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06 15:21최종 업데이트 22.07.27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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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이주자는 살아 숨 쉬는 자인가. 존 버거는 <제7의 인간>에서 이들을 가리켜 "불사의 존재, 끊임없이 대체 가능하므로 죽음이란 없는 존재"라 했다. 오직 노동하는 몸으로 기능하기를 요구받고, 표류함이 당연시 여겨지고, 존재할 권리를 국가의 허락에 구해야 하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와 난민의 현주소이다. 체류권을 '허가'받은 이주민들조차 한국 사회의 성원권을 제대로 획득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국가는 잔혹하고, 사회는 무심하다. 그럼에도 사람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계속되는 일. 한국사회에서 살아 숨 쉬는 이주민들의 삶을 르포르타주로 담고자 한다.[편집자말]
영애(가명)씨를 만나기로 한 곳은 양천구의 어느 전철역 앞이었다. 경기도 북부에서 수도권 전철을 두 번 갈아타고 서울의 약속 장소까지 오면서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인지 상상해 보았다.

중국동포와의 만남은 처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1980년대 후반 서울역과 덕수궁 주변 그리고 탑골공원 후문 근처에서 낯선 행색의 사람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한약재를 파는 광경을 눈여겨본 적은 있다. 식당에서 음식을 서빙할 때 특유의 억양으로 말하는 분들이 중국동포일 것이라 짐작한 적도 있다. 잠깐 스쳐지나가는 상황을 '만남'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그럴 때마다 '조선족' 혹은 '연변 사람'이라는 명칭이 머릿속에 먼저 떠오르곤 했다.
  
'중국동포'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2009년 국립국어원의 제안 이후였다. 지금은 공공기관에서 '중국동포'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그전에 쓰던 '조선족'이라는 말 자체에는 아무런 폄하의 의미도 들어 있지 않다.


1955년 중국에 옌볜 조선족 자치주가 생기면서 조선족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다민족 국가인 중국에서 소수민족에 중국 공민의 지위를 주는 명칭이었다. 조선족을 낮춰 보던 한국인의 시각이 그 단어가 품은 사회성 혹은 역사성을 오염시켜 공식적인 자리에서 밀려나게 했다. 어떤 이들은 오히려 중국동포라는 명칭이 한국인 중심의 표현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돌봄노동의 자리
  
전철역 앞에서 금세 서로를 알아보았다. 영애씨는 맛있는 점심을 먹으러 가자는 나의 제안에 근처에 유명한 김치찌개 집이 있다면서 앞장섰다. 중국에서 오신 분을 잘 대접하려면 양고기 집이나 중화요리 집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궁리하던 나로서는 뜻밖의 선택이었다. 한국 음식이 입에 잘 맞으시냐는 나의 어리석은 물음에 영애씨는 미소를 지으며 1997년에 한국에 와서 20년 이상 살았다고 대답했다.
  
영애씨는 1975년에 중국 선양시에서 태어났다. 선양은 옛 만주의 중심 도시이며, 일제강점기에 펑톈 혹은 봉천이라 불릴 때 우리의 독립지사들이 많이 활동하던 곳이다. 영애씨의 할아버지는 원래 청주가 고향인데 잘 살아보겠다는 각오로 식솔들을 이끌고 만주로 이주했다. 영애씨의 부모님은 모두 중국에서 태어난 분들이다. 영애씨 가족의 이주사를 들으면서 문득 만주 어딘가에서 돌아가셨다고 들은 나의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할아버지가 만주에 뿌리를 내리는 데 성공했더라면 나 또한 영애씨처럼 그곳에서 태어나 조선족으로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터뷰중인 영애씨 ⓒ 부희령

 
영애씨는 조선족학교인 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 철강회사와 중국에 진출한 한국 신발회사에서 일하다가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친척 방문으로 먼저 한국에 나와 있던 고모가 중매를 서서 결혼하게 되었어요. IMF가 터진 직후였죠. 저는 한국에 들어올 때나 한국에 살면서 그렇게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어요. 정말 치열하게 사신 분들이 많아요."

영애씨 말대로 결혼은 중국동포 여성이 가장 쉽고 간단하게 한국으로 이주하는 방법이었다.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 문화와 언어가 달라서 적응이 힘들었어요. 한국 사람들은 외래어를 많이 쓰잖아요. 못 알아듣는 말들이 많았어요. 대부분 중매 결혼을 하니까 한국에 와 보니 속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대요. 한국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밭에 나가서 일했다거나 시어머니가 화장실 앞까지 따라와 감시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우리 때는 천 명이 결혼해서 들어왔으면 백 명 정도는 기막힌 사연을 안고 중국으로 돌아갔어요."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는 중국동포가 한국에 들어오려면 복잡한 서류 절차와 값비싼 비용이라는 어려운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산업연수생 비자나 친척 방문 등으로 한국에 들어오려면 중개인에게 알선료 명목으로 300만 원에서 1000만 원 정도를 지불했다. 거의 다 빚이었다.

산업연수생으로 들어간 회사에서 받는 월급으로는 쉽게 갚을 수 없는 돈이었으므로 대부분은 회사에서 이탈하여 식당 등으로 일하러 갔다. 그러나 식당은 숙식을 제공하기 때문에 주거비를 아낄 수는 있으나 오랜 시간 강도 높은 노동이 필요한 자리라서 고연령 여성이 오래 일하기는 힘들었다.

그런 여성들이 돌봄 노동의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2004년에 개인 자원봉사 자격증을 따서 장애인 돌봄 봉사활동을 시작했어요. 어떻게 해서든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하려고 시작한 거였어요. 그때 알게 된 한국 언니들이 요양보호사라는 직업이 있다고 알려줬어요. 나중에 쓸모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자격증부터 땄지요."

2005년에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땄으나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 것은 2008년부터였다. 요양보호사들이 일하는 곳은 재가방문요양센터, 주야간노인보호센터 그리고 요양원이다.

영애씨는 처음에는 재가방문요양센터에서 일했다. 공공기관이 아니라 개인이나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민간기관에서는 운영자의 재량에 따라 시급, 추가수당, 4대보험과 같은 노동조건이 정해진다. 따라서 추가수당을 요구하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고, 아무리 고충을 호소해도 참으라는 말만 돌아올 뿐이었다.

"노인들 가운데 의심병이 있는 분들이 있어서 자꾸 물건이 없어졌다면서 추궁을 해요. 또 같은 아파트 단지의 누구네 요양보호사는 손톱 발톱까지 다 깎아주더라 하면서 비교도 하죠. 노인을 돌보러 왔는데 가족들이 아줌마, 아줌마 부르면서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 하는 것도 괴롭고요.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말동무만 해드리면 되는 쉬운 일처럼 보이지만 씻겨드리는 일처럼 육체적으로 힘든 일도 해요. 똑같은 말을 계속 되풀이해야 해서 스트레스도 심하고요."

민간기관 사이의 경쟁이 치열해져 을의 처지인 요양보호사들은 더 많은 수익을 확보하려는 센터장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 추가수당을 입금했다가 다시 돌려달라는 요구를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주야간보호센터도 마찬가지다. 영애씨가 민간기관에서 나와 프리랜서 간병인으로 알음알음 일을 하게 된 이유다.
  
한국인 10만원, 중국동포 9만원

프리랜서 간병인은 추가 수당이나 산재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영애씨는 보통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환자의 식사를 챙겨 주고, 몸을 씻기고, 운동을 시킨다. 그리고 용변 보는 것을 도우며 저녁 여덟 시까지 일한다. 간이침대에서 자면서 밤중에도 수시로 환자를 보살핀다. 이 때문에 손목과 허리의 통증을 달고 산다. 간병인의 직업병 같은 것이다.

열두 시간 이상 일하지만 시급은 열 시간으로 계산한다.

"한국인 요양보호사와 똑같이 일하면서도 돈을 더 적게 받지요. 한국인이 10만 원을 받으면 중국동포는 8만~9만 원을 받는 거죠. 내야 할 세금은 똑같이 내고 있고요. 돈을 적게 주면서도 네가 살던 나라에서는 그것도 큰돈 아니냐고 말하죠."

영애씨의 시급과 월수입을 물었다. 시급 1만 원, 월수입 평균 80~100만 원. 지금은 다른 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지만, 막상 영애씨 자신의 노후가 가장 큰 걱정이다. 그래도 영애씨는 요양원이나 요양보호사 자격증 없이도 일할 수 있는 요양병원에서는 일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곳은 노동강도가 엄청나게 높은 곳이다.

대소변 처리도 식사도 혼자 할 수 없는 환자 7~8명을 한 사람의 간병인이 24시간 돌보는 시스템이다. 규정대로라면 24시간 일하고 24시간 쉬어야 하지만, 숙식을 해결할 곳이 마땅치 않은 중국동포 간병인들은 휴무 없이 일하고 따로 잠자는 곳도 없이 병실의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잔다.
 

영애씨 ⓒ 부희령

 
시간당 급여도 한국인 간병인보다 적고 추가수당 같은 것은 생각도 못 하며 퇴직금이나 4대 보험도 보장받지 못한다. 이런 식으로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요양병원들은 중국동포 간병인을 선호한다. 오죽하면 노동자를 내보내고 노예를 고용하려 한다는 말이 나오겠는가.
   
"10월 초에 20대의 캄보디아 이주노동자 여성을 돌본 적이 있어요. 처음에는 간단한 검사와 시술만 받으면 된다고 해서 2~3일 병원에 머무를 작정을 하고 갔거든요. 그런데 검사를 받아보니 환자의 상태가 꽤 위중했어요. 수술하고 회복하는 기간이 일주일이 넘었지요. 혼자 한국에 일하러 나온 아가씨라 주위에 돌봐줄 친구도 친척도 하나도 없고, 말도 잘 안 통해요. 제 몸이 힘들어도 어떡해요? 나밖에 돌볼 사람이 없는데. 아가씨가 안쓰러워서 일주일 동안 병원에 갇혀 돌봐줬어요."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고 나서 요양보호사들은 아예 일터에 갇혔다. 보통은 2교대나 3교대로 일하는 주야간보호센터에서는 아예 숙식까지 하며 한 달에 한 번도 외출을 못 했다. 병원이나 요양병원의 간병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코로나19는 중국동포 요양보호사에게는 더 큰 어려움으로 다가왔다. 단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중국에서 처음 발견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중국동포인 요양보호사를 기피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실제로 일할 여건이 안 되어 중국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고 한다. 영애씨는 환자든 보호자든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반드시 자신이 중국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밝힌다고 했다. 혹시라도 나중에 문제가 될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라고.
  
'보이지 않는 심장'

영애씨는 중국동포를 포함하여 이주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통역과 서류 안내 상담 등의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영애씨 자신이 2009년 무렵에 궁금한 문제들을 상담하기 위해 이주여성긴급지원센터와 다문화가족지원센터 등을 찾아다닌 경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그런 지원센터에서 중국동포를 별로 반기지 않았다고 한다. 예산이나 인원이 부족한 상태였고, 다른 외국인과 비교했을 때 언어 소통이나 문화적 차이의 문제가 별로 없을 거라고 치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상황이 달라졌다. 중국동포들도 결혼이민자의 적응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같은 것을 이용할 수 있다. 이주여성 노동자들이 겪는 산재나 추가수당 같은 문제를 상담받을 수 있다.

"지원센터 같은 곳을 찾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그나마 형편이 나은 거예요. 절박한 사람들은 일과 시간에 쫓기며 살고 있어요.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이주여성지원센터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만난 친구들과 2019년부터는 독서 모임도 하고 있다.

"보통 다섯 명에서 열 명 정도 모여서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어요. 베트남에서 온 친구도 있고 중국동포도 있고 한국 친구도 있어요."

읽는 책들은 주로 베스트셀러 중에서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를 다룬 책들이란다. 최근에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스마트폰을 꺼내어 사진을 보여주었다. <돌봄선언 –상호의존의 정치학>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돌봄선언 - 상호의존의 정치학> ⓒ 부희령

 

"돌봄이 종종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또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는 페미니스트 경제학자인 낸시 폴브레가 말했듯이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닌 '보이지 않는 심장'을 생각해야 한다. 즉 우리는 돌봄과 연민의 힘이 시장화된 개인의 이기심보다 항상 앞서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영애씨와 만나고 나서 며칠 뒤 '돌봄선언'을 사서 읽다가 발견한 구절이다. 현재 우리 사회 돌봄의 현장에서 '보이지 않는 심장'은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 모두에게 간절하다. 2020년도 업계 분석에 의하면 서울·경기권에서 간병인으로 일하는 사람의 80%는 중국동포라고 한다. 영애씨의 말에 의하면 그들 대부분이 50~60대 여성이며, 70대도 있다고 한다.

"병원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분들도 있고요. 월세냐 전세냐에 따라 얼마나 힘들게 일해야 하는지가 달라져요. 저는 다가구주택이지만 전세로 살고 있어서 형편이 나은 거지요. 아등바등 돈만 벌면서 살고 싶지 않아요. 즐겁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현재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사람 중에 약자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곰곰이 따져본다. 여성, 노인, 이주민, 빈곤층. 요양보호사 혹은 간병인으로 일하는 중국동포 여성은 이런 조건에 모두 해당하는 이들이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약자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한국인과 임금 차별을 받으며 취약한 상태의 환자와 노인을 돌보고 있다.

영애씨는 이야기할 때 이따금 '내 부모를 돌보는 마음으로'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씁쓸한 심정이 되었다. 지금 이곳에서 내 부모를 직접 돌보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는 말인가. 돌봄의 문제를 개인의 선의나 민간 중심으로 돌아가는 시장에 맡겨서는 악순환만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돌봄의 공공성이 확보될 때 '보이지 않는 심장'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사람들 _ 이주자의 삶을 기록하다> 연재는 사회적 소통과 대화의 문화를 만들어가려는 익천문화재단 길동무가 주관하고, 12명의 이주인권활동가와 작가들이 함께한다. 필진은 다음과 같다. 고기복(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 대표), 김종필(시인), 반수연(소설가), 부희령(소설가), 우삼열(아산이주노동자센터 소장), 이경란(소설가), 이란주(아시아인권문화연대 활동가), 이소연(지구별살롱 대표), 이수경(소설가), 정은주(지구인의 정류장 활동가), 홍주민(한국디아코니아 대표), 희정(기록노동자). (이상 가나다순).
덧붙이는 글 <이주민 르포 :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사람들>은 '익천문화재단 길동무'와 <오마이뉴스> 공동 기획으로 2021년부터 진행되고 있습니다. 익천문화재단 길동무는 한국사회 민주주의의 심화 발전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위한 소박한 일들에 힘을 보태기 위해 김판수·염무웅 선생님, 송경동 시인, 민변 조영선 회장, 김소연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 운영위원장 등의 발의와 참여로 만들어졌습니다. '길동무 청년문학학교', '길동무문학·예술창작기금', '한국사회기층문화보고' 등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gildongmu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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