 말이다. 올라 선 그 곳이 겨우 벽돌 한 장 높이라 해도 말이다. 권력을 갈망하고 그 앞에 유난히 민감한 멕시코인들의 이런 성정을 일러 '벽돌주의'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다.

그런데 지난 대선에서 오랜 시간 의전과 의례로 자리 잡은 이런 문화에 '과연 그래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던져졌고, 그 물음을 던진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이전과 다른 역사가 쓰이고 있다. 사실 2000년부터 2006년까지 멕시코 대통령이었던 비센테 폭스(Vicente Fox)의 부인 마르타 사하군(Martha Sahagun)도 통합가족부의 수장을 맡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경우 통합가족부와 같은 성격을 갖는 새로운 단체를 만들어 그 곳에서 영부인으로서 활발히 활동했으니 지금의 경우와는 다르다 할 수 있다.

특혜도 오점도 없는... 롤모델

지난 대선에서 AMLO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베아트리스가 기자회견을 자처했다. 그 곳에서 발표된 내용은 그녀의 남편이 대통령이란 사실만으로 그녀가 '퍼스트레이디'라 불려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퍼스트가 있다면 세컨드(Second) 이하 차위가 있을 텐데 모든 여성은 다 같은 여성일 뿐이지 그 안에 굳이 퍼스트 혹은 세컨드로 구분 지을 필요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덧붙이길 구체적 업무와 그에 대한 법적 책임이 따르지 않는, 그간의 의례적이고 상징적 역할뿐이라면 이제는 멕시코 현실에 기대어 다시 생각해봐야 할 때이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2018년 12월 1일, 남편의 대통령 취임 이후 그녀는 여전히 그간 몸담았던 직장에서 근무 중이다. 그녀의 직업은 현직 대학교 교수이자 여러 편 소설을 출판한 작가이기도 하다. 남편이 대통령이 된 이후 새로 부가된 유일한 활동은 '역사 및 문화기억 국가위원회'의 외부 자문위원뿐이다. 물론 무보수다.

지난 2019년 그녀는 소속 대학교의 비정년 트랙에서 정년트랙으로 옮겨졌다. 이에 대해 여러 언론들이 혹시 대통령을 남편으로 둠으로써 얻은 특혜가 아닐까 파헤쳤지만, 해당 대학의 경우 근무 개시 이후 최초 5년은 비정년 트랙으로 임용되고 일정 수준의 연구와 업무 실적을 채우면 5년 이후 정년 트랙으로 자동 전환되는 시스템으로 계약이 운용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언론들이 제기한 물음이 실효를 얻지 못했다.
 

2019년 12월 10일, 멕시코 대통령 부인 베아트리스 구티에레스가 자신이 근무하는 대학교 Benemerita Universidad Autonoma de Puebla 총장으로부터 정년트랙 임명장을 받고 있다. 그녀의 승진심사와 관련하여 여러 언론들이 특혜가 아닐까 의혹을 가지고 문제를 제기했으나, 특혜 정황은 발견되지 않았다. 같은 날 그녀 외 171명이 정년트랙 임명장을 받았다. (Alfonso Esparza y Beatriz Gutierrez Muller 제공)

 
이어 2020년에는 멕시코 연방정부 산하 과학기술위원회에 의해 임명되는 국가연구원 선발 결과를 둘러싸고 언론들이 다시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멕시코의 경우 연방정부 산하 국가과학기술위원회가 각 대학의 교수와 연구원들을 대상으로 국가연구원을 선발하고 임명한다. 매달 상당한 수준의 경제적 지원을 받을 뿐 아니라, 멕시코 전체 교수들의 약 3-5% 정도만 국가연구원으로 선발되기에 교수 개인뿐 아니라 학교 입장에서도 명예로운 일이다. 대학 등급 평가에 해당 대학이 보유한 국가연구원 숫자는 매우 중요한 항목이기도 하다. 그러니 선발 기준과 절차를 충족하기가 복잡하고 어려울 수밖에 없다.

베아트리스는 2016년 국가연구원 '후보'로 선발되었고 (물론, 후보라도 경제적 지원과 상당한 명예를 얻는다), 2020년 후보의 차상위 등급인 1급으로 상향 선발되었다. 이 결과를 두고 혹시 '특혜'가 아닐까 하는 물음들이 언론을 통해 재차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여러 증빙과정을 통해 온당한 결과임이 밝혀졌다. 남편의 대통령 당선 직후 영부인 역할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어린 아이를 키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논문을 쓰는 일 만으로도 벅차다고 답하던 그녀의 모습이 오버랩 될 만한 결과였다.

그렇다고 그녀가 대통령의 배우자로서 역할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드물지만 독립기념일 같은 주요 경축일에 남편과 동석하여 국민들에게 인사를 전하고 국제행사에 대통령 배우자의 자격으로 참여하기도 한다. 이전 영부인들에 비해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녀의 삶에 대해 어느 기자가 남편과 같이 하는 시간이 너무 적지 않느냐 묻자 '남편과 같이 하는 시간은 매일 집에서 보는 시간으로 충분하다'라고 답했다. 앞으로도 그녀의 삶은 지금과 같은 방향으로 흘러 갈 것에 대한 암시인 셈이다.

AMLO가 대통령이 된 이후 대통령처 규정으로 존재하던 통합가족부는 복지부로 이관되었다. 대선 기간 동안의 약속이기도 하다. 아동, 가족, 빈곤, 소외와 같은 문제들이야 말로 상징적 의례를 떠나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는 취지다. 이 결정으로 멕시코에서 지난 세기 아르헨티나에서 성녀 혹은 구원자로 칭송받았던 에비타(에바의 애칭)가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전문적인 정책이 나올 것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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