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16 18:56최종 업데이트 21.10.18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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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18일 오전 11시 40분]

"아무래도 이 가게를 잘 아는 녀석들 짓이 분명해요. 어르신 내외분은 그냥 모르는 체 장사를 계속하세요."


마을 뒤편 영산강을 넘어온 겨울바람에 볼이 빨개진 담양경찰서 형사는 콧물까지 훌쩍거렸다. 대치서점 이세웅·최영숙 부부는 '오늘 또 도둑이 들어오면 어떡하지' 푸념하면서도 경찰의 말을 받아들였다.

43년간 학교 앞 자리를 지킨 문방구

대치서점은 담양군 대치읍 한재초등학교 앞에 있는 문방구 겸 구멍가게다. 79년 5월에 문을 열었으니 벌써 43년이 되었다. 80년대만 해도 새 학기가 되면 학생들이 표준전과나 동아전과, 이달학습이나 다달학습 같은 것으로 공부하고 이를 부부의 가게에서 샀으니 서점이라는 상호가 나름 어울렸다. 지금은 모든 교재를 학교에서 제공하는 탓에 문방구 겸 구멍가게로만 이 자리를 지켜내고 있다. 
 

대치서점의 옛 사진, 이 사진을 부부는 90년대로 기억한다. ⓒ 대치서점 제공

  

이달학습과 표준전과의 이미지 지금 40대 이상은 이 책들에 대한 추억을 갖고 있다. ⓒ '책과 함께'제공

 
경찰이 뒷담 근처에 CCTV를 설치하고 돌아갔을 때 부부는 "열쇠 좀 튼튼히 해놓지 허술하게 하니 뜯고 들어왔잖아", "푼돈 가져간 것 갖고 뭘 그래, 잡아보면 또 애기들 짓이지" 하며 티격태격했다.

사실, 초등학교 앞에서 오랫동안 가게를 하다 보니 꼬마도둑들과 부대낀 사연은 적지 않다. 학생들이 많았던 시절 등교 시간에는 몇백 명이 몰려드니 구슬 몇 알, 껌 한 통 집어가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장사를 시작하고 서너 해가 되었을까? 늦은 저녁을 먹고 부부는 일일연속극 <수선화>에 넋이 빠져 있었다. 밖에서 유리창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몇 차례 들려 최영숙이 남편에게 나가보라고 재촉했다. 살림방과 가게 사이에는 미닫이문만 있을 뿐이어서 스스륵 열고 나갔더니 돈통이 안 보였다.

좀도둑들이 더러 푼돈을 집어갔어도 이렇게 통째로 들고 간 경우는 처음이었다. 이세웅이 튕겨지듯 밖으로 나가 보니 달빛이 구름에 숨었는지 어둠은 장막 같았다. 개구리 울음 속에서도 뒷골목 뽕나무밭으로 흩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부산했다. 이세웅은 한 발 한 발 뽕나무밭을 둘러싼 탱자나무 울타리로 다가갔다. 따라 나온 최영숙이 "위험허니 날 밝으면 찾아보자"라고 그의 팔을 붙잡았다.

다음 날 동이 트자마자 뽕나무밭으로 달려갔을 때는 돈통만 덩그러니 엎어져 있었다. 경찰이 나와 동네에 이리저리 탐문을 해 보니 떡 가게도 지난 밤에 털린 상태였다. 마을에 난리가 났지만 잡고 보니 꼬마 도둑들! 중학교를 안 간 우두머리 녀석이 초등학생 서너 명을 데리고 벌인 일이었다.

녀석들은 농협창고 옆에 쌓아놓은 볏짚단 사이로 아지트까지 만들어 훔친 물건을 쟁여놓고 있었다. 어린 학생들을 어찌하겠는가. 부부는 떡 가게와 함께 아이들을 타이르고 없던 일로 묻어 버렸다.

문방구에 바친 부부의 인생

1944년생 이세웅과 1946년생 최영숙은 72년 3월 12일에 결혼해 벌써 50년 동안 한솥밥을 먹었다. 광주 출신의 이세웅은 군대를 다녀와 '농촌지도직'에 합격해 담양군 대치리로 발령을 받았다. 한의원이었던 문약방에서 자취하던 그는 71년 늦가을, 십 리나 떨어진 행성리의 최영숙을 소개받았다.

이세웅이 그녀를 만나러 집으로 찾아간 날, 마침 다림질을 하고 있던 최영숙은 이세웅에게 옅은 눈인사를 보냈다. 이세웅은 침을 삼키면서 뒷산 대나무숲에서 내려온 소슬바람만 바라보았다. 최영숙은 그 첫 만남을 "키도 크고 깎은 밤처럼 훤해 마음이 가더라구요"라고 기억한다. 그 후로 일사천리, 편지가 몇 번 오고 가고 양가집에서는 서둘러 날을 잡았다.

공무원인 '농촌지도직'의 월급은 보잘 것없어 이세웅은 개인회사로 옮겼다. 최영숙의 말을 빌면 "농촌지도직보다는 나았지만 그 월급도 쪼깐했다"고 한다. 결혼하자마자 들어선 첫째, 그리고 이어 가진 둘째, 세째 세 아들을 보란 듯이 키워내려면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마침 한재초등학교 선생님이던 친척이 "학교 앞에 문구점이 나왔으니 가게를 해 보라"고 권했다. 대치서점의 시작이었다. 

79년에 문을 연 대치서점은 이세웅이 2000년 정년퇴직하기 전까지는 온전히 최영숙의 몫이었다. 7남매의 이세웅, 10남매의 최영숙은 양가집에서 받은 게 덕담뿐이어서 송곳 하나 꽂을 땅조차 없었다. 남편은 직장에서, 아내는 문방구에서 부지런히 벌어야만 했다.

대치리는 대전면 면소재지답게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만명이 넘는 주민들이 북적거렸다. 한재초등학교 아이들이 천오백 명을 넘었고 한재 중학교 학생 수도 700~800명에 이르렀다. 마을에 다섯 개나 되는 문방구가 있었고 대치서점만 해도 하루에 수백 명이나 되는 꼬마손님들이 드나들었다.

등교시간에는 눈도 손도 바빴다. 라면땅에 왕사탕같은 군것질거리, 연필에서 지우개, 찰흙에 수수깡을 사며 아이들은 10원, 20원을 내밀었다. 최영숙은 일단 그놈을 받아서 비료 푸대에 넣기 바빴다.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구슬하고 딱지 집어 내빼는 놈들이 부지기수, 쫒아갈 수 없으니 그러려니 했다.

최영숙은 늦은 오후가 되면 동생에게 가게를 맡기고 광주로 매일 물건을 떼러 다녔다. 어린 손님들이어도 눈이 까다로워 새 물건이 없으면 다른 가게로 발길을 돌렸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마을에 하나로마트나 농협연쇄점이 없어 대치서점은 만물상 노릇까지 겸했다. 비누와 치약을 사다 달라는 이웃도 있었고 백과사전을 사다 달라는 맞춤형 주문도 있었다.

버스를 타고 광주 충장로에 내리면 그때부터 도매상을 찾는 최영숙의 발걸음이 바쁘다. 문구는 상고당과 영화사를 들르고, 완구는 크로바에서, 과자는 일이삼에서 몇 박스씩 샀다. 그 물건을 도매상 직원들이 버스정류장까지 옮겨주면 삼양사로 직장을 옮긴 이세웅이 퇴근하자마자 달려와 버스에 실었다.

이세웅의 애로도 컸다. 아내 혼자 물건을 나르게 할 수는 없었기에 퇴근 후면 소주 한 잔 하자, 고스톱 한 판 하자는 동료들 손길을 뿌리쳐야만 했다. 퇴근 시간이니 버스는 만원이고 "왜 하필이면 지금 시간에 물건을 싣는냐"는 핀잔이 쏟아졌다.

그 시절 버스는 돌연 서 버리는 일도 잦아 담양으로 들어가는 시외버스를 갈아타려면 한 시간을 기다린 적도 많았다. 부부는 이제나 저제나 버스가 올까 어둔 신작로를 보며 배를 곯고 기다릴 3형제 생각에 마음을 동동 굴렀다.

그렇게 집에 도착해 아이들 밥 먹이고 떼온 물건들을 정리하면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다. 하루 내내 굽이쳐 흘러갔던 영산강도 다음 날 여행길을 준비하며 잠자리에 들 시간까지 부부는 대치서점의 낮은 등불을 밝혔던 것이다. 

5인조 도둑 일당을 붙잡고 보니
 

부부의 인생이 담긴 문방구 안에서 43년 이 한자리를 지켜왔다. ⓒ 민병래

 
"요놈들이 맞네요."

담양경찰서 형사들은 화면에 드러난 중학생 아이들 하나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푼돈을 털고 담이 커졌는지 녀석들은 CCTV가 설치된지도 모르고 일주일 새 또 담을 넘었다. 자물쇠를 튼튼히 한 덕분에 초보 도둑들은 빈손으로 돌아가면서 CCTV에는 얼굴을, 밤새 쌓인 눈에는 발자국을 남겼던 것이다.

부부는 형사들에게 가져간 돈도 얼마 안 되고 자라나는 애기들이니 잘 타일러 끝내자고 부탁했다. 얼굴을 보니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치서점을 드나들고 부부에게 공손히 인사했던 녀석들이었다. 처음엔 괘씸했지만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해 부부는 마음을 추스렸다. 덕분에 학생들은 '절도범'이라는 낙인을 면함은 물론 입건조차 안 되었다.

아이들의 부모는 대치서점을 찾아와 머리를 조아렸다. 대치리 좁은 마을에서 오며 가며 다 낯이 익은 얼굴들이다. 둘러앉아 얘기를 나눠보니, 할머니 밑에 혼자 있는 손자, 이주여성이 키우는 사내녀석, 부모가 별거하는 아이, 자칫 엇나갈 수 있는 환경들이어서 최영숙은 찾아온 부모들과 손을 잡고 같이 울었다. 그게 3년 전인가, 4년 전인가의 일이다.

철부지 아이들과 사연은 끝도 없지만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가 더 있으니 80년대 어느 일요일. 지나가던 사람이 문을 열고 "아저씨 집 헛간에서 불이 난 것 같아요. 연기가 나와요" 해서 급히 달려가 보니 초등학교 5, 6학년쯤 된 녀석들이 빙 둘러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 연기들이 한데 모여 나오니 마치 불이 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긍게 그때 팔십 년댄디 나도 참 젊은 나이 아닙니까 사십댕게. 그 초등학생 놈들이 담밸 피우니 충격이 안 오겄습니까."

놀란 이세웅은 아이들에게 "깨(옷)를 할딱 벴기"는 벌을 주며 지금 지서로 같이 갈래? 학교 선생님에게 알릴까? 아니면 반성문을 쓸래?를 제시했다. 아이들은 반성문을 택했다.

이세웅은 "개똥하고 소똥이 있는 길이 있고 꽃이 피는 길이 있다. 너그들은 꽃피는 길로 가야 할 거 아니냐"며 마음을 다 해 타일렀다. 그 진심이 통했는지 아이들은 일주일 동안 꾹꾹 눌러쓴 반성문을 내밀었다. 이때의 일은 십여 년이 흘러 특별한 만남으로 이어졌다.

"충장로에 삼복서점 있잖아요. 퇴근허고 그리 지나가는데 한 청년이 아저씨하고 딱 불러. 한재초등학교 앞에서 문구점 하는 아저씨 아니냐고. 그렇다고 허니 저 태암마을 출신인데 모르시겄습니까. 그래요, 허믄서 제가 꼭 차를 한잔 대접허고 싶다고 그래. 그래서 근처 호수다방에 들어갔는데 제가 그때 담배를 피웠다가 반성문 썼다고 그날 이후 담배도 안 피고 지금 법원 서기로 근무헌다고 그때 바르게 잡아줘서 아저씨가 고마웠다고."

그날 밤 부부는 대치서점을 한 게 잘했다고 그동안 애썼다고 격려하며 먼동이 터올 때까지 서로의 품을 파고 들었다.

느티나무가 된 대치서점
 

대치서점 앞에서 부부 이제는 대치서점이라는 상호도 보이지 않는다. ⓒ 민병래

 
노부부는 이제 팔순을 바라보고 있다. 가게를 드나들던 애기들을 손님이라기보다는 보살피고 키워야 할 자식이고 손주라는 마음으로 대한 세월이었다. 덕분에 3형제도 잘 컸다. 자식들은 부부가 한 자리에서 그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게 해 준 힘이었다.

막내아들은 "어릴 적 광주의 도매상에 간 엄마, 아빠를 형들과 손잡고 정류장에서 기다렸어요. 엄마, 아빠가 돌아오면 우리는 좁은 가게방에서 개다리소반을 펼쳐놓고 둘러앉아 늦은 저녁을 먹었는데 따뜻하고 행복한 밥상이었어요"라고 기억한다.

대치서점은 지금 쇠락했다. 학생들은 이제 한재초에 겨우 120명, 한재중은 백 명 밑이다. 그 벅적이던 등교시간은 오래된 사진첩의 풍경일 뿐. 대치서점 맞은 편에는 하나로마트가 있으니 구멍가게로서 숨도 쉬기 어려운 상황이다. 게다가 승용차로 10분만 가면 북광주에 다다르니 아이들은 완구나 문구도 대형마트에 가서 산다. 문방구로서도 이래저래 시난고난한 세월이다. 

그래도 부부는 대치서점을 지킨다. 명절 때마다 고향을 다니러 오는 이들이 과일상자를 내밀며 "아직 자리를 지키고 계시네요, 이 문방구에서 추억이 많았어요"라고 인사를 한다. 그 기쁨은 적잖이 크다. 작년 겨울에는 꼬맹이 하나가 뜬금없이 편지와 상장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재초등학교 2학년 임치천이에요. 저희들에게 학용품이나 학생들이 좋아할 것 같은 물건을 살 수 있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문구점은 많지만 우리 한재초등학교에 유일한 문구점이죠. 문구점 아저씨가 계셔서 정말 행복해요. 아저씨도 행복하시죠? 우리 한재 초등학교 학생들을 위해 오래 있어 주세요. 힘내시고 우리도 힘차게 생활할게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한재초 2학년 임지천이 이세웅어르신에게 보낸 상장과 편지 이세웅, 최영숙어르신에게 이 상장과 편지는 큰 기쁨이 되었다. ⓒ 민병래

 
이런 편지를 받았으니 어찌 대치서점을 지키지 않을 수가 있으랴. 대치서점 앞에는 칠백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있다. 한재 초등학교가 담을 쳐 안으로 품었지만. 오래 세월 영산강과 느릿느릿 이야기를 나누며 이 마을 전설을 길러왔던 느티나무다. 그 앞에서 43년을 지켜온 대치서점도 어느덧 작은 느티나무가 되었다.

등굣길 아침 햇살에 떠다니던 아이들의 재잘거림, 왕사탕과 브라보콘 껍질을 벗기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구슬 한 개 훔쳐 달아나던 꼬마도둑들의 콩콩콩 심장소리, 느티나무는 43년 동안 그 소리를 모아 영산강의 신비로운 윤슬에 실었고 강물은 굽이치며 아득히 먼 길을 떠나갔다.

<못 다한 이야기>

① 이 글을 쓰는 데 <구멍가게 이야기>(책과 함께 발행)의 작가 박혜진님에게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대치서점 두 분 선생님을 '사수만보' 주인공으로 추천해주심과 함께 인터뷰한 녹취록을 기꺼이 제공해주셨습니다. '책과 함께' 이정우 편집장님은 '표준전과'와 '이달학습' 이미지 자료를 제공해줬습니다.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② 이세웅, 최영숙 선생님의 세 아드님들은 두 분의 큰 자랑입니다. 첫째 아드님은 신협에 둘째 아드님은 수학교사로 막내 아드님은 금융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최영숙선생님은 101년이 된 한재 초등학교의 37회 졸업생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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