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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봄, 나는 초등학교 1학년 아이의 입학과 동시에 육아휴직을 했다. 아이에게는 성공적인 학교 생활을 위해 2주간의 적응 기간이 주어졌는데 적응이 필요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생활이 바뀌자 몸의 이상신호에 민감해졌다. 첫 신호는 백내장 진단으로 시작되었다.

언젠가부터 눈이 뻑뻑하고 침침하면서 초파리 같은 것이 시야에서 떠다니기 시작했다. 책을 읽거나 PC를 보는 것이 점점 불편했다. '눈 영양제라도 사다 먹어야 하나.' 고민만 하다 휴직을 맞았다. 아이 학교 보내고 잠시 볼일을 보러 갔던 건물 2층의 안과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몇 가지 검사 후, 의사는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했다.

"백내장 초기입니다. 다른 이상 증상도 있는 것 같은데 정밀검사 장비를 갖춘 큰 병원에 가보셔야겠습니다."

"큰 병원 가보셔야겠습니다"
  
▲ 육아휴직과 함께 백내장이 찾아왔다 
ⓒ Amanda Dalbjorn@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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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19년 기준 한 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받은 수술 20종목 중 1위가 백내장 수술이라고 한다. 최근 40~50대 중장년층의 백내장 수술이 늘고 있는 추세라는데 인터넷 상의 의학정보와 건강검진제도 활성화가 큰 이유로 꼽힌다.

눈은 20대 이후 꾸준히 노화가 진행되는데 노안이 오면서 수정체 혼탁, 시력저하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 백내장이다. 예전에는 백내장이 노년의 상징처럼 여겨졌지만 요즘은 비교적 젊은 세대에서도 백내장 발생률이 증가 중이라고 한다(참고 : 국민건강보험공단 2019년 주요수술통계연보 다빈도 수술, YTN '노인 질환 '백내장'은 옛말, 4-50대 중년 백내장 증가' 보도).

노안은 시간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백내장은 갑작스러웠다. 무엇이 더 나올까 긴장하며 대학병원에서 추가 검사를 받았다. 초기 백내장은 약물로 진행을 예방할 수 있다는 말로 나를 안심시킨 후, 의사는 하얀 점 하나를 가리키며 이상 혈관이 생겼고 녹내장 같은 것도 보이는데 둘 다 추적 관찰로 조치할 필요가 있으니 몇 달 뒤 다시 오라고 했다.

돌아오는 길, 동공 키우는 약물 효과로 흐릿한 시야를 통해 바라보는 봄날의 오후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갑작스레 닥쳐온 노화의 징조는 이제 내가 생애주기의 다른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길을 달리다 보면 커브를 돌 때 속도를 줄이라는 주의 안내판이 나온다. 달리던 속도를 유지하다 자칫 큰 사고가 날 수 있으니 천천히 분기점을 통과하라는 것이다. 지금 나는 이 안내판을 막 지나는 중이 아닐까. 더 멀리 계속 달리기 위해 전략적으로 속도를 줄이고 신중하게 통과해야 하는 지점에 어느새 와 있었다.

요즘 비슷한 연령대로 구성된 모임 단톡방에서는 안부 인사가 끝나자마자 부모님 상이나 질병 소식이 줄줄이 이어진다. 누군가는 관절에, 또 누군가는 머리에 이런저런 문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갑작스런 인사 이동이나 두문불출에 고개를 갸우뚱하다 보면 업무며 관계로 인한 공황 장애를 겪었다는 사연이 들려온다. 안타까움과 못났다는 반응이 오가지만 모두가 불안한 미래에 대한 부담감을 안고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은 오십보 백보다. 하지만 달리던 속도를 줄이고 멈춰 쉬는 것은 쉽지 않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런던비즈니스스쿨(LBS)의 인재관리(HR)전문가 린다 그랜튼과 앤드루 스콧이 쓴 <100세 인생>에서는 기대여명이 늘어나 산업사회를 지배하던 교육-고용-퇴직의 3단계 생애주기가 다양한 단계로 바뀔 것을 예상하며, 세대별 생애주기 시나리오를 통해 변화와 과도기에 대한 열린 자세를 강조했다.

이미 조기 퇴직과 이직, 창업 등 빈번한 사회 현상이지만 아직 우리 사회와 기업 문화는 3단계 생애주기에 맞춰져 있고, 중년의 휴식을 낙오나 도태로 간주하고 두려워하는 분위기다. 나 또한 육아휴직을 결정 후, 직간접적으로 따가운 시선을 감내하는 미움 받을 용기가 필요했다.

휴직 기간 동안 코로나 시대에 아이의 학교 적응과 학습을 도우면서 나 자신의 가능성도 끌어올리고 싶었다. <100세 인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노동 때문에 소모된 무형자산(건강, 사회관계자본, 역량강화를 위한 신기술)을 재충전하는 과도기로 삼은 셈이다. 그만큼 복직 전 계획했던 일을 의미 있게 달성해내야 한다는 강박을 끌어안고 휴직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백내장 다음엔 공황

백내장 진단을 받고 난 뒤 한 달 정도 지나 내게는 경미한 공황 증세가 나타났다. 오랫동안 꿈꾸던 일에 도전해 보려고 애쓰는데 예상 외로 여유롭지 않은 휴직 생활의 시간 관리며 체력의 한계, 마음 같지 않은 진척 상황에 결국 공황이 온 것이었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고 가슴이 자꾸 두근거려 산책도 하고 새벽 기상도 쉬어봤지만 증상은 지속되었다.

'이러려고 욕과 눈치를 먹으며 휴직까지 했나.' 자괴감에 빠진 나를 긴 인생의 선 위에 놓고 10년 뒤, 20년 뒤로 가 보았다. 그 때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어떤 말을 해 주고 싶을까? 그 답을 과거의 나를 돌아보는 것으로 얻었다.

외환 위기와 금융 위기의 큰 파도 사이, 취업난에 힘겨워 하던 내가 지금의 나에게 앞날을 묻는다면 "내일의 네가 잘 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더 많이 경험하고 자신을 아끼라"고 말해줄 것이다. 그렇다면 10년 뒤, 20년 뒤의 나라고 다를까? 더 맹렬히 달리지 않는다고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다그치고 탓할까?

린다 그랜튼과 앤드루 스콧은 더 이상 부모 세대의 삶의 방식을 따를 수 없는 현재 중년 이후의 세대에게 최적의 인생계획을 수립하려면 자기 통제력을 발휘하여 다수의 자신을 만들어 보라고 한다. 생애주기의 과도기에 현재와 미래의 자신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정체성을 갱신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재정계획수립에서 제시된 방법이지만 나와 같이 몸이나 마음 건강에 어려움을 겪는 중년의 재충전에도 의미 있는 방법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조바심을 내려놓고 긴 관점으로 상황을 바라보자 서서히 공황증세도 사라졌다.

속도를 줄이는 용기 
 
속도를줄이시오
▲ 급커브길 속도를줄이시오
ⓒ 박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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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중년을 맞아 여기저기 아프거나 무기력하다면 그 신호를 절대 무시하지 말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인생의 속도를 줄이며 휴식을 통해 자신과 대화할 용기를 낼 것을 권하고 싶다.

우리 세대는 100세는 아니더라도 부모 세대보다 더 긴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고, 자의 또는 타의의 차이만 있을 뿐 변화의 과도기는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생애주기가 될 것이다. 더 사는 만큼 노동 기간도 길어지는데, 앞서 말한 두 학자가 언급한 것처럼 우리에겐 미래의 자신과 상호작용해서 더 나은 인생을 꾸려나갈 능력이 있다.

휴직의 원래 목적과 의미로 돌아가 본다. 귀한 1년의 시간을 얻었다. 훗날 돌이켜 보면 이 시간은 미래의 나에게 의미 있는 재충전과 도전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예상과 달리 성과가 나지 않더라도 몸을 돌보며 내일을 기약할 수 있고,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구분하는 값진 경험을 얻게 될 것이며, 하던 일에 더욱 감사하며 열중하거나 다른 일로 전환하는데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오늘은 남은 내 인생의 가장 젊은 날'이라는 흔한 말을 떠올리며, 몸과 마음의 신호에 더 민감하게 귀를 기울여본다. 재정적 안정, 타인의 인정을 잠시 내려놓고 또 다른 중요자산인 건강을 챙기며 도전의 즐거움을 누려보기로 마음먹는다.

이제 막 커브길에 다다른 마흔. 속도를 줄이면서 지금의 나를 점검하고 이젠 어디로, 어떻게 달려갈지 저 멀리서 기다리고 있을 미래의 자신과 대화를 진지하게 나눠 보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시기다.

40대가 된 X세대입니다. 불혹의 나이에도 여전히 흔들리고, 애쓰며 사는 지금 40대의 고민을 씁니다.
태그:#낀40대, #40대백내장, #속도를줄이고쉴수있는용기, #다양한자아와상호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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