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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제주살이 4년차에 접어들었다. 그 사이에 거셌던 제주 러시 현상은 다소 진정된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제주 이주를 꿈꾸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제주 1년 살이 혹은 1달 살이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뜨겁다. 이 글은 동아일보 기자와 세종대 초빙교수를 지내고 은퇴한 후 제주로 이주한 한 개인의 일기이자 제주에서의 생활을 소재로 한 수필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제주도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 제주의 자연환경,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한국현대사의 축소판이라 할 제주사회를 이해하는 데 유익한 읽을거리가 되길 기대한다.[편집자말]
 온통 푸른 숲의 바다가 펼쳐져 곶자왈의 지붕이라고도 한다.
▲ 문도지오름 정상에서 본 풍경  온통 푸른 숲의 바다가 펼쳐져 곶자왈의 지붕이라고도 한다.
ⓒ 황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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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경면 저지리에서 하루를 보낼 계획으로 집을 나섰다. 일단 문도지오름과 저지곶자왈을 걷고, 저지리 중심지로 돌아와 저지오름과 미술관을 돌아보기로 했다.

저지리는 대평리와 더불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마을이다. 올레길을 걸으면서 하룻밤 신세를 진 곳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대평리가 난드르와 박수기정이라는 독특한 지형으로 눈길을 끌었다면, 저지리는 자연·문화예술·관광을 두루 즐길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곳이어서 관심을 두고 있는 곳이다.

자동차를 저지리 복지회관 주차장에 세우고 한라산이 보이는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이 길은 올레 14-1코스이기도 하다. 저지곶자왈에 봄이 오면 백서향의 향기가 온 숲에 퍼져나간다고 해서 때늦은 줄 알면서도 찾아 나선 것이다. 그리고 올레길 완주에서 빼먹은 14-1코스를 뒤늦게 걷고 싶기도 했다.

길을 내주니 고맙다

문도지오름까지 5㎞의 시골길은 평화롭고 또 여유로웠다. 요즘 제주의 마을 곳곳에는 이른바 타운하우스가 자리를 잡고 있다. 마치 집단의 힘이라도 과시하듯, 똑같이 생긴 집들이 똑같은 표정으로 늘어선 이 타운하우스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아무런 감흥을 못 느낀다. 그런데 문도지오름까지 오면서 그 흔한 타운하우스를 보지 못했다. 크고 작은 집들이 전원 속에 자세를 낮추고 앉아 있을 뿐이다.

문도지오름은 소와 말을 방목하는 사유지다. 제주올레를 위해 길을 내줬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에게만 알려진 숨은 명소였는데, 제주올레 코스를 개척하던 탐사팀이 왔다가 아름다운 풍경에 반해 14-1코스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10분 정도 오르니 정상이다.

표고 260m의 널찍한 정상부에는 야생화가, 비탈면으로는 고사리가 제 세상을 만난 듯하다. 그리고 사방은 온통 푸른 숲의 바다가 펼쳐진다. 일명 곶자왈의 지붕이다. 한경면에서 시작한 곶자왈은 안덕면 서광리까지 무려 9.3㎞나 이어진다고 하니 그리 틀린 말은 아니겠다. 곶자왈을 배경으로 나지막하게 솟은 문도지오름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안온하고, 평화롭다.

문도지오름을 거쳐 저지곶자왈 지대로 들어섰다. 온갖 종류의 나무와 넝쿨이 어지러이 엉켜 자라고, 바닥은 흙 대신 용암이 굳어버린 바윗덩어리가 뒹구는 원시의 숲이 곶자왈이다. 제주올레가 길을 내지 않았다면 안심하고 곶자왈 지대로 들어갈 수 있었을까. 사람이 지나갈 수 있도록 우거진 나무 넝쿨을 정리하고 울퉁불퉁한 돌을 평평하게 골라 길을 만들고, 리본을 달아 헤매지 않도록 해주었으니 참 고맙다!

꽃이 피어 있으리라고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역시나 백서향은 꽃 대신 나무와 잎을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백서향의 하얀 꽃이 제주의 봄을 가장 먼저 알린다고 한다. 내년엔 2월쯤 일찌감치 와봐야겠다. 향기가 천리를 간다는 천리향의 일종인 제주 백서향, 예전에는 흔한 꽃이었지만 사람들이 마구 캐가는 바람에 지금은 희귀종이 되어 버렸단다.

저지곶자왈 지대 2.5㎞를 지나 세상 밖으로 나오니 유명 관광지 오설록 차밭이다. 이곳은 언제나 관광객이 넘쳐난다. 덕분에 제주시에서 운영하는 관광 순환버스를 이용해 손쉽게 저지리 중심부로 되돌아왔다.
 
저지리 마을복지회관 뒤에 자리잡아 주민들이나 관광객이 손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산책코스가 잘 정비돼 인기가 높다.
▲ 저지오름 저지리 마을복지회관 뒤에 자리잡아 주민들이나 관광객이 손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산책코스가 잘 정비돼 인기가 높다.
ⓒ 황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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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저지오름으로 향했다. 문도지오름이나 저지곶자왈은 따로 마음먹고 가야 하지만 저지오름은 손쉽게 갈 수 있다. 저지리 마을복지회관 바로 뒤에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잡고 있어 말 그대로 뒷동산 오르는 기분으로 가면 된다. 주민들의 일상 한가운데로 오름이 들어와 함께 동거하는 모양새다.

저지오름은 표고 239m로 적당히 높다. 오름 중간에 조성된 1540m 둘레길을 한 바퀴 돈 다음, 정상으로 올라가 다시 분화구 능선길 690m를 한 바퀴 돌고, 전망대에 올라가는 게 기본코스다.

그동안 여러 번 저지오름을 다닌 덕에 이젠 익숙하다. 둘레길은 평탄해서 남녀노소 모두 걷기에 좋고, 전망대로 오르는 가파른 길은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하니 운동 효과를 기대할 수 있어 좋다.

오늘은 날씨가 맑아서 한라산을 비롯해 당오름, 금오름, 이시돌목장 주변의 오름들이 손에 닿을 듯 가깝다. 한라산을 등지고 서쪽 바다로 눈을 돌리면 송악산·가파도·수월봉·당산봉·차귀도가 한눈에 들어오고 비양도는 바로 코앞이다.

저지리만의 매력

사실 자연환경으로만 치면 저지리 못지않은 곳도 많을 것이다. 저지리만의 매력은 이곳이 문화예술의 향기가 가득한 곳이라는 점이다. 저지리는 2010년 전국에서 다섯 번째로 '문화지구'로 지정됐다. 여기에 저지문화예술인마을이 조성돼 화가·서예가·도예가 등 예술인들이 입주해 살면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예술인마을로 조성된 서울 외곽의 헤이리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헤이리가 관광객으로 혼잡해진 것과는 달리 이곳은 한적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다.

문화지구의 중심은 도립 제주현대미술관과 역시 도립 김창열미술관이다. 물방울 그림으로 유명한 김창열 화백의 작품을 전시하는 김창열미술관 개관식에 간 게 5년 전이다. 금년 초 김 화백의 서거 소식을 들었다. 화가는 갔지만 그의 예술은 남아 물방울 그림을 보려는 사람들이 항상 끊이지 않는다.
 
화가·서예가·도예가 등 예술인들이 입주, 작품활동을 하고 있으며 전시장도 열고 있다.
▲ 저지문화예술인마을 풍경 화가·서예가·도예가 등 예술인들이 입주, 작품활동을 하고 있으며 전시장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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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을 소재로 한 기발한 작품들을 '신종생물'이라는 제목으로 전시 중이다.
▲ 제주 현대미술관 야외전시장 동물들을 소재로 한 기발한 작품들을 "신종생물"이라는 제목으로 전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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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열미술관에서 나와 오솔길을 따라가면 제주 현대미술관으로 이어진다. 이 현대미술관은 전시 작품들도 볼 만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볼거리는 야외전시장이다. 동물들을 소재로 한 기발한 형상의 작품들이 잔디밭에 펼쳐져 발길을 멈추게 한다. 어른이건 아이건 누구나 흥미를 느낄만한 공간이다. 작가들이 붙인 제목은 '신종생물'이었다.

오늘 현대미술관에 들렀다가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현대미술관 내 공공수장고를 활용해 6월부터 미디어 아트 공연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빛의 벙커와 아르떼 뮤지엄에 이어 미디어 아트를 감상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공간이 생겨난다는 얘기다. 규모는 앞의 두 곳보다 작겠지만, 도에서 운영하는 만큼 입장료는 훨씬 저렴할 것이라고 하니 기대가 크다.

또 재일동포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이타미 준(본명 유동룡,1937-2011)의 예술세계를 만날 수 있는 이타미 준 뮤지엄이 내년 3월 저지리 예술인마을에 들어선다고 한다. 제주 여행을 몇 차례 해본 사람이라면 '이타미 준'이라는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이라 할 포도호텔과 방주교회를 가보기도 했을 것이다.

한국인 최초로 프랑스 예술문화 훈장 슈발리에를 받았다거나 일본 최고의 건축상 '모라노 도고 상'을 받은 세계적 건축가라는 찬사는 진부할 것 같다. 그보다는 자연과 인간을 배경으로 한 한국적 아름다움을 추구한 건축가, 특히 제주를 사랑했고 제주의 자연과 소재에서 영감을 받은 건축가라는 표현이 적절할 듯하다. 이 이타미 준의 건축과 예술세계를 감상할 수 있는 뮤지엄이 내년이면 저지리에 들어설 것이라 하니 벌써부터 설렌다.

생전에 '미치광이 중'을 자처하며 파격적인 삶과 그림을 선보였던 중광스님의 작품 전시공간이 저지리 예술인마을에 들어선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가나아트센터가 중광스님 작품을 제주도에 다수 기증하기로 했고, 이에 제주도가 저지예술인마을에 중광미술관을 짓고, 선방(禪房)과 문화예술광장, 조각공원을 설치할 구상이라고 한다.

제주시 애월읍 하귀리 출신인 중광스님(1934-2002)의 작품을 전시할 미술관 건립이 확정된다면 이타미 준 뮤지엄과 함께 저지리는 명실상부한 문화예술의 메카로 떠오른다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아마도 전국적으로도 리(里) 단위의 시골 마을에 이렇게 비중 있는 작가들의 미술관 뮤지엄 등이 밀집한 곳도 없지 않을까 싶다.

문화예술의 향기 물씬
 
방씨와 임씨 부부가 만든 야생화 정원으로, 저지문화예술인마을 입구에 있다.
▲ 방림원 방씨와 임씨 부부가 만든 야생화 정원으로, 저지문화예술인마을 입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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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지리 환상숲 곶자왈 공원에서는 해설가가 관람객을 상대로 곶자왈의 생태를 해설해준다.
▲ 곶자왈 해설 저지리 환상숲 곶자왈 공원에서는 해설가가 관람객을 상대로 곶자왈의 생태를 해설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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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민간정원 1호인 '생각하는 정원'도 저지리의 터줏대감이 된 지 오래다. 또 방씨와 임씨 부부가 만든 아기자기한 야생화 정원인 방림원은 김창열미술관 지척에 있다. 개인이 운영하는 '환상숲 곶자왈공원'도 저지리의 인기 관광지다. 곶자왈의 생태를 실감 나게 해설해주고 있어 항상 관람객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이처럼 미술관과 박물관 전시장에다 오름, 곶자왈과 정원 등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저지리는 불과 30~40년 전만 해도 오지 중의 오지로 꼽혔다고 한다. 전형적인 중산간 마을로 땅은 척박한 데다 물이 귀해 농사짓기도 힘들었다. 4·3의 광풍 속에서 아픔을 겪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이제 저지리는 문화예술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명소로 발돋움하고 있다. 뉴저지라는 별명도 얻었다. 박수를 보낼 일이다. 다만, 외지인들이 몰려들어 땅값만 올려놓는 식의 '발전'이 저지리에서만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2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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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의 언론계 생활과 7년의 대학 초빙교수 생활을 끝내고 2018년 봄 제주로 이주했다. 애월읍의 한 생태마을에 거주하면서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과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 그리고 제주현대사의 아픔에 깊은 관심과 연대의식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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