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9.28 13:47최종 업데이트 21.09.28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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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를 맞아 19일 오전 서울역 승강장에서 한복을 입은 어린이들이 부모와 함께 열차 탑승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 2021.9.19 ⓒ 연합뉴스

 
명절 증후군은 더 이상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해마다 적지 않은 가정이 명절 후유증을 겪는다. 추석이나 설 직후 가정불화로 인한 이혼이 크게 증가한다는 보도가 해마다 등장하고 실제 통계자료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2019년까지 10년 동안의 통계청 자료를 보면 추석 다음 달인 10월의 이혼 건수가 전달 대비 크게 상승한다. 2019년 9월의 이혼 건수가 9010건인데 반해 10월에는 9859건을 기록해 9.4% 늘었다. 2018년의 경우 7826건에서 1만 548건으로 무려 34.9%나 증가했다.


통계가 이혼사유까지 설명하는 건 물론 아니다. 하지만 설 명절 직후에도 이혼 건수가 증가하는 것으로 보아 명절 갈등이 이혼 사유의 주원인일 가능성이 높다. 2010년부터 2019년 사이 평균 월별 이혼율을 보면 1월, 3월, 5월, 10월 이혼이 가장 많다. 공교롭게 이 네 달은 각각 신정, 설, 어버이날, 추석과 관계된다.

명절 직후엔 '이혼의 날'

명절이 실제 가정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한다면 분명 일상에 없던 스트레스 때문일 테다. 일반화된 핵가족 현상의 이면일까. 대가족 구성원이라고 스트레스가 없을 수 없지만 누군가와 늘 일상을 공유하는 것과 가끔 만나는 것은 다르다. 다른 생활 리듬과 익숙지 않은 사고(思考)끼리 만나면 갈등이 유발될 수 있다.

명절 후 갈등이 반드시 친지들과의 만남 때문만은 아니라는 설명도 설득력 있다. 명절 자체가 일상이 아니기 때문에 함께 사는 가족 사이에서도 공유된 평소 습관 뒤에 감춰진 근본적 가치관의 차이가 돌출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때로는 그 차이가 치명적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명절 증후군이 반드시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방식은 달라도 축제와 의식(儀式)은 인류의 보편 문화다. 지난해 1월 영국의 일간지 <인디펜던트>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영국의 경우 매년 1월에 유독 이혼 건수가 많다고 한다. 서구 문화에서 가장 큰 명절이 크리스마스이기 때문이다.
 

이혼 서류를 앞에 놓고 앉아 있는 부부 ⓒ LightFieldStudios


크리스마스부터 연초까지 이어지는 연휴가 끝나고 새 업무가 시작되면 영국의 이혼 전문 변호사 사무실에는 상담 전화가 폭주한다고 한다. 그래서 영국 변호사 업계에서는 매년 1월 첫 월요일을 이혼의 날(Divorce Day)로 부른다고 신문은 전한다.

가장 즐거워야 할 시간이 이별의 불씨로 작용하는 아이러니가 지구촌 곳곳에서 현대 사회의 풍속도로 자리 잡고 있다. 가부장 중심의 전통 사회에서 억눌려 있던 (부부 포함) 동거자들 간 자아의 충돌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가정 구성이라는 대전제는 전통사회와 달라진 게 없지만 구성원들의 지위와 역할에 관한 인식은 현대에 들어 급격히 변하고 있다. 변화의 폭과 속도가 클수록 이 갈등은 더 심화된다. 이 부조화가 해결되지 않으면 명절 증후군이 줄어들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일상의 균열'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팬데믹 시대, 온라인 이혼 합의서 매출 증가

특이한 사실은 지난해 초 시작된 팬데믹 이후 한국인들의 이혼율이 예전보다 크게 줄었다는 사실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4월, 7월, 9월을 제외하고 매달 이혼 건수는 이전 10년의 평균보다 줄었다. 2010년부터 2019년 사이 한해 평균 이혼 건수는 11만 1800건인데 반해 2020년 이혼 건수는 10만 6500건으로 기록됐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급격한 변화가 불러온 위기의식, 그리고 방역에 따른 이동 제한 조치로 명절 모임이 크게 준 영향이 주로 언급된다. 명절 행사가 축소되면 가정 갈등이 줄어든다는 '웃픈' 가설이 또 한 번 힘을 받게 됐다.

그런데 팬데믹 시대의 이러한 풍속도는 유독 한국에서 돋보인다는 점도 특이하다. 아시아, 미국, 유럽 등 지구촌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오히려 반대의 현상이 관찰된다. 지난해부터 팬데믹 이후 이혼이 급증한다는 보도가 외신에서는 자주 보도되고 있다.

유례없는 집단 격리와 폐쇄에서 비롯되는 정신적 패닉, 실직에 따른 경제 파탄 등으로 인한 가정불화가 주원인으로 지목된다. 신경이 극도로 예민한 가족들이 각자의 사회적 공간으로 가지 못하고 하루 종일 사적 공간에 묶여 있다 보면 역시 일상이 깨진다. 명절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일상의 균열'인 셈이다.
 

지난해 12월 영국 <비비시>(BBC)는 일상의 균열(disrupted routines)이 가정을 위기로 몰고 있다면서 온라인 이혼 합의서 판매 매출이 34% 증가한 한 미국 법률회사를 소개했다 ⓒ BBC 뉴스 캡처

 
지난해 12월 영국 <비비시>(BBC)는 일상의 균열(disrupted routines)이 가정을 위기로 몰고 있다면서 온라인 이혼 합의서 판매 매출이 34% 증가한 한 미국 법률회사를 소개한 바 있다. 그러면서 아직 이혼 증가율이 정점을 찍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그 예상은 불행히도 확인되고 있다.

지난 9일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팬데믹 이후 가정불화 사례가 증가한다면서 9월 현재 미국의 가정법원은 어느 때보다 바빠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 법원이 이혼 관련 업무로 바빠진 이유가 현재의 이혼 희망자가 늘어난 때문인지 코로나로 폐쇄됐던 법원들이 최근 재개되면서인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같은 보도에 따르면 캘리포니아, 뉴욕 등 대부분의 주에서 변호사 사무실 또한 이혼 관련 상담이 꾸준히 늘고 있다. 법원 업무의 누적 때문만은 아니라는 해석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다.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이 갈등의 소재는 되지만 이혼의 근본적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고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한다.

앞선 <비비시>는 이혼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한 변호사의 말을 인용해 코로나 이후 경제적 어려움이 오히려 실제 이혼으로 가는 길을 유보하는 경우가 많다고 보도한다. 상황이 호전되면 이혼 건수가 추가로 늘어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처럼 팬데믹이 보건, 경제 영역을 넘어 인간의 근본적인 가치판단 부분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 심리전문가는 이 방송 인터뷰에서 팬데믹이 삶에서 무엇을, 누구를 원하는지에 대한 실존적 질문으로 향하게 한다고 지적한다.

도시의 삶을 버리고 전원으로 향하는 선택과 같은 문제뿐 아니라 부부 포함 동거 생활에서 자신의 존재와 위치, 상호 역할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재고를 하게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소중한 삶을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며 보내야 하는지 인간은 위기의 터널을 지나면서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한 셈이다.

새로운 갈등... 백신이냐, 이혼이냐
 

프랑스 <르몽드>는 18일 보도에서 코로나 백신 등장 이후 발생한 다양한 가정 내 갈등을 소개했다. ⓒ 르몽드 캡처

 
삶에 대한 철학적 질문은 백신이 등장하면서도 이어지고 있다. 프랑스의 <르몽드>는 18일 보도에서 코로나 백신 등장 이후 발생한 다양한 가정 내 갈등을 소개하고 있다. 마스크, 격리, 육아 등 여러 영역의 코로나 갈등을 지나 최근의 백신 접종을 둘러싼 가족 간 이견은 새로운 가정 분열의 원인이 되고 있다.

마크롱 정부는 7월 이후 공공 영역 출입을 위해 백신 여권 제시를 의무화하고 있다. 과반 이상의 프랑스 국민은 정부의 백신 여권 정책에 동의하고 있지만 저항도 만만치 않다. 최근까지도 주말마다 반 백신 시위가 파리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다.

취재에 응한 한 남성은 이전의 모든 방역 정책에 가족이 의견을 같이 했다면서 하지만 백신 여권에 이르러 자신과 아내는 이견을 가지게 됐다고 말한다. 자유의 이름으로 백신 여권 의무화에 반대한다는 이 남성은 '권위주의자 마크롱 대통령이 백신으로 좋은 구실을 찾았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에 관해 자신은 가족 내 소수자라는 그는 '선택권이 없는 이 사회가 국민들을 양떼들과 음모론자 중 하나로 내몰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는 이 문제와 관련해 더 이상 가족 사이의 대화는 없다면서 최종 해결책은 침묵이라고 체념한 듯 말한다.
 

실존적 문제를 식탁에서, 카페에서, 공원에서 끝없는 토론의 주제로 삼았던 프랑스인들. 이제 그들 중 상당수가 코로나 백신을 앞에 두고 침묵을 선택하고 있다. ⓒ 르 파리지엥 캡처

 
실존적 문제를 식탁에서, 카페에서, 공원에서 끝없는 토론의 주제로 삼았던 프랑스인들. 이제 그들 중 상당수가 코로나 백신을 앞에 두고 침묵을 선택하고 있다. 일간지 <르 파리지엥>이 표현하듯 "백신이냐 이혼이냐"의 갈림길까지 간 그들이 이별을 피하기 위해 침묵을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침묵을 선택한 그들에게 상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간호사인 한 여성은 자신의 직업에도 불구하고 백신을 거부하는 가족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했다고 낙담한다. "나를 아프게 하는 건 이 모든 것 뒤에 깊은 성찰이 없다는 거예요. 일종의 무조건적 반응이죠." 그녀는 토론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체념한다. 그렇게 친지들 간의 방문은 줄어들고 있다고 <르몽드>는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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