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11 12:19최종 업데이트 21.11.11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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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오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묘역 근처에서 참배한 뒤 사과문을 낭독하고 있다. ⓒ 유성호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10일 광주를 방문해 사과문을 낭독했다. 지난 10월 19일 전두환 옹호 발언으로 5·18을 모독해 국민적 분노를 초래한 지 22일 만이다.

제13대 총선을 11일 앞둔 1988년 4월 15일 노태우 대통령도 광주를 방문해 연설문을 낭독했다. 이 일은 전년도 11월 29일 광주 유세에서 쫓겨나다시피 했던 일을 만회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4월 15일자 <경향신문> 톱기사는 "광주사태에 관해 처음으로 공식 언급하는" 연설이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공교롭게도, 그때 노태우가 강조했던 핵심 메시지가 윤석열의 사과에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물론 노태우 연설문이 훨씬 길고, 각각의 메시지가 배치된 위치도 다소 다르다. 또 노태우는 5·18 학살 당사자로서 입장을 표명했다는 점과 윤석열은 5·18을 모독한 데 대해 입장을 표명했다는 점도 다르다. 차이점들이 있기는 하지만, 5·18과 광주에 대한 비슷한 인식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윤석열 사과문과 노태우 연설문은 유사하다.

닮은꼴 사과문

윤석열 사과문은 국민과 광주시민에 대한 사과 표명으로 시작한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사랑하는 광주시민 여러분. 제 발언으로 상처 받으신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사과드립니다."

[관련기사] [전문] 윤석열 "발언 사과, 우리 모두가 광주의 아들딸" (http://omn.kr/1vyp0)

윤석열이 지난달 21일 공식 사과를 한 상태에서 광주에 간 것처럼, 노태우도 정부 차원의 공식 사과를 한 상태에서 그곳에 갔다. 1988년 4월 1일자 <동아일보> 톱기사는 "정부는 1일 오전 광주사태를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규정하고 지금까지 해결책이 마련되지 못한 데 대해 '죄송스럽게 생각한다'는 뜻을 표명하면서 광주사태 치유를 위한 종합적인 방안을 발표했다"고 한 뒤 이렇게 보도했다.
 
정부 대변인 정한모 문공장관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확정된 광주사태 치유를 위한 발표문을 통해 '이 사태로 많은 국민이 고통과 아픔을 겪게 된 데 대해 정부는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광주사태는 나라의 정치발전이라는 큰 흐름에서 볼 때 광주 학생과 시민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고 그 성격을 규명했다.

국무회의를 통해 입장을 발표한 뒤 광주에 간 노태우는 4월 15일 연설에서 "정부가 8년 전의 사태에 유감을 표명하고 해결책이 이처럼 늦어져 고통을 드린 데 대해 죄송함을 밝혔읍니다"라며 유감과 죄송스러움을 다시 한 번 표명했다.

윤석열 사과문은 사과를 표명한 뒤 민주화를 위한 광주시민들의 희생을 평가하는 부분으로 이어진다. "저는 40여 년 전 5월의 광주 시민들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피와 눈물로 희생하신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라며 "광주의 아픈 역사가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되었고, 광주의 피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꽃피웠습니다"라고 평가했다.
 

경향신문 1988년 4월 15일자 보도 ⓒ 경향신문


노태우 연설문도 '광주 시민들의 희생'을 높이 평가한다. 이 대목이 윤석열 사과문에서는 '40여 년 전'이라는 표현과 함께 시작되는 데 비해, 노태우 연설문에서는 '8년 전'이라는 표현과 함께 시작한다.
 
8년 전 이들 젊은이와 시민들은 분명히 그들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거리에 나섰던 것도 아니었고 이기적 목적 때문에 희생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민주화를 이룩하겠다는 열정이 그들을 그 자리에 서게 하였을 것입니다.
 
광주시민들에게 경의를 표한 뒤 윤석열 연설문은 광주와 자신의 일체감을 강조하는 대목으로 이어진다. "그러기에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는 5월 광주의 아들이고 딸입니다"라고 윤석열은 말한다.

노태우 연설문 역시 광주시민들에게 경의를 표한 뒤 광주와 자신의 일체감을 강조한다. 노태우는 이렇게 연설한다.
 
저의 조상, 시조의 묘가 바로 이 광주에 있습니다. 지난날 광주에 올 때면 모든 분이 따뜻이, 조그만 격의도 없이 저를 대해주고 감싸주셨습니다. 이 좁은 나라에서 제 조상의 묘는 광주에도 있고 충청도·경상도 그리고 이북에도 있습니다. 이 좁은 땅! 그것도 반쪽이 잘린 나라에서 어디서 나면 어떻고, 또 본적이 어디라는 것이 무슨 문제입니까?
  
윤석열은 사과문 마지막 대목에서 향후 다짐을 밝힌다. "제가 대통령이 되면 슬프고 쓰라린 역사를 넘어 꿈과 희망이 넘치는 역동적인 광주와 호남을 만들겠습니다"라며 "지켜봐주십시오. 여러분께서 염원하시는 국민통합을 반드시 이뤄내고 여러분께서 쟁취하신 민주주의를 계승·발전시키겠습니다"라고 역설한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10일 오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를 방문해 참배하기 위해 들어서고 있다. ⓒ 유성호

 
호남과 광주의 '희망'을 거론함과 함께 '국민통합'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다짐은 노태우 연설문에서도 나타난다. 노태우 역시 연설 후반부에서 "저는 여러분의 동행자로, 그리고 국정의 책임자로 여러분의 희망을 실현하는 데 앞장설 것"이라고 한 뒤 국민통합의 관점을 이렇게 표명한다.
 
이제 구원(舊怨)과 아픔을 씻고 용서하여 화합을 꽃피워 나갈 때입니다. 국민을 가르는 모든 장벽을 허물어야 할 때입니다. 누구에게도 쓸모없는 지역감정은 낡은 시대의 것으로 불태워버립시다. 계층간·세대간의 갈등도 뜨거운 화합의 불길로 녹여가야 합니다.
 
국민통합은 물론 훌륭한 가치이지만, 국민통합이란 가치에 최우선적 비중을 두고 5·18을 바라보는 것에는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5·18의 발생 원인을 주로 지역 갈등에서 찾는 인식이 밑바닥에 흐르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전체의 문제'로 인해 발생했다는 쪽으로 5·18에 대한 인식을 이끌기보다는, '일부 지역의 문제'로 인해 발생했다는 쪽으로 5·18에 대한 인식을 이끌 가능성도 없지 않다. 5·18이 지역갈등보다 훨씬 높은 차원에서 발생했다는 인식을 가로막을 여지가 있는 것이다.

33년 전 노태우가 갖고 있던 이 같은 관점이 윤석열에게서도 거의 비슷하게 나타났다는 점은 유의할 만하다.

가해자 언급 없는 사과의 의미

우리는 항일 독립투사들을 떠올릴 때마다 그들이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섰다는 사실을 동시에 연상한다. 역사발전을 위한 투쟁과 그것의 청산 대상을 함께 떠올리는 것이다.

연설문에서 노태우는 5·18을 '민주화를 이룩하겠다는 열정'으로 평가하면서도 그 민주화운동이 바로 자기 자신과 전두환을 포함한 신군부 세력에 맞서는 것이었다는 점은 드러내지 않았다. 피해자만 언급하고 가해자는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또 국민통합의 관점에서 5·18을 해결하겠다고 다짐하면서도, 학살을 주도한 세력을 어떻게 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과거사 청산에 대한 의지 역시 결여됐던 것이다.
 

윤석열 후보 참배 규탄하는 오월어머니회 오월어머니회 회원들이 10일 오후 광주광역시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정치를 잘했다고 말하는 호남분들이 꽤 있다”는 ‘전두환 옹호’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킨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방문을 반대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다. ⓒ 유성호

 
윤석열은 광주시민들의 희생으로 민주주의가 꽃피었다고 평가하면서도 그 희생이 전두환·노태우 등과의 투쟁으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은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이 옹호한 전두환 등이 광주시민들을 희생시켰다는 점을 명확히 하지 않은 것이다. 광주까지 사과하러 간 목적이 전두환 옹호 발언 때문인데도, 전두환으로 인해 빚어진 5·18 희생만 언급하고 정작 전두환에 대한 언급은 입에 담지 않은 것이다.

윤석열 역시 국민통합 관점에서 5·18을 해결하겠다고 다짐하면서도 5·18 해결에 필수적인 과거사 청산 작업에 대한 인식은 드러내지 않았다. 5·18과 관련된 사과에 꼭 들어가야 할 것이 빠져 있는 것이다.

윤석열 사과문과 노태우 연설문의 핵심 메시지가 흡사한 것은 동일한 사람이 글을 써줬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부모 세대인 노태우의 생각이 자녀 세대인 윤석열에게서도 비슷하게 나타난 것은 5·18을 바라보는 한국 보수세력의 관점이 근본적 변화 없이 이어져오고 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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