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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들이 모여 만드는 거시적인 이야기에 관심이 있어요."

지난 8일~16일까지 종로구 자하문로에 위치한 전시공간 더레퍼런스(The Reference)에서 설치작업 <얼룩 무지개 숲(Stain-Rainbow Forest)>을 여는 이지연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사진 콜라주를 비롯해 판화, 영상, 설치 등 다양한 미디어 작업을 소화하는 이 작가는 그동안 꾸준히 고민해온 '나노 패턴 복제기술'과 'LED 라이팅 제어 시스템'을 활용해 이번 작품을 공개했다.
 
12월 8~16일까지 종로구 자하문로에 위치한 전시공간 더레퍼런스(The Reference)에서 진행한 설치작업 <얼룩 무지개 숲(Stain-Rainbow Forest)>을 여는 이지연 작가는 작은 것들이 모여 만드는 거시적인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
 12월 8~16일까지 종로구 자하문로에 위치한 전시공간 더레퍼런스(The Reference)에서 진행한 설치작업 <얼룩 무지개 숲(Stain-Rainbow Forest)>을 여는 이지연 작가는 작은 것들이 모여 만드는 거시적인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
ⓒ 이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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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레퍼런스 지하 프로젝트룸의 아치형 문을 통과하면 하늘에서 수직으로 내려오는 4000여 장의 필름으로 뒤덮인 설치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매시간 마다 15분 간격으로 약 5분 동안 라이팅 퍼포먼스가 진행되는데 관람객은 천장에서 내려오는 빛의 흐름에 따라 형형색색 변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작가는 "엄격하고 정밀한 과정을 거치는 '나노 패턴 복제기술'이 미술에서 판화가 제작되는 과정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반도체 제작기술을 통해 제작된 '나노 웨이퍼 원판'에서 제각각 다른 패턴의 구조색 필름을 복제하는 것"이라고 이 작품을 소개했다.

나노 단위의 미세한 구조를 지닌 4000여 장의 필름은 외부의 빛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오색찬란한 현상을 극적으로 가시화한다. 빛을 통해 색을 인지하는 과정은 지극히 주관적인 뇌의 경험이지만, 빛이 인간에게 주는 긍정적인 의미와 심리적인 영향은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보편성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한다.
 
더레퍼런스 지하 프로젝트룸의 아치형 문을 통과하면 하늘에서 수직으로 내려오는 4000여 장의 필름으로 뒤덮인 설치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더레퍼런스 지하 프로젝트룸의 아치형 문을 통과하면 하늘에서 수직으로 내려오는 4000여 장의 필름으로 뒤덮인 설치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 이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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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의 원래 전공은 조소과였는데, 시각예술이 대체로 그렇듯이 전공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사진 찍기를 좋아했단다. 사진 작업이 원래 '원본과 복제'의 문제라며, 대학시절에 디지털 카메라가 처음으로 나오면서 예전처럼 필름을 아끼지 않고 찍어도 됐다고 기억했다.

"그때는 정말 같은 장소, 같은 인물을 많이 찍었어요. 하나의 원본을 사진이 계속 복제하지만 그게 똑같지 않고 모두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어요. 이것은 생명이 번져나가는 현상과 같다는 사실도 알게 됐고요."

이후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진을 찍으면 프레임 안을 들여다보는데, 그는 프레임 밖을 상상했단다. 같은 장소를 찍으면서 시간이 변하는 모습을 모아 다른 신(scene)을 만드는 작업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미시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됐다. 하지만 기술적인 부분에서 한계를 느꼈고, 결국엔 2020년 아티언스 대전에 나노 분야의 작가를 뽑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 작업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나노 패턴 복제기술'에서 제 작업과 유사성을 발견했어요. 복제라는 것이 단 하나의 같은 복제가 되지 않아요. 그 패턴은 자연으로부터 오고 기술을 통해서 인간의 영역으로 들어왔어요. 이런 빛 현상에서 색은 원래 없는 것이죠. 카멜레온을 생각해보세요. 원래는 색소가 없대요. 원자현미경으로 들여다보니 어떤 구조가 있었는데, 구조에 빛이 들어가고, 반사되는 것을 우리는 색깔로 인식하는 것이에요. 이것을 과학자가 발견하고 기술로 완벽하게 패턴을 구현한 것. 그것을 반도체 웨이퍼 원판을 나노단위로 새겨 넣어 복제하는 것을 '나노 패턴 복제기술'이라 합니다."

덧붙여 그가 흥미를 느낀 계기는 작업을 하는 방식에서 영감을 얻었다 고백했다.

"실험실에서는 원판에서부터 얼마나 깨끗하게 필름 위에 복제하는 것이 관건이지만, 저는 판화 방식과 비슷함에 흥미를 느꼈어요. 실험실에 들어갈 때는 3번의 클린룸을 거쳐요. 완전히 빛과 먼지가 통제되는 상태에서 어마어마한 장비가 있는데, 판화용 롤러를 쓰는 것이 흥미로웠어요. 복제하는 기술을 배웠고, 한국기계연구원 나노공정 연구실의 최대근 박사와 협업을 통해 작업실에서 만들어내는 과정에 자문을 얻었고요."

이 과정은 반도체 웨어퍼 원판에 특수 경화제를 얹고 4000여 장의 복제필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신기술을 활용했지만 예술에 기반을 둔 판화의 과정과 뭐가 다르냐며 반문했다.

"손금을 복제하려면, 손바닥에 물감을 넣고 필름이나 종이로 덮어 롤러로 문지른다고 생각해보세요. 차이점이 있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 패턴이다 보니 복제하기 위해 특수 경화제가 사용되고 이를 UV조사기에 경화시켜야 패턴복제가 가능하다는 겁니다."

예술과 기술이 절묘하게 결합된 작품을 위해 꾸준하게 고민한 이 작가는 우연한 계기에 이번 작품이 탄생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자연 속에 존재하는 '빛'이라는 본질적인 현상에 왜 아름답다고 느낄까요? 그것은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이라 생각해요. 주광동물인 인간은 빛으로부터 에너지를 얻는 현상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데, 구조색은 이미 자연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단지 우리가 발견하지 못하다가 기술을 통해 우리의 영역으로 넘어온 것이 아닌가요?"
 
1층 윈도우갤러리에서는 진화 초기단계의 원시 생명체에서 영감을 얻어 기본 구조를 3D프린팅으로 제작하고 외부를 구조색 필름으로 덮은 회전조각을 선보였다.
 1층 윈도우갤러리에서는 진화 초기단계의 원시 생명체에서 영감을 얻어 기본 구조를 3D프린팅으로 제작하고 외부를 구조색 필름으로 덮은 회전조각을 선보였다.
ⓒ 이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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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에서 진행된 작품의 소개를 마치고 1층 윈도우갤러리에 올라가 새롭게 확장된 버전도 소개했다. 진화 초기단계의 원시 생명체에서 영감을 얻어 기본 구조를 3D프린팅으로 제작하고 외부를 구조색 필름으로 덮은 회전조각이다. 무엇보다 작품은 '빛으로 만든 가벼운 조각'의 의미를 살려 형식적인 실험으로 완성됐다.

"빛 덩어리가 공간에 떠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컴퓨테이셔널 디자이너(computational Designer)의 도움으로 알고리즘 프로그램으로 제작했는데, 이는 부분의 변화가 전체에 연결되는 유기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알고리즘 구조에서 정한 수치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는 무한 변종할 수 있고, 디지털로 형태를 만드는 것과 자연에서 생명이 번지는 방식과 닮은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예술과 기술이 결합된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는 작품에 주목한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2017년부터 새로운 지원사업을 추진했다. 올해는 <예술과기술융합지원사업>(arko.or.kr/artntech)을 통해 총 79개 팀을 선정하였으며 이지연 작가의 <얼룩 무지개 숲>은 유형2(기술개발 및 창제작) 선정작품 중 하나다.

이지연 작가는 살롱드 에이치 서울, 스페이스K 대구, 메이크샵아트 스페이스 파주, 인터랙션 서울, 경기도 미술관 프로젝트 갤러리 등에서 개인전을 진행했으며, 소카아트센터(중국), 이스페이스 루이비통(홍콩), 사치 갤러리(런던), Le Tripostal 뮤지엄(프랑스), 론만도스 갤러리(네덜란드), 아키요시다이 국제 예술촌(일본) 등 해외전시도 참여했다. 2020년 아티언스 대전을 계기로 미시세계에 대한 관심을 예술과 과학기술로 풀어내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해오고 있다.

태그:#이지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과기술융합지원사업, #더레퍼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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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빼고 문화만 씁니다." 매주 금요일마다 한겨레신문에 예술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사람in예술' 코너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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