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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간선제로는 재선이 어렵게 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친위쿠데타까지 불사하며 직선제를 추진하였다.
▲ 국회에서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이승만(1952년 7월 1일) 기존의 간선제로는 재선이 어렵게 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친위쿠데타까지 불사하며 직선제를 추진하였다.
ⓒ 국회기록보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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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가 역전되었다.

1950년 10월 25일 중국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면서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빼앗기고 정부는 부산으로 이전했다. 국회도 부산으로 옮겼다. 남포동 부산극장을 임시회의장으로 삼았다.

전쟁 중에 이승만(정부)의 행태는 국난을 극복하고 국민을 보호하여 자주독립국가를 세우려는 자세가 아니었다. 1951년 1월 국민방위군사건이 벌어졌다. 정부는 제2국민병에게 해당하는 만 17~40세의 장정들을 국민방위군에 편입시켰다. 국군의 후퇴가 시작되어 방위군을 후방으로 집단 이송하게 되자, 방위군 간부들은 이 기회를 틈타 막대한 돈과 물자를 빼돌려 사복을 채웠다. 그 결과 보급부족으로 천 수백 명의 사망자와 환자가 발생했다. 이들이 부정처분한 돈과 물자는 당시 화폐로 무려 24억 원, 양곡 5만 2천 섬에 달했다.

신익희는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나라의 기강을 해치는 이들을 엄벌할 것을 촉구했다. 국회가 진상조사에 나서는 한편, 4월 30일 방위군 해산을 결의함에 따라 5월 12일 방위군은 해산되고, 사건을 일으킨 김윤환 등 4명은 처형되었다. 
 
골령골 살해현장. "더 올라가면 이승만 대통령이 아니고 누가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겠어." 1950년 6.25 당시 골령골 총살집행책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변홍명(가명)의 주요 증언, 충남도경찰청 소속 사찰 주임
 골령골 살해현장. "더 올라가면 이승만 대통령이 아니고 누가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겠어." 1950년 6.25 당시 골령골 총살집행책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변홍명(가명)의 주요 증언, 충남도경찰청 소속 사찰 주임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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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조사단이 구성되어 국민방위군사건의 조사에 나서자 이승만은 국방장관 신성모를 해임하고 이기붕을 임명하면서 수습에 나섰으나 이승만과 정부의 행태, 군부의 부패 문제는 쉽게 시정되지 않았다.

6ㆍ25전쟁을 전후하여 거창사건을 비롯하여 전국(남한) 도처에서 100만 명으로 추산되는 민간인이 군경과 우익단체에 의해 학살되었다. 민간인 학살은 국군과 경찰, 특무대, 서북청년단 등 우익세력에 의해 '빨갱이' '통비분자'로 몰려 자행되고, 미군에 의해 집단학살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특히 1950년 6~8월에 자행된 국민보도연맹(보도연맹)의 학살사건은 수법이나 희생자 수에 있어서 천인공노할 만행이었다. 보도연맹은 1949년 반공검사 오제도의 제안으로 이른바 좌익운동 전향자들이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전과를 묻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조직하였다.

그런데 막상 전쟁이 발발하자 군ㆍ경ㆍ서북청년단 등이 이들을 무차별 검거하여 집단학살한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예비검속을 당하거나 자발적으로 경찰서에 출두할 때까지 생업에 충실한 민간인이 대부분이었다. 

군ㆍ경과 우익 단체들은 이들이 북한군에 '동조'할 지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예비검속하거나 강제로 검속하여 집단학살극을 자행하였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남한 전역에서 이들에 대한 본격적인 학살이 감행되었다. 육지에서는 산속이나 계곡, 강변 등 인적이 드문 곳에서, 해안지방에서는 배에 실어 돌을 매달아 수장한 경우도 많았다.
 
38선을 넘어 진격하라는 이승만 대통령 작전명령서
 38선을 넘어 진격하라는 이승만 대통령 작전명령서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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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한국전쟁 기간에 남한 국민들은 북한인민군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도 많았으나 군ㆍ경과 우익단체ㆍ미군에 의해 희생된 경우도 이에 못지않았다. 일차적인 책임은 현지 관련자들이지만, 정치적 책임은 오롯이 이승만에게 있었다.

6ㆍ25 한국전쟁 발발 2년 차가 된 1952년이 되었다. 이승만의 임기가 끝나고 제2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되는 해이기도 했다. 1951년 7월 개성에서 처음으로 휴전회담이 개최된 데 이어 10월 25일 판문점에서 정전회담이 열렸다. 전쟁은 소강상태에서 휴전(정전)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이승만은 대통령 재선을 위해 여러 가지 구상을 거듭하였다. 원래 국회 의석의 분포로 봐서는 도저히 재선이 불가능한 구도였다. 그래서 짜낸 것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었다. 상식적으로 대통령선거가 직선제라도 전시하에서는 간선제로 바꾸는 것이 상식일 터인데 이승만은 거꾸로였다. 국가의 안위나 일반 상식보다 자신의 권력욕을 우선시한 것이다.

이승만은 제2대 대통령선거에 대비하면서 1951년 11월 23일 자유당을 발족했다. 원내의 공화민정회, 원외의 국민회, 대한청년단, 대한노총, 대한부인회, 농민조합연맹 등의 대표들을 모아 신당발기준비협의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당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원내파와 원외파로 분열되었다. 원내파는 이갑성을 중심으로, 원외파는 이범석을 중심으로 각각 자유당을 발족, 하나의 이름으로 두 개의 정당이 만들어지는 기형적인 모습으로 자유당이 창당되었다. 

이승만이 1951년 11월에 제안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은 공고기간을 거쳐 1952년 1월 28일 국회의 표결 결과 재적 163명 중 가 19, 부 143, 기권 1로 부결되었다.  

직선제 개헌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집권층은 자유당과 방계단체인 국민회, 한청, 족청 등을 동원하여 1952년 1월 말부터 백골단ㆍ땃벌떼ㆍ민중자결단 등의 명의로 국회의원 소환 벽보와 각종 삐리를 살포하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또 전국애국단체 명의로 관제데모, 가두시위, 국회 앞 성토대회, '민의 외면한' 국회의원 소환요구 연판장 등 광적인 이승만 지지 운동을 전개하였다.  

관제데모와 경찰의 방관ㆍ방조 등으로 국회와 사회의 반이승만 정서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에 따라 민국당 등 야당은 국회에 개헌정족수인 3분의 2보다 1표가 더 많은 123명이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했다. 국회의 분위기가 내각책임제 개헌으로 기울게 되자 이승만은 다시 강압적인 수법을 동원했다.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직선제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5월 25일 정국혼란을 이유로 부산을 포함한 경남과 전남북 일부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영남지구계엄사령관에 측근 원용덕을 임명하는 등 군사력을 개헌공작에 동원했다. 적과 대치 중인 전방 전투부대까지 후방으로 빼내어 계엄령을 선포한 것이다. 

계엄사령부는 언론검열을 실시하는 한편 내각책임제 개헌추진을 주도한 의원들의 체포에 나섰다. 5월 26일에는 국회의원 40명이 타고 국회에 등청하는 통근버스를 크레인으로 끌어 헌병대로 연행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신익희ㆍ이시영ㆍ김창숙ㆍ장면 등 야당과 재야 원로들은 부산에서 호헌구국선언대회를 열어 이승만 독재를 규탄하고 나섰다. 그러나, 6ㆍ25기념식장에서 김시현ㆍ유시태 등의 이승만 암살미수사건이 일어나면서 야권은 완전히 전의를 잃게 되었다.

장택상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국회해산을 협박하면서 발췌개헌을 추진했다. 발췌개헌안이란, 정부가 제출한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에다 야당이 제안한 개헌안 중 국무총리의 추천에 의한 국무위원의 임명, 국무위원에 대한 국회의 불신임결의권 등을 덧붙힌, 두 개의 개헌안을 절충형식을 취한 내용이었다. 

발췌개헌안은 7월 4일 심야에 일부 야당 의원들을 강제연행하고, 경찰ㆍ군대와 테러단이 국회를 겹겹이 포위한 가운데 기립표결로서 출석 166명 중 가 163명, 기권 2명으로 의결하고, 7월 7일 공포되었다. 비상계엄은 28일 해제되었다. 
 
왼쪽부터 윤치영 부의장, 신익희 의장, 조봉암 부의장
▲ 국회부의장 시절의 조봉암 왼쪽부터 윤치영 부의장, 신익희 의장, 조봉암 부의장
ⓒ 미상(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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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개헌은 이승만의 권력연장을 위한 사실상 친위쿠데타였다. 개정 헌법에 따라 8월 5일 실시된 첫 직선제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은 74.6%의 득표로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조봉암과 이시영은 각각 유효표의 11.4%, 10.7%를 획득했다. 전시하에서 이승만의 일방적인 선거운동의 결과였다. 민국당 일부에서 신익희를 대통령후보에 추천하였으나 "헌정질서를 유린하면서까지 직선제 개헌을 한 마당에 내 어찌 대통령후보에 나서겠느냐"며 출마를 사양하였다. 

신익희는 이에 앞서 6월 30일 부산에서 다시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초대와 2대 전ㆍ후기를 합쳐 연 3회 6년 동안 국회의장을 역임한 기록을 세웠다. 전쟁 초기 서울이 수복되어 시민회관에서 열린 국회에서 전란의 책임을 들어 의장직 사표를 제출했으나 출석의원 전원의 결의로 반려되었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해공, #신익희, #신익희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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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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