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힘든 영화가 있다. 영화의 서사부터 담긴 메시지가 자연스레 와 닿지 않는 영화다. 아주 실험적이라면 실험영화라고 부르겠으나, 판타지적 요소가 강하게 가미됐을 뿐 기본적으로 서사구조를 따르고 있어 극영화의 틀에서 벗어나진 않는다. 다만 상징성이 강한 예술영화라고 부를 따름이다.

자연스럽게 이해되지 않고 보고난 뒤 오래 생각해야 의도가 잡힐까 말까 하니 인기가 있을 턱이 없다. 때문에 비슷한 영화는 대부분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영화계를 하나의 생태계라 한다면 희귀종도 이런 희귀종이 없다. 곧 개봉을 앞둔 폴란드 영화 <첫눈이 사라졌다> 이야기다.

시사회 직후 평론가들의 해석을 원하는 평이 빗발쳤다. 기자단 시사회에서도 영화를 제대로 이해했다는 이들이 얼마 되지 않았다. 영화가 도대체 무얼 말하고 있는지 깊이 있게 따진 리뷰가 전멸하다시피 했다. 때깔이라도 별로였다면 영화가 졸작이라 말하겠는데 촬영과 연기, 음향, 미술 등이 상당히 좋다. 심지어 감독은 마우고시카 슈모프스카와 마셀 엔그레르트의 공동 연출작이다.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수차례 수상하며 차세대 거장이 될 재목으로 꼽힌 그 슈모프스카다.
 
첫눈이 사라졌다 포스터

▲ 첫눈이 사라졌다 포스터 ⓒ (주)다자인소프트

 
읽기 힘든 영화, 어떤 내용일까

이쯤 되면 <첫눈이 사라졌다>가 무슨 내용인지 궁금할 법도 하다. 이야기는 딱 무어라 말하기 어렵지만 설정이 없지는 않다. 배경은 폴란드 어느 도시다. 도시엔 부촌과 빈촌이 격리돼 있다. 부촌은 동일한 형태의 전원주택 수십 동이 넉넉한 공간을 두고 잇따라 있다. 관리자들이 길을 쾌적하게 관리하고 경비도 선다. 반면 빈촌은 낡은 복도식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이 대다수다. 관리되지 않은 도로와 낡아빠진 시설이 눈에 띈다.

주인공은 안마사 제니아(알렉 엇가프 분)다. 우크라이나 프리피아트 출신의 남성 이민자다. 프리피아트는 유럽사람들에게 무척 유명한 도시다. 1986년 원자력발전소 폭발사고가 발생한 체르노빌과 불과 3km 남짓 떨어져 있던 도시다. 인구는 약 5만 명 정도였고, 사고 이후 폐허가 됐다.

제니아는 유능한 안마사다. 단지 유능하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기묘한 능력이 있다는 게 영화 초반부터 보여 진다. 그는 자신의 입국을 심사하는 심사관에게 간단한 최면기술을 써 정신을 잃게 만든다. 나중에도 믿기 어려운 능력으로 안마를 받는 사람들을 깊은 잠에 빠뜨렸다 깨운다. 급기야 그가 손을 대지 않고 물건을 움직이는 염력까지 쓴다는 사실이 보여지기도 한다. 영화는 그 장면을 환상적으로 연출하지만 잇따르는 불가해한 사건들을 보면 사실이라고 믿지 않기가 어려울 정도다.

폴란드에 입국한 제니아는 부촌의 여러 집을 돌아다니며 안마를 한다. 똑같은 모양의 집에 사는 이들이지만 부촌 사람들은 각양각색이다. 누구는 딱딱한 군인이고 누구는 강박적으로 아이들을 다루는 여자며 누구는 말기암 시한부고 또 누구는 불독 여러마리와 함께 사는 독신여성이다. 서로 다른 성격에 취향을 지닌 이들은 제니아를 집에 들여 안마를 받으며 제가 사는 모습을 조금씩 제니아에게 내보이게 된다.
 
첫눈이 사라졌다 스틸컷

▲ 첫눈이 사라졌다 스틸컷 ⓒ (주)다자인소프트

 
위안 주는 안마사, 그의 손에 닿는 자들

제니아는 안마를 받는 이들에게 잠시 잠깐의 위안을 준다. 정신없이 사는 강박증 환자에게 휴식을, 외로움에 불타는 이에게 따스한 손길을, 시한부 환자에게 희망을 주는 식이다. 문제를 덮어 어루만지며 갈등이 드러나지 않게끔 완화한다. 그가 주는 안식을 영화는 깊은 숲속에 환상적으로 서 있는 모습으로 연출하기도 한다.

UN군으로 참전한 사내와 우크라이나 불법이민자에 대한 시선, 좁아질 기색이 없는 빈부격차, 곳곳에 스며든 마약문제, 무너진 도덕과 불륜, 지나친 사교육과 환경오염까지 영화가 훑고 지나가는 의미심장한 갈등요인이 여럿이다. 제니아의 안마가 지나치는 동안 어느 갈등 하나 터지지 않지만, 제니아가 사라진 뒤엔 다를 것이란 인상이 영화에 가득하다.

영화는 애써 영화 속 상징과 관심사를 묶어내지 않는다. 대신 제니아가 사라지고 충격에 휩싸인 이들 모습을 담담이 그려낼 뿐이다. 제니아가 사라진 뒤 마을은 더는 전과 같아 보이지 않는다. 남은 것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과 긴장이다. 환상과 기적이 사라진 세상에서 우리가 껴안고 있는 것들 말이다.
 
첫눈이 사라졌다 스틸컷

▲ 첫눈이 사라졌다 스틸컷 ⓒ (주)다자인소프트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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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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