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15 06:30최종 업데이트 21.12.15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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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12 쿠데타 42주년을 맞아 이달 11일 자 <뉴스타파> '일본 외무성의 전두환 파일 최초 공개'가 보도한 내용에는 전두환의 권력 장악 과정과 관련해 참고할 부분들이 있다. 기존에 나온 여타 자료들과의 비교·대조가 필요한 부분도 있지만, 일본 외무성과 주한일본대사관의 정보망에 포착된 당시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알려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전두환 회고록>에는 전두환의 엄살 혹은 겸양이라고도 할 수 있고 뻔뻔한 책임 회피라고도 할 수 있는 대목이 있다. 5·17 쿠데타와 5·18 학살이 있었던 1980년 그달에 자신은 힘이 없었노라고 서술하는 부분이 그것이다. 그러니 자신은 광주 학살과 무관하다는 게 그의 결론이었다.


회고록 제1권에서 그는 "그 당시 정부의 버팀목은 신현확 총리와 이희성 계엄사령관, 그리고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직하고 있던 나"였다며 "공무원 조직을 관장하고 있던 신 총리나 실병력을 장악하고 있는 이 사령관과 달리 나는 실제로는 쓸 수 있는 힘이나 수단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니 최규하 정부를 지켜낼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은 이희성 사령관의 계엄군뿐이었다"고 그는 강조했다. 12·12 쿠데타로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연행된 다음날에 취임한 이희성 계엄사령관만큼의 힘이 자기에게는 없었다고 진술한 것이다.

전두환-이희성의 실제 관계

육사 8기로서 전두환의 세 기수 선배인 이희성은 10·26 사태로 박정희가 쓰러지기 8개월 전인 1979년 2월 10일 육군참모차장에 임명됐다. 그가 12·12 다음날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 생전인 2월 10일의 인사발령 때문이었다. 그 인사조치 결과로 계엄사령관이 됐기 때문에 외형상으로는 전두환의 권한과 이희성의 권한이 상호 병렬적으로 보일 수도 있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10·26 사태 나흘 뒤 이희성이 김재규 체포로 인해 위상이 추락한 중앙정보부를 맡게 됐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0·26을 계기로 중앙정보부와 보안사의 위상은 역전됐다.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 시해범이 되어 체포되고 보안사령관이 그 시해범을 체포한 결과였다. 이로써 중정이 보안사의 지시를 받는 구도가 생겨났으므로, 10월 30일부터 이희성 중정부장서리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지시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희성이 계엄사령관이 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이희성이 계엄사령관이 되기 전날 전두환이 쿠데타를 성사시켰기 때문에 이희성은 더욱더 전두환에게 예속될 수밖에 없었다.

<뉴스타파> 보도에 따르면, 그런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줄 만한 장면이 외무성 파일에 담겨 있다. 광주 시민군이 전남도청을 접수하고 계엄군이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던 1980년 5월 24일 오후 2시 2분에 주한일본대사관이 외무성에 발송한 비밀 전문에 그런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한다. 비밀 전문의 내용은 이렇다.
  

<뉴스타파> [12·12 특별기획] 일본 외무성의 '전두환 파일' 최초 공개 중에서. 2021.12.11 ⓒ 뉴스타파

 
어젯밤 이희성과 전두환 등이 밀실에서 광주사태 수습책 등을 둘러싼 협의 중, 두 사람이 말다툼을 하다 전두환이 이희성을 향해 발포한 것 같다. 이희성이 총탄을 맞았는지 어떤지는 불명하지만, 적어도 그의 생명에 이상은 없는 모양이다.
 
1924년 생으로 전두환보다 일곱 살 많은 이희성 당시 사령관은 아직 생존해 있다. 좁은 밀실에서 전두환이 총을 쐈는데 이희성이 무사했다면 그날의 발포는 위협용이었을 것이다.

회고록 제1권에서 전두환은 "나는 계엄사령관의 정보참모"였다고 말한다. 그러니 자신은 5·18 학살과 발포의 책임자가 아니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하지만 외무성 파일에 따르면, 그는 계엄사령관을 총으로 위협할 정도의 권세를 부리고 있었다. 이 파일은 '나는 힘이 없었어요'라는 전두환의 '겸양'을 반박할 자료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은 '5·18 북한군 개입설' 하면 극우인사 지만원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이 가짜뉴스의 원조가 전두환이라는 점은 2018년 5월 19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잔혹한 총성 제2부 - 학살을 조작하라' 편에도 언급됐다.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팀이 학자들과 함께 조사한 미국 국무부 및 CIA 비밀문서에 따르면, 1980년 6월 4일 전두환은 미국상공회의소 관계자와의 대화에서 광주항쟁에서 발견된 시신 중 22구와 관련해 "그 22구의 시신은 모두 북한에서 온 스파이일지 모른다"라고 발언했다.

비슷한 내용이 이번 <뉴스타파> 보도에도 언급됐다. 광주학살 기간인 5월 24일 서울 어느 호텔에서 전두환이 신문사 편집국장들에게 "북한군이 비정규군을 앞세워 전쟁을 기획하고 있다"라고 발언한 사실이 외무성 파일에 담겨 있다고 한다.

별도의 군사조직

그에 더해, 이 파일에는 전두환이 정권의 완전 장악을 위해 별도 기구를 초보적 단계에서나마 구성했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그해 5월 22일 자 외무성 문서에 따르면, 이날 합동통신 간부가 일본대사관 직원인 후루카와에게 '군부가 14명과 후보 2명으로 구성된 군사혁명위원회를 만들고 있으며 이 기구의 가칭은 비상대책회의다'라는 내용을 귀띔해주었다고 한다.

보고서에 적힌 군사혁명위원회 조직도는 의장이 전두환이고 부의장이 이희성이었음을 알려준다. 이 외에 노태우·정호용·김복동·유학성·황영시·차규헌·유병현 등의 이름도 올라 있다.
  

<뉴스타파> [12·12 특별기획] 일본 외무성의 '전두환 파일' 최초 공개 중에서. 2021.12.11 ⓒ 뉴스타파

 
외무성 파일을 분석한 이재의 5·18 기념재단 연구위원은 <뉴스타파>에 "1995년 검찰이 5공 비리와 광주학살 문제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전두환의 신군부가 시국수습대책의 일환으로 군인들로 구성된 비상기구 설치를 준비했고 이 조직을 이용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사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라며 "그런데 이 비상기구의 내용은 정확히 알려지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한다.

이재의 연구위원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 비상기구가 아마 전두환이 상임위원장을 맡았던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였을 것이다'라고 막연하게 생각해왔죠"라고 한 뒤 "그런데 이번에 일본 외무성 문서에서 국보위와는 별도 조직을 전두환 신군부가 기획했다는 사실이 발견된 겁니다"라고 설명한다.

국보위는 최규하 정부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일종의 임시정부였다. 이것은 군사조직은 아니었다. 김종인 당시 서강대 교수 같은 민간인들까지 참여한 국보위를 갖고 불법적 권력 장악을 일사불란하게 밀어붙이기는 힘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1995년 검찰 수사에서 거론된 비상기구가 군인들로 구성된 군사혁명위원회였다고 하면 자연스러워진다. 12·12로도 불충분했던 정권 장악을 위해 군사혁명위원회 조직에 착수해야 했던 전두환 신군부의 내부 사정이 외무성 파일을 통해 좀 더 자세히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군사혁명위원회와 관련된 파일에서도 전두환이 이희성의 실질적 상급자였음이 좀 더 분명히 드러난다. 전두환이 혁명위원회 의장이고 이희성이 부의장이라고 했다. 상하관계의 위쪽에 전두환이 있고 아래쪽에 이희성이 있었기에, 전두환이 위협용으로나마 밀실에서 방아쇠를 당기고도 무사했으리라고 볼 수 있다.

전두환·이순자의 극력 부인과 관계없이 5·18 광주학살과 발포 명령과 헬기 사격 등의 최정점에 전두환이 있었다는 점이, 누구나 다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번 외무성 파일 보도로 인해 한층 더 선명해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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