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기획 '우리말 천태만상'은 세종국어문화원과 오마이뉴스가 함께합니다.[편집자말]
일본 출신 방송인 후지모토 사오리가 ‘사랑합니다’를 수어로 표현하고 있다.
 일본 출신 방송인 후지모토 사오리가 ‘사랑합니다’를 수어로 표현하고 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이것 좀 보실래요?"

한국어 억양과 발음이 비교적 정확한 일본인이 겸연쩍은 듯이 머뭇거리면서 가방에서 꺼내든 공책을 보고 깜짝 놀랐다. 또박또박 눌러쓴 정자체 글자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런 글도 적혀 있었다.
 
- 한글은 거의 모든 소리를 완벽하게 적을 수 있는 글자.
- 해례본에 따르면 사람의 발성기관으로 '음'을 그대로 문자로 표현한 아주 과학적인 글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1443년에 창제된 훈민정음의 해례본까지 살펴본 그의 학구열에 감탄했다. '해례'는 세종대왕을 보필하면서 한글 반포를 도운 정인지,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등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만든 원리와 용법을 설명한 글이다. 이를 제대로 들춰본 국민이 몇 명이나 될까? 아래 4분짜리 영상도 한번 보아주기 바란다. 
 

"방탄소년단 노래 수어 안무... 감동 받았어요"

영상은 방탄소년단(비티에스·BTS)이 작년에 발표한 곡 'ON'의 강렬한 리듬에 맞춘 열정적인 춤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 안무는 단순한 몸짓이 아니라 뜻이 담긴 말이다. 손짓과 몸짓, 표정이 다름아닌 한국 농인들의 수어였다. 방탄소년단이 지난 7월 발표한 '퍼미션 투 댄스'에 등장하는 수어 안무가 세계 농인들을 감동시키기 1년 전에 그는 이 영상을 유튜브에 올려 호응을 얻었다. 

"해외의 아미(방탄소년단 팬덤)들이 보고 댓글을 달아줬습니다. 방탄소년단의 음악은 철학적 내용을 담고 있는데 예술적으로 표현해줘서 놀랍고 고맙다는 반응이었어요. 안무를 공개하기 전에는 음악적 가치를 훼손시키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을 했거든요. 농인 아미들도 '우리 언어'로 표현해줘서 감동받았다고 하더라고요."
   
수어 아티스트인 후지모토 사오리를 지난 20일 서울 서초구의 다국적 외국인 연예 기획사 에프엠지(대표 이승택) 사무실에서 만났다. 무분별한 외국어 남용 등으로 우리말이 오염되는 현상을 진단하는 기획 취재를 하면서 그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한글'과 '한국 수어'에 대한 그의 각별한 애정이 궁금했다.   

그는 SBS 예능프로그램 <골 때리는 그녀들>에서 'FC 월드 클라쓰' 공격수로 활약하고 있다. 시청자들은 예선전 첫 경기에서 왼발로 첫 골을 넣었던, 매 경기마다 온 몸을 던져 볼을 쫓는 그의 투혼을 기억한다. 하지만 농인들 사이에서 그는 수어 아티스트로 더 유명하다. 사오리는 오는 10월 5일 한류 한글 학술대회 때 한글 홍보대사로도 위촉될 예정이다. 

그가 한글을 처음으로 접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해외 연수를 한국으로 왔는데 한국 학생들이 일본어를 열심히 배우는 모습을 보고 부끄러웠다고 했다. 대학에서 제2외국어로 한국어를 택했고, 일본에서 한국어 능력시험 최고급 단계인 6급을 통과했다. 

한글에 이어 한국 수어 도전... "선한 영향력 전하고 싶다"
 
최근 ‘골 때리는 그녀들’ 방송 출연과 수어 아티스트 활동을 하고 있는 일본 출신인 후지모토 사오리가 20일 오전 서울 강남구 FMG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독자들에게 자신의 ‘얼굴 이름’ 사오리를 표현하며 인사하고 있다.
사오리는 “누군가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선한 영향력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최근 ‘골 때리는 그녀들’ 방송 출연과 수어 아티스트 활동을 하고 있는 일본 출신인 후지모토 사오리가 20일 오전 서울 강남구 FMG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독자들에게 자신의 ‘얼굴 이름’ 사오리를 표현하며 인사하고 있다. 사오리는 “누군가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선한 영향력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 BTS 음악 수어로 전하는 사오리의 특별한 한글 사랑
ⓒ 유성호

관련영상보기

 
그는 졸업 후 한국 엔터테인먼트 일본 지사에서 유명 연예인 전담 통역과 마케팅 분야에서 일하다 2018년 한국으로 건너왔다. 한국어가 유창했던 그는 그해 평창 동계 올림픽 대회 및 패럴림픽 대회 홍보대사로 활동했다.   

"쓰러져도 벌떡 일어나 다시 도전하는 장애인들을 보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초등학교 때 일본 수화를 배운 적이 있는데, 패럴림픽 현장에서 주고받는 수어를 보고, 농인들의 언어도 나라별로 다르다는 것을 알았죠. 한국어에 이어 한국 수어를 배우면 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전할 수 있겠다 싶어서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 뒤부터 그는 한국국제관광전 홍보대사, 법무부 서울출입국·외국인청 글로벌 홍보대사, 한국관광협회 중앙회 홍보대사, CSR포럼 홍보대사 활동을 이어가면서 한국 수어 공부를 병행했다. 외국인 중 한국어를 잘하고 특정 재능이 있는 사람을 국가별로 발탁해 브랜딩 하는 에프엠지 기획사의 프로젝트 공연팀 '한글'(한국 문화를 알리는 글로벌 아티스트)에서 문화공연도 했다. 

"언어는 문화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합니다. 수어를 하려면 농인 문화도 알아야 했죠. 잠시 방송 활동을 접고 수어 통역사 자격증 공부에 전념했어요. 국가시험 과목도 장애인 복지, 청각장애의 이해, 수어통역의 기초, 그리고 9급 공무원 수준의 국어시험이어서 만만치 않았습니다. 시험 한두 달 전부터는 새벽 5시부터 독서실에 앉아 밤 11시까지 공부했습니다."

외국인 최초... 한국 수어 통역 자격증 1차 시험 통과
 
사오리는 지난 2020년 7월 외국인 최초로 국가공인 한국수어 통역사 자격증 1차 필기시험에 합격했다.
사오리는 농인분들의 모국어가 수어이기 때문에 자신의 수어 퍼포먼스가 농인분들에게 실례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한국어를 더 깊이 있게 공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오리는 지난 2020년 7월 외국인 최초로 국가공인 한국수어 통역사 자격증 1차 필기시험에 합격했다. 사오리는 농인분들의 모국어가 수어이기 때문에 자신의 수어 퍼포먼스가 농인분들에게 실례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한국어를 더 깊이 있게 공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사오리는 지난 2020년 7월 한국 수어 자격증 1차 필기시험에 합격했다. 외국인 최초였다. 그는 작년 한글날 경축식 축하공연 때에는 서울올림픽 주제곡인 '손에 손잡고'를 한국 수어로 안무하기도 했다. 

"수어 통역사들조차도 저의 안무를 보고 '통역도 힘든데, 춤으로 보여준 것이 대단하다'고 말씀을 해주셨어요. '한국 수어를 한 사람이 일본 사람이었어?'라고 의외라는 반응을 보인 분도 있었고요. 농인 최초의 언어학자인 강남대 변강석 교수님은 '수어 아티스트라는 저만의 새로운 장르가 생겼다'면서 청인과 농인의 가교 역할을 주문했죠."  
   
농인들이 그의 춤을 보면 노래 가사도 완벽하게 알아들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는 "수어에 기초해서 안무를 창작하지만, 리듬과 음악의 메시지를 느낄 수 있을 정도이고, 슬픔과 기쁜 감정을 전달하는 데 신경을 쓴다"면서 "의미 있는 음악의 안무를 수어로 창작해서 전 세계 농인, 청인 모두가 함께 즐기고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게 수어 아트"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 수어 전도사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난 3월에 열린 수어 통역 자격증 2차 시험에서는 고배를 마셨다. 그에게 '계속 도전할 것인가'라고 물었더니 "될 때까지 한다"고 말하면서 웃었다. 그 이유도 물었다.  

"수어는 한국 농인들의 모국어입니다. 수어 아트가 농인들의 언어를 훼손하지는 말아야지요."

그는 오는 10월 9일 한글날에 열리는 2차 시험을 벼르고 있다.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글의 매력은?   
 
사오리 공책에는 한글을 공부하면서 적은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다. 
사오리는 한글의 매력에 대해 “다른 언어와는 달리 세종대왕이 백성들을 위해 쉽고 의미 있는 글을 발명했다”며 “(백성들을) 배려한 배경이 담겨져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사오리 공책에는 한글을 공부하면서 적은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다. 사오리는 한글의 매력에 대해 “다른 언어와는 달리 세종대왕이 백성들을 위해 쉽고 의미 있는 글을 발명했다”며 “(백성들을) 배려한 배경이 담겨져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한국 수어 통역사 자격시험은 한글의 구조와 맞춤법에서부터 한글 창제의 역사와 정신, 철학까지도 깊이 있게 이해해야만 통과할 수 있다. 따라서 사오리의 한글 실력도 수준급이다. 이런 그에게 한글의 매력을 물었다. 

"전 세계 언어학자들이 최고의 문자라고 극찬하고 있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다른 언어와는 달리 세종대왕이 백성들을 위해 쉽고 의미 있는 글을 발명했다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매력적이었습니다. 일본어는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반포일이나 한글날처럼 기념일도 없지요."

사오리는 한글의 장점을 묻는 질문에도 막힘없이 대답했다. 

"크게 2가지를 말할 수 있어요. 한글은 자음과 모음을 나뉠 수 있는 음운 문자라서 한자나 히라가나, 가타카나 같은 다른 동양 문자에 비해 디지털 시대에 유리합니다. 타이핑을 하는데 좋죠. 자모음이 나뉘는 건 영어도 마찬가지지만 영어는 뭉쳐서 음절 단위로 쓰지 못하고 풀어서 쓰는데 한글은 뭉쳐서 음절을 한 덩어리로 쓸 수 있죠.

또 자음이나 모음의 문자 모양이 단순한데도 비슷하게 생긴 글자들은 소리가 유사합니다. 가령 예사소리인 ㄱ, 된소리인 ㄲ, 거센 소리인 ㅋ 등 자음이나 모음이 문자 모양이 단순하지만 비슷하게 생긴 것은 모양만 봐도 어떤 소리인지가 예측이 됩니다. 느낌을 알 수 있죠." 


그는 "대학 졸업한 뒤 일본에서 회사에 다닐 때에도 무언가를 빠르게 받아 적을 일이 있으면 일본어가 아니라 한글로 쓰기도 했다"면서 "주변의 동료들이 내 노트를 보고 의아하게 생각하기도 했다"라고 말하면서 웃었다.  

각 나라에서 통용되는 글자는 단순한 정보 전달에 그치는 게 아니다. 그 나라만의 문화와 정신, 정서도 담겨있다. 그는 "한글에는 사람에 대한 배려심, 한국의 '정' 문화가 느껴진다"면서 "일본어에는 애매한 표현들이 많은데 그건 집단 문화에서 비롯됐다"고 분석했다. 그는 특히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접할 때 '욕부터 배운다'는 말이 있는데, 감정 표현이 풍부한 데서 비롯된 것 같기도 하다"면서 "한국 노랫말도 일본어로 번역하면 감정 표현이 배제되기 때문에 촌스럽게 바뀐다"고 지적했다.  

곳곳에서 목격된 외국어 남용... "속상하죠"
 
일본 출신 방송인 후지모토 사오리가 ‘I LOVE YOU’를 수어로 표현하고 있다.
사오리는 전세계 농인들에게 한국 음악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수어 아티스트로 활동을 하고 있다.
 일본 출신 방송인 후지모토 사오리가 ‘I LOVE YOU’를 수어로 표현하고 있다. 사오리는 전세계 농인들에게 한국 음악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수어 아티스트로 활동을 하고 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한글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른 사오리의 눈에 비친 요즘 한국의 한글 사용 풍속도는 어떨까? 거리에 나가면 현란한 간판 속에 한글이 사라지고 있다. 각종 매체나 홍보물에도 한국어, 한글의 자리를 영어 등이 대체하고 있다.   

"처음 한국에 올 때 한글의 나라에 간다는 사실 때문에 가장 마음이 설렜습니다. 그런데 한글이 점차 없어지는 것 같아서 속상하고 서운하죠. 외국에서는 방탄소년단 등이 이끄는 한류 붐이 이어지고 있고, 한글을 공부하는 분들도 많아지고 있어요. 한국어뿐만 아니라 한국 수어도 전 세계 공통어가 될 날을 꿈꾸고 있습니다." 

오는 10월 5일 한류 한글 학술대회 때 한글 글로벌 홍보대사로 위촉되는 사오리는 다음과 같이 포부를 밝혔다. 

"제가 한국어를 배우지 않았으면 지금의 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글은 과학적이고 누구나 쉽고 평등하게 쓸 수 있는 문자입니다. 한글은 위대합니다. 한글로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더 큰 가치를 만들 수 있습니다. 전 세계인에게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겠습니다."

태그:#우리말 천태만상, #세종국어문화원, #후지모토 사오리, #한글, #수어
댓글2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환경과 사람에 관심이 많은 오마이뉴스 기자입니다. 10만인클럽에 가입해서 응원해주세요^^ http://omn.kr/acj7

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