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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교협,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한복판에서 처음 결성된 전국조직
 
민교협은 원래 6월 26일 창립대회를 치르려고 했으나, 경찰의 저지로 연기되어 7월 21일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식으로 창립되었다. 창립 당시 언론은 31개대학 5백27명이 참여하였다고 보도했으나, 실제로는 42개 대학에서 664명이 참가하였다.
▲ 민교협의 창립 소식을 전하고 있는 언론보도 기사(1987. 7. 22, <동아일보>) 민교협은 원래 6월 26일 창립대회를 치르려고 했으나, 경찰의 저지로 연기되어 7월 21일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식으로 창립되었다. 창립 당시 언론은 31개대학 5백27명이 참여하였다고 보도했으나, 실제로는 42개 대학에서 664명이 참가하였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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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은 1987년 6월 26일에 창립되었다. 1987년의 6월 민주항쟁 이후 수많은 민주화단체가 결성되는데, 전국조직으로서는 가장 먼저 결성된 조직이 민교협인 셈이다.

민교협은 창립선언문에서 "이 시대 한국의 대학에 몸담고 있는 우리 교수들은 학문의 자유와 대학의 자율이 사회의 민주화와 표리관계에 있음을 직시하고, 이 양자의 동시병행적 달성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의 공동노력이 절실함을 거듭 확인하여 왔다"고 전제한 뒤 "과거의 축적과 반성 위에서 우리 교수들은 일보 진전된 자세로, 대학과 사회의 민주화를 촉진하는 공동 노력의 장으로서의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를 창립"한다고 선언하였다.

1987년에 들어 박종철 고문사 사건과 이에 대한 축소·은폐·조작 사실이 폭로되고 4·13 호헌조치가 내려지자 민주화 운동이 고양되면서 교수들도 1986년 6월 2일의 교수연합시국선언에 이어 다시 학교별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학원 민주화와 사회 민주화를 위해 교수들의 조직화된 협의기구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보다 널리 확산되었다. 이러한 인식을 배경으로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창립이 성사되었다.

민교협은 원래 6월 26일 창립대회를 치르려고 했으나, 경찰의 저지로 연기되어 7월 21일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식으로 창립식을 거행하였다. 창립 당시 42개 대학에서 664명이 참가한 민교협은 규약에서 "대학과 사회의 민주적 발전을 위해 노력한다."고 설립 목적을 밝혔다. 민교협은 간사 체제로 운영되다가 1988년 8월 20일 의장체제로 전환되어 운영되었고, 초대 의장에는 김상기, 송기숙, 김진균 교수가 추대되었다.

민교협의 주요한 활동은 크게 교육민주화 운동과 사회민주화 운동으로 나뉜다. 민교협의 첫 번째 사업은 교육관계법을 민주적으로 개정하는 일이었다. 1987년 11월 5일 교사의 노동3권 보장 등을 담은 교육관계법의 민주적 개정을 촉구하였으며, 1988년 12월에는 교육관계법 개정을 촉구하는 농성도 벌였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결성될 때는 이를 지지하고 참여하는 활동도 벌였다. 사회민주화 운동과 관련해서는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 방점을 찍고 활동하였다. 민교협은 1988년 서관모 교수의 논문 관련 검찰 소환, 조국 교수의 '사노맹 사건' 관련 직위 해제 등에 대해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대응하기도 하였다.

사당동에 들어선 민교협의 첫 사무실
 
1987년 6월 21일 창립한 민교협(공동의장 김진균 등 3인)은 학원 민주화와 사회 민주화에 큰 기여를 했다. 사진은 사립학교법 개악에 항의하는 농성을 사당동 사무실에서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는 한겨레신문 기사(1990. 3. 18)
▲ 민교협의 항의농성(사당동 사무실)  1987년 6월 21일 창립한 민교협(공동의장 김진균 등 3인)은 학원 민주화와 사회 민주화에 큰 기여를 했다. 사진은 사립학교법 개악에 항의하는 농성을 사당동 사무실에서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는 한겨레신문 기사(1990. 3. 18)
ⓒ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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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교협의 첫 사무실은 1988년 사당역 지하철역 부근에 마련하였다. 그러다가 1989년 사당동 뒷골목 회색빛 건물 전당포 위층으로 옮겨 사월혁명연구소와 함께 사용하였다. 민교협 사무실은 사당1동 1042-8 동아컴퓨터학원 4층에 있다가 골목 안쪽으로 깊숙이 더 들어가 사당1동 1037-18 3층으로 이사했다.

민교협은 사당동에서 1990년 6월까지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990년 1월에는 새로 결성된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심해지자 민주화 운동 단체들이 함께 전노협지원 대책위원회를 구성하는데, 바로 사당동 민교협 사무실에서 출범하였다.

1990년 3월에는 개정 사립학교법이 "교원의 자치권을 부정하고 사학재단의 전횡을 옹호하는 개악"이라며 이를 거부하는 무기한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민교협은 개정 사립학교법에 반대하는 교수 4500명의 서명을 받기도 했다.

민교협은 창립 32주년을 맞은 2019년 6월 26일에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여 '민주평등사회를 위한 전국교수연구자협의회'로 단체 이름을 변경하였다.
  
해직교수 출신의 김진균은 민교협 창립에 앞장섰고, 민교협이 학원 민주화는 물론 우리 사회 민주화에 앞장서는 데 앞장섰다. 2004년 암으로 별세하여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에 안장되었다.
▲ 민교협 초대 의장을 지낸 김진균 교수의 묘(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묘) 해직교수 출신의 김진균은 민교협 창립에 앞장섰고, 민교협이 학원 민주화는 물론 우리 사회 민주화에 앞장서는 데 앞장섰다. 2004년 암으로 별세하여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에 안장되었다.
ⓒ 김진균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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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혁명회, 여성사연구회, 전교조 서울지부도 사당동에

사당동에는 민교협 외에도 1960년의 4·19 혁명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4월혁명 정신을 계승하고자 만든 4월혁명회가 민교협과 함께 사무실을 사용하며 한동안 사당동에 있었고, 진보적 여성정책 연구자들의 모임인 여성사연구회(정현백, 한정숙)도 1987년 5월 창립과 함께 사무실 겸 연구실을 사당1동(419-130)에 냈다.
 
한국의 여성문제를 보다 구체적으로 연구 구명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여성사연구회가 사당동에서 창립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는 언론보도 기사(1987. 5. 19, <동아일보>)
▲ 여성사연구회 창립(사당동) 한국의 여성문제를 보다 구체적으로 연구 구명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여성사연구회가 사당동에서 창립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는 언론보도 기사(1987. 5. 19, <동아일보>)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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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여성문제를 보다 구체적으로 연구 구명할 것을 목적"으로 설립된 여성사연구회는 출범 당시 "기존의 여성학 연구가 구미 이론의 소개에 치우쳤던 데 비해 각 학문분야가 공동으로 보다 구체적으로 한국여성들의 문제를 연구한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여성사연구회는 1989년까지 운영된 후 아현여성연구실과 한국여성연구회로 통합되었다.

한편, 전교조가 합법화되면서 전교조 서울지부 사무실도 2004년부터 한동안 사당동에 있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에 사당역과 사당동에서 가까운 낙성대역 일대에 진보적 연구단체가 속속 들어섰던 배경에는 사당역이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로 자리 잡으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사당동은 조선시대 이래 노량진과 동작진이 가지고 있던 사통팔달 교통로서의 역할을 이어받은 곳이었던 셈이다.

태그:#사당동, #민교협, #여성사연구회, #4월혁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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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현충원 역사산책>(2022),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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