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8.26 15:24최종 업데이트 21.08.26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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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요법을 시작하고 얼마동안은 두 행자가 요리한 음식이 너무 싱거워 소금 하나로 티격태격 하기도 했습니다. ⓒ 송성영

 
"아빠 먹고 싶은 거 없어?"
"글쎄, 뭘 먹을까?"
"글쎄라는 요리는 없는디."
"그려, 감자에 싹이 나려고 하니께, 오늘은 감자볶음 해먹자."


두 아들(이후 행자) 어렸을 때 농사철이 돌아오면 "참외? 수박? 먹고 싶은 거 싹 다 말해라, 아빠가 밭에 심어줄게"라고 말했던 것처럼, 이제 녀석들이 제게 뭘 먹고 싶냐고 묻습니다. 배앓이를 할 때 어린 녀석들의 배에 따뜻한 손을 대주었는데, 이제는 녀석들이 암세포가 살고 있는 저의 부실한 위에 손을 대주듯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암 판정 받고 수술을 거부, 자연요법을 시작할 무렵에는 녀석들이 요리한 음식을 먹는 것이 고역이었습니다. 짭짤하고 매콤한 음식이 입에 배어 있는 지 애비 식습관을 바꾸겠다고 매번 싱겁고 밋밋한 음식을 내놓았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맛이 없는 음식들이었지요.

"야 이건 좀..."
"왜? 음식에 문제가 있어?"
"아니, 그게 아니구, 이건 너무 싱거워 먹기가 좀 그렇다."


두 행자와 티격태격

일반적으로 암 환자는 짜고 매운 음식을 멀리하라는 자연치유의 계율을 녀석들이 고집스럽게 지켰던 것입니다. 수술을 거부한 고집불통의 지 애비를 어떻게든 살려 보겠노라 정성을 다해 마련한 음식 앞에 손사래를 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아이고 아부지, 예전처럼 이제는 짜고 맵게 먹으면 안 되지. 아부지도 잘 아시잖아, 위암에 짜고 매운 음식은 독이 된다는 것을."
"독이 될지 뭐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이건 정말 너무 싱겁다."
"안 돼! 그냥 드셔."
"일반 소금 대신 죽염을 좀 넣으면 되잖어?"
"아빠도 약속 했잖아. 짜고 맵게 먹지 않겠다고."
"그래도 너무 싱겁잖어. 니들이 한번 먹어봐라 자식들아."


작은 행자는 나를 닮은 그 고집스런 성품대로 한번 아니면 아닌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큰 행자는 작은 행자에 비해 유들유들한 성품대로 중재에 나서기도 합니다.

"그려 인상아, 너무 싱거우면 드시기가 그러니까. 아부지 말대로 죽염을 좀 더 넣으면 되겠다."
"그럼 아주 쪼끔만."

"좋다. 니들 말대로 싱겁게 먹겠는데 지금보다 약간 덜 싱겁게 먹자. 그래도 맛은 있어야 할 것 아니냐. 음식이 너무 싱거워서 맛없게 먹으면 스트레스가 쌓이고 스트레스가 쌓이면 없던 병도 생기기 마련인겨. 소금이 적당히 들어간 음식은 맛이 좋아 기분도 좋아진다. 기분은 약이 되고 독이 되니까, 일단 기분 좋게 먹어야 하지 않겠냐."

"좋아, 아부지 말대로 할 테니께 아부지도 너무 짜고 맵게 먹지 말 것, 그 약속 지키셔야 혀."
"당연하지. 니들도 예전보다 약간 싱겁고 덜 맵게 먹기로 한 거, 약속 지켜야 한다."


병원에서 암 판정을 받고 자연요법을 시작할 무렵, 두 녀석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듯이(1년 지나 다시 담배를 피우고 있지만) 녀석들 역시 맵고 짜게 먹던 식습관을 고쳐 나갔습니다.

누구는 두 아들을 고생시킨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자연요법 시작 1년 동안 두 행자와 함께 생활하고자 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녀석들이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지 애비가 어떻게 극복하는지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두려움 없는 삶을 살아갔으면 했습니다. 또 하나, 지 애비와 함께 좋지 않은 식습관을 바꿔 나가길 바랐습니다. 그렇게 묵묵히 온갖 궂은일을 해가며 내공을 쌓아나가는 절집의 행자처럼 생활하다보면 자신들이 추구하는 음악 세계도 좀 더 깊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두 행자와 함께 생활하는 것은 두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지 애비가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지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두려움을 극복했으면 하는 거고, 둘째는 좋지 않은 식습관을 바꿔나가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지 애비 비위 맞춰가며 절집의 행자처럼 생활하다보면 자신들이 추구하고 있는 음악 세계도 깊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 송성영

 
두 아들과 함께 생활하는 또 하나의 이유

두 행자의 할아버지, 제 아버지는 위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가족들 중엔 유일하게 제가 위암에 걸렸습니다. 그렇다고 형제들이 위가 좋은 것은 아닙니다. 암 중에서 특히 위암은 가족력이 있다고 합니다. 아버지와 나는 음식을 짜고 맵게 먹고, 거기다가 술 담배를 입에 달고 살았고, 고집스러운 성격에 외모까지 닮았습니다. 그리고 두 행자 역시 식습관 등이 저와 많이 닮아있습니다.

아버지나 나나 위암에 걸린 원인은 아주 다양할 것인데 그 원인들 중에 식습관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과도한 술 담배에 고집스러운 성품, 똑같은 밥상에서 똑같은 음식을 먹으니 아무래도 음식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겠지요.

위암이 가족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서는 그렇잖아도 위장이 좋지 않은 두 아들을 부러 곁에 두었습니다. 수술을 거부하고 자연치유를 하는 지 애비와 똑같은 밥상, 식이요법을 공유하다 보면 두 녀석 또한 어쩔 수 없이 식습관을 바꿔야 하니까요.

그렇게 지 애비처럼 육고기를 멀리하고 농약 한 방울 화학비료 한 톨 넣지 않고 직접 재배한 신선한 채소 위주의 자연식 밥상으로 녀석들 위장도 좋아졌습니다. 위암 환자인 지 애비도 자연치유를 시작하면서 눈에 띄게 좋아졌는데 건강한 두 녀석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요. 이전에는 종종 설사와 변비로 고생했는데 지 애비의 자연치유에 동참하면서 설사와 변비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1년을 저와 함께 생활하고 나서 서울로 올라가 음악 작업을 한다고 지하 작업실을 얻어 생활했습니다. 작업실 대여 비용은 두 녀석의 엄마가 마련해 줬다지만 가난한 청년들의 서울생활이 그러하듯 택배 아르바이트 등으로 겨우 겨우 입에 풀칠하며 생활했습니다.

그렇게 서울에서 값싼 인스턴트식품으로 생활하다보니 두 녀석들은 다시 설사와 변비로 고생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윤석열 전 총장이 가난한 사람들 먹게 해줘야 한다고 말했던 바로 그 값싼 '부정식품'(우리는 어렸을 때 '불량식품'이라고 했습니다)들을 줄기차게 먹었던 것이지요.

서울생활 1년이 지날 무렵 때마침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해 두 행자는 다시 지 애비가 사는 산막으로 돌아왔습니다. 작은 행자는 곧바로 군에 입대하고 큰 행자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작은 행자는 전방에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큰 행자 역시 다시 예전처럼 지 애비와 함께 부정식품이며 육고기를 멀리하고 채식위주의 식단으로 생활한 지 1년, 요즘은 설사와 변비가 거의 사라졌을 만큼 건강해졌습니다.

두 행자가 몸으로 경험했듯 윤석열 전 총장이 말하는 부정식품은 그만큼 건강을 좌우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정식품이라도 먹게 해주고 싶다는 그의 말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겠다는 말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스스로 어리석은 자임을 입증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만에 하나 대통령이 되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정식품을 맘껏 먹게 해준다면 그것은 마치 박정희 독재 정권 때 새마을 운동을 펼쳐 나가면서 가난한 농촌의 집지붕을 석면 덩어리의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꾼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지요. 독재자 박정희도 초가집을 헐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비가 와도 새지 않는 슬레이트 지붕을 권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새마을운동의 상징과도 같았던 슬레이트 지붕 아래에서 사는 사람들의 건강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입니다. 석면으로 만들어진 슬레이트는 오래되면 비산 먼지를 방출해 거주자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칠 수 있다는 사실, 슬레이트 지붕이 건강에 얼마나 나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이지요(석면은 장기간 노출 시 폐암 석면폐 등의 호흡기 질환을 유발할 수 있는 1급 발암물질로 알려져 있습니다).

결국 가난한 사람들을 잘 살게 해주겠다는 그 단순무식한 무지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의 건강을 알게 모르게 해쳐왔던 것입니다. '윤석열의 부정식품'도 그와 다름없는 것이지요.
 

오일장에 나가 묵은 쌀과 떡국 떡을 튀겼지만 위에서 잘 받아들이지 않아 반도 채 먹지 못했습니다. 저 또한 때론 윤석열씨가 말하는 부정식품, 어렸을 때부터 먹었던 그 온갖 유해한 첨가물이 입맛을 자극하는 '부정식품'을 찾기도 합니다. ⓒ 송성영

 
윤석열의 '부정식품'과 '풀떼기'

자연요법을 시행하기 이전에는 채소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 육고기를 멀리한 덕분에 지금은 예전과는 달리 온갖 '풀떼기', 채소들을 맛있게 잘 먹고 있습니다. 고기를 먹고 나면 뒷맛이 찝찝한데 채소를 먹고 나면 입안에 오래도록 그 향긋한 자연의 맛이 돌아다닙니다.

늦은 봄이 되면 겨울을 보낸 양배추며 무, 배추가 꽃을 피웁니다. 씨받을 한두 포기만 남기고 소처럼 그 향긋한 꽃을 와작와작 씹어 먹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인간답게 먹을 방법을 궁리해 냅니다.

지난 가을 수확해 땅 속에 묻어 보관했던 무, 텃밭에서 한창 자라고 있는 상추, 산막 주변에 널린 민들레 잎을 뜯어 넣고 꿀에 절인 마늘과 생강가루에 여동생이 항암에 좋다며 보내온 그 이름도 생소한 브라질너트를 비롯한 온갖 견과류에 올리브기름을 넣어 살살 버무려 먹습니다. 살면서 샐러드라는 것을 거의 먹어 보지 못했는데 먹다보니 샐러드가 이런 것이구나 싶습니다.

밥 한 덩이에 산나물을 데쳐 고추장 넣고 비벼 먹는 양푼을 껴안고 폼 나지 않게 샐러드를 먹고 있는데, 한 달에 한 차례씩 서울에 올라가 홍대 클럽 '빵'에서 공연을 하는 큰 행자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아부지 뭐 하십니까?"
"샐러드 먹으며 샐러드에 관한 글을 쓸까 궁리 하고 있다."
"아부지가 젤 속 편하게 사시네..."
"그람 짜슥아, 신선노름하고 있는디..."


분명한 것은 육식을 멀리하고 채소 위주의 식단이 몸에 배면 신선이 흰 수염 날리며 공중부양 하듯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구멍가게를 한 덕에 부정식품을 먹고 자란 저 보다 꽁보리밥에 풀떼기만 먹고 자랐던 친구들 대부분이 잔병치레조차 없이 훨씬 더 건강합니다. 이제는 제가 그 어린 시절 가난한 친구들이 먹었던 그 '풀떼기'들을 항암식품으로 먹고 있습니다. ⓒ 송성영

 
때론 저 또한 윤석열씨가 말하는 '부정식품'을 찾기도 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집안이 그런대로 넉넉한 아이들은 학교 주변에서 파는 부정식품을 곧잘 사먹었습니다. 저희 집안은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종종 부정식품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7남매 먹이고 가르치려면 농사로는 부족해 2평도 채 안 돼는 골방을 개조해 코딱지만 한 구멍가게를 꾸려나갔던 것입니다. 그 덕분에 사카린으로 만든 달콤한 사탕과 과자 등 부정식품을 먹고 자랐습니다.

하지만 학비며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못된 선생들로부터 차별과 구박을 받았던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은 명절날 육고기는 고사하고 부정식품조차 먹을 기회가 없어 '풀떼기'들과 채소들을 줄기차게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올 무렵이면 늘 허기가 졌습니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찔레 순이나 누구네 집 밭에서 몰래 메주콩을 훑어 볶아 먹고 때론 무를 뽑아 손톱으로 껍질을 벗겨 와작와작 씹어가며 허기를 달래기도 했습니다. 칡뿌리에 산딸기, 밤, 돌배, 심지어는 이른 봄 소들이 먹는 풀을 뜯어 고추장에 찍어 먹고 아카시아 꽃으로 배를 채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부실하게 먹고도 소 꼴 베는 일부터 지게질이며 밭일, 논일 등등 집안일을 거뜬하게 해냈습니다. 그 가난한 친구들은 찰기 없는 정부미 흰 쌀 밥에 고기반찬, 온갖 부정식품을 사먹을 수 있었던 비교적 집안 살림이 좋았던 아이들보다 훨씬 더 기력이 좋았습니다.

입맛을 자극할 뿐 건강에 좋지 않은 부정식품을 먹고 나면 밥맛이 없어집니다. 하여 밥상 앞에서 투정을 부리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께서는 "내비 둬, 저 눔 자식이 배가 불러서 그렇지 배고프면 지가 알아서 먹겠지"라고 말하셨습니다. 고집불통의 저는 그날 밤 배에서 꼬르륵 소리를 들어가며 밥투정을 후회하곤 했습니다. 이게 다 부정식품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아이들은 밥투정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허기가 반찬이라고 풀떼기 반찬 하나만 있어도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맹물을 말아서라도 밥을 맛있게 잘 먹으니 그만큼 '밥의 힘'이 생겨 힘쓰는 일도 거뜬하게 해냈던 것입니다.

저의 항암식품

당시 우리가 먹었던 채소들은 오염되지 않은 신선한 풀떼기를 먹고 배설한 똥오줌으로, 아궁이에서 나온 재 또는 온갖 풀들로 퇴비를 만들어 키운 무공해 채소들입니다. 가난한 집안에서는 농약조차 살 돈이 없어 농약도 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길가에 풀떼기만 보이면 농약을 뿌려 누렇게 죽여 놓지만 농약이 귀했던 당시 길가의 온갖 풀떼기들은 모두 무공해였습니다.

거기다가 사시사철 산과 들에서 나오는 산나물, 들나물에 이르기까지, 가난한 친구들이 먹었던 온갖 먹을거리들이 지금은 귀한 대접을 받습니다. 그 친구들은 지금도 여전히 잔병치례 없이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그 친구들이 산막으로 병문안을 왔습니다. 그 친구들 중 하나가 도끼를 집어 들었습니다. 덩치가 산만한 큰 행자의 친구들이 번갈아가며 도끼질하다가 포기한 통나무를 내리치기 시작했습니다.

젊은 친구들이 포기했던 그 통나무를 환갑의 나이에 보기 좋게 쪼갰습니다. 만약 그 친구가 부정식품을 먹고 자랐다면 지금처럼 잔병치레 없이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어린 시절의 그 친구처럼 가난한 아이들이 먹을 수밖에 없었던 풀떼기들, 그 풀떼기들이 제가 시행하고 있는 자연요법 중 하나인 식이요법의 주축입니다. 그 풀떼기들이 저한테는 항암식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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