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9.05 18:29최종 업데이트 21.09.05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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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후보들 사이에서 많이 언급되는 이슈 중 하나가 세종시 행정수도 문제다. 국민의힘 경선후보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지난달 30일 오전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국회의사당 예정지에서 대통령 집무실을 세종시에 설치할 필요성을 언급했다. 주요 행정관청이 세종시로 이전한 상태에서 국회 분원까지 이곳에 설치되면 대통령 역시 세종시에서 국무회의 등을 주재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경선후보인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지난달 21일 세종시청에서 '대통령 제2집무실과 국회 분원 등을 설치해 행정수도를 완성하겠다'고 공약했다. '균형성장 및 지방분권 정책공약'을 발표한 그는 충남 일대와 세종시에 국가행정기관을 전부 배치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제2집무실이나 분원 등의 형식을 빌려서도 모든 국가기관을 이 지역에 설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낙연 전 국무총리는 지난달 22일 민주당 대전시당에서 '충청권을 새로운 수도로 선택한 노무현 대통령의 꿈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절실히 깨닫고 있다'며 국회 분원과 대통령 집무실을 설치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직 이전되지 않은 중앙 관청들도 신속히 옮기겠다고 공약했다. 그는 충남북과 대전·세종을 묶는 충청 메가시티를 행정과 과학의 수도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피력했다.

지금 대선 후보들이 공약하는 것은 대한민국 수도 전체를 세종시로 이전하자는 것이 아니다. 수도를 옮기자는 게 아니라 그 기능의 상당 부분을 이전하자는 것이다.  이런 선례를 우리 역사에서 찾기는 쉽지 않지만, 유사하다고 볼 여지가 있는 사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정조 시대(1776~1800년)의 화성 신도시 건설에서 비슷한 발상을 찾을 수 있다. 

조선판 행정수도 이전
 

수원화성의 북문인 장안문. ⓒ 김종성

  
정조 임금이 지금의 수원인 화성으로 천도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적지 않게 회자되고 있지만,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남긴 <한중록>에 따르면, 정조는 세상을 떠난 해인 1800년에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왕위를 탐내서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 마지못해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4년 뒤 갑자년이면 원자(훗날의 순조)가 열다섯이 되니 왕위를 물려주기에 충분할 겁니다. 처음 마음먹었던 대로 마마를 모시고 화성으로 가서 경모궁(아버지 사도세자)께 자식으로서 행하지 못했던 평생의 큰 한을 이룰 겁니다.
 
갑자년은 육십갑자로 시간을 계산하던 시대에는 새로운 60년의 시작이었다.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새로운 100년의 시작과 비슷했다. 거기다가 양력 1804년 2월 11일부터 시작하는 음력 갑자년은 을묘년에 태어나 임오년에 죽은 사도세자의 탄생 70주년이었다.

정조는 만 10세 되던 1762년에 아버지가 8일간 뒤주에 갇혀 양력 7월 한여름 날씨 속에서 숨져 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런 뒤 노론 기득권 세력에 의해 아버지가 폄하되는 모습을 지켜보며 성장했다. 한이 가득 쌓였던 그는 왕이 된 뒤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추진했을 뿐 아니라 아버지 탄생 70주년에 맞춰 아버지 묘소가 있는 화성으로 가서 마지막 효를 다하고자 했다.

그의 마지막 효는 '자식으로 행하지 못했던 평생의 큰 한'을 푸는 것이었다. 이는 아버지의 명예를 완전히 회복하고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는 것이었다고 일반적으로 해석되고 있다. 24년간에 걸친 정조의 개혁정치가 사도세자 복권과 맞물려 전개됐기 때문에 이런 해석은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사도세자의 무덤인 융릉.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다. ⓒ 김종성

  
왕의 궁궐을 다른 데로 옮기는 것을 천도라고 불렀다. 정조가 재위 중에 화성으로 궁을 옮겼다면 명확하게 천도를 계획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아들에게 넘겨주고 상왕이 된 뒤에 화성으로 가고자 했다. 상왕도 왕이었지만 금상(今上)은 아니었기 때문에 현직 주상이 아닌 상왕의 궁궐을 옮기는 것을 일반적 의미의 천도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인 연령보다 세 살 적은 만 14세 된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면, 아버지인 상왕이 여전히 실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정조가 한창 개혁을 추진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1804년 이후에도 정조가 계속해서 실질적 군주로 인식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기 때문에 정조의 1804년 구상이 실현됐다면 완전한 의미의 천도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천도의 의미를 띠게 됐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세종시 행정수도 완성으로 인해 세종시와 서울시가 수도 기능을 분점하게 되는 것처럼, 정조의 계획이 현실화됐다면 화성과 한양이 도읍 기능을 분점하는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화성 신도시에 담긴 정치 공학

그런데 정조의 구상 속에는 심상치 않은 면이 담겨 있었다. 수원 화성으로 상왕의 궁궐을 옮겨놓고 국정을 일신한 상태에서 사도세자 복권 사업을 완성하려 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로지 아버지의 복권만을 위해 궁궐 이전을 추진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왕조 시대의 천도는 흔히 기존 도읍에 포진한 기득권 세력을 약화시키거나 그들로부터 빠져나와 왕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단행됐다(A). 또는 경제적·군사적 거점을 다른 데로 옮겨 국가경쟁력을 강화할 목적으로도 단행됐다(B). 고려왕조의 법령에 따라 개경에서 고려 군주로 즉위한 이성계가 한양(공식 명칭은 한성)으로 천도한 것은 A 때문이고, 고구려 장수태왕(장수왕)이 만주 국내성에서 한반도 평양으로 천도한 것은 B 때문이었다.

정조의 화성 이전은 A에 가까웠다. 한양에 자가주택 혹은 임차주택을 보유한 상태에서 기득권을 행사해온 정치세력에서 벗어나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이자 자신과 할아버지 영조의 숙원인 탕평 정치를 완성하자면, 자신이 마음 놓고 '활보'할 수 있는 근거지가 필요했다. 탕평은 제1당의 단독 집권을 막는 것이었으므로, 탕평을 완성하자면 제1당의 세력권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정조의 화성 이전은 A에 근접했지만, 이 잣대만으로는 온전히 해석되지 않는 측면도 있다. 왕권강화뿐 아니라 사회경제적 혁신을 도모하려 했던 게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를 주도한 세력은 본인 혹은 문중이 수십에서 수천 명의 노비를 동원해 토지를 경작하면서 공식적으로는 선비 혹은 관료로 활동하는 지주계급이었다. 일반적으로, A 유형을 계획하는 군주들은 이 계급 내에서 동조자들을 찾아내 천도에 필요한 인적 역량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런데 정조는 지주계급 사대부들 속에서 동조자를 찾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부르주아 계급'에서도 협력자들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1592년 임진왜란 이후 지속적으로 성장한 상인 계층 속에서 새로운 기반을 끌어내고 이들과 함께 화성 이전을 완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화성행궁. ⓒ 김종성

 
정조는 한양과 화성의 이동시간을 단축하려고 도로를 새로 개설했다. 한양에서 과천을 경유해 화성으로 이동하는 전통적인 길을 놔두고, 과천을 거치지 않고 시흥·안양을 거쳐 화성으로 가는 도로를 개설했다. 당시 신작로(新作路)로 불린 이 도로는 오늘날 1번 국도의 한 구간을 이루고 있다.

정조는 전통적인 선비형 관료들뿐 아니라 신흥 상인들도 이 '로드 원'을 따라 화성에 집결할 수 있도록 각종 유인책을 수립했다. 2001년에 <한국과 국제정치> 제17권 제1호에 실린 역사학자 박현모의 '정조의 정치와 수원성: 화성 건설의 정치적 의미'에는 한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경강상인들에게 세곡 운송권 같은 특권을 부여한 사례, 화성으로 이주하는 부자들에게 인삼 및 중국산 모자에 대한 독점 거래권을 부여하려 했다가 실패한 사례들이 열거돼 있다.

또 2006년에 <내일을 여는 역사> 제23호에 수록된 이욱 한국국학진흥원 연구원의 기고문 '정조는 왜 화성을 축조했을까'에는 "정조는 일찍부터 이곳을 새롭게 조성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며 "한양의 돈 많은 백성들을 그곳에 이주시키고자 했다"는 설명이 담겨 있다. 신흥 부자뿐 아니라 기존 부자 일부도 화성으로 유인하려 했던 것이다.

화성 건설을 추진하던 시기에 정조가 벌인 유명한 개혁 조치가 바로 금난전권 혁파다. 기득권 상인들의 난전 단속권(노점 단속권)을 혁파한 이 조치는 신흥 상인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혜택을 받은 상인들 역시, 화성을 거점으로 한 정조의 구상에 들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사회 혁신을 꾀한 수도 이전

이처럼 정조는 기득권 정치세력을 견제하는 탕평정치를 실시하는 것에 더해 신흥 및 기존의 상업세력을 유치해 화성을 건설하고자 했다. 사대부 중심인 한양에서 벗어나 상인과 사대부가 어울리는 화성에서 뜻을 펼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화성에 그는 자기 궁궐인 행궁을 배치했다. 이는 그가 화성을 기반으로 새로운 정치세력과 힘을 합쳐 조선을 혁신할 계획을 품고 있었으리라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이는 화성 이전이 실현됐다면, 단순히 정조의 왕권을 강화하는 수준이 아니라 조선 지배층의 컬러를 일정 정도 바꾸는 수준의 사회변화가 일어났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국토의 균형발전이나 지방분권과는 결이 다른, 일정 정도의 사회혁신을 초래하는 '행정수도 이전'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4년 뒤에 함께 화성으로 가시지요'라고 어머니에게 말한 바로 그해에 정조는 49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그의 구상은 물거품이 됐지만, 일정 정도의 사회혁신을 염두에 두고 궁궐 이전을 추진한 군주가 우리 역사에 있었다는 점은 의미가 깊다.

정조는 단순히 '대선 표심'만을 염두에 두고 '행정수도 이전'을 고민한 게 아니라 어느 정도는 조선 사회의 질적 변화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전의 역대 군주들과 달리 사회·경제적 체질 혁신까지도 생각하면서 천도를 고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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