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8.21 11:15최종 업데이트 21.08.21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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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그라인더 ⓒ Artem_ka

 
17세기에 이르자 커피는 기독교 세계에서 공인된 음료가 되었다. 클레멘트 8세가 17세기 초에 기독교도들이 이슬람 음료인 커피 마시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지중해 연안 베네치아, 마르세유, 로마 등에서 커피가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17세기 중엽인 1650년을 전후하여 파리, 런던, 베네치아 등에 커피하우스들이 등장하여 성황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오랫동안 커피는 홍해 연안인 에티오피아와 예멘 지역에서만 재배되고, 이 지역의 대표적 무역항인 모카항에서만 수출이 이루어졌다. 당시 커피 생산을 독점한 것은 아랍인들이었고, 커피 무역을 독점한 것은 유대인들이 세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였다.


16세기 중반에 시작된 에티오피아와 예멘 지역에서의 인간에 의한 커피 경작은 커피 생산의 폭발적 증가를 가져왔다. 커피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예멘은 커피 재배가 타 지역으로 확장되는 것을 막기 위해 수출되는 모든 커피는 볶거나 끓이도록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실제 그랬을 가능성이 크지 않은 "황당무계한" 이야기라는 평이 많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당시 권력자들이 커피 유통을 독점하기 위해 무역업자들이 파종 가능한 커피 씨앗이나 이식 가능한 커피나무를 밀반출하다가 적발되는 경우에 벌금을 부과하였다는 사실이다. 밀반출을 막기 위해서 모든 수출용 커피는 발아 불가능한 상태로 가공된다는 소문을 퍼뜨렸을 수는 있다. 실제로 당시의 긴 수송 기간을 생각한다면 커피 소비지에서 수입 커피를 받은 후 일반적인 식물 씨앗처럼 발아를 시도했더라도 정상적인 발아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커피나무 이식 성공

비록 커피라는 새로운 음료에 관한 소식이 유럽에 전해지기는 하였지만 17세기 전반까지는 소비가 일부 지역과 일부 계층에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이 음료의 재료 공급을 독점하고 있는 예멘 모카항의 권위나 위상에 도전하고자 하는 노력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이 지역과의 무역을 위해 만들어진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관심을 두고 있던 1차 품목은 향신료들이었다.

유럽으로의 커피 무역을 시작한 것은 영국이었지만 17세기에 유럽 지역으로의 커피 무역을 독점하였던 것은 해상왕국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였다. 특히 유럽 지역에 커피하우스들이 문을 열 무렵인 1640년대부터 일정 기간 영국과 프랑스 지역에 커피 원두를 공급한 것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였다.

새로운 무역품 커피체리를 생산하는 커피나무를 에티오피아와 예멘을 넘어 다른 지역에 이식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17세기 내내 이루어졌다. 유대인들이 운영하던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이미 1616년 즈음에 커피나무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당시 예멘에서 무역업에 종사하고 있던 네덜란드인 피터 반 데어 브뤼케(Peter Van Der Brücke)는 커피나무를 몰래 숨겨서 암스테르담 국립식물원으로 옮기는 데 성공하였다. 이것이 네덜란드의 식민지로 편입된 실론(스리랑카의 옛 이름)과 자바로 옮겨지게 되었다. 실제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식민지였던 실론에 커피 농장을 최초로 세운 것은 1640년이었고, 이곳에서 첫 수확을 한 것은 1658년이었지만 품질이 좋지 않아 실패하였다.

한동안 정체를 보이던 커피나무 이식이 다시 시작된 것은 17세기 마지막 10년을 남겨 둔 1690년 즈음이었다. 네덜란드인에 의해 커피나무가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의 네덜란드 영사관 정원에 심어졌다. 1699년에는 처음으로 자바에서 커피를 성공적으로 수확하였다. 동방 무역의 확대로 향료의 희소성이 사라지면서 대체 물품을 찾는 자들의 눈에 커피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자본을 인간보다 귀하게 여기는 서구의 상인들이었다.

니콜라스 비첸

자바 커피 탄생을 주도한 인물은 니콜라스 비첸(Nicolaas Witsen, 1641~1717)이었다. 그는 자바의 바타비아에 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사장을 지낸 인물이었다. 여러 차례 실패를 거듭한 끝에 드디어 이 지역에서 생산한 커피를 1706년에 처음으로 암스테르담에 소개한 인물도 비첸이었다. 그때 그는 암스테르담의 시장이었다.

비첸은 흥미롭게도 한국과 인연이 있는 인물이다. 그는 암스테르담 시장을 수차례에 걸쳐 13년 동안이나 지냈던 성공한 정치인, 선박 건조 전문가 그리고 당시에 많지 않던 러시아 전문가였으며 지도 제작 전문가였다.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Czar Peter the Great)가 네덜란드에 유학 중이던 1697~1698년에는 그에게 조선 기술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그가 1690년에 완성한 시베리아 지도라고 할 수 있는 '타르타르 지도(Map of Tartary)에는 서쪽의 카스피해로부터 동쪽의 한반도(Corea)까지 나와 있다. 근대 이전 서양인들에게 타르타르(Tartars 혹은 Tartary)라는 표현은 중앙아시아 여러 유목민족을 통칭하는 말, 아니면 러시아에서 이슬람을 믿는 몽골·튀르크계 유목민을 합해서 부른 명칭이었다.

비첸은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그리고 동아시아에 관한 유럽 최초의 기록 <북부 및 동부 아시아 지리지 Noord en Oost Tartarye(North and East Tartary)>을 남긴 사람으로도 꽤 유명하다. 타르타르 지역 지도에 대한 해설서 성격인 이 책은 1692년에 초판이 그리고 1705년에 대폭 보완되어 제2판이 간행되었다.
 

비첸은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그리고 동아시아에 관한 유럽 최초의 기록 <북부 및 동부 아시아 지리지 Noord en Oost Tartarye(North and East Tartary)>을 남긴 사람으로도 꽤 유명하다. ⓒ Wikimedia Commons

 

당시 유럽인들에게 이용 가능한 모든 정보를 담아 동유럽, 북유럽, 아시아, 볼가강 유역, 크리미아반도, 코카서스 지역, 중앙아시아, 몽골, 티베트, 중국 그리고 한국과 일본 주변 지역을 설명하는 책이었다.

이 책에는 의외로 조선의 사회와 문화에 관한 설명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비첸이 어떻게 조선에 관한 정보를 얻었고, 이를 토대로 여러 페이지에 걸쳐 조선의 사회와 문화를 기술할 수 있었을까?

하멜과 함께 조선에 온 두 사람

정답은 하멜 일행이었다. 하멜과 함께 조선에 표류하였다가 13년 만인 1666년에 탈출하여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온 마테우스 에이보켄(Mattheus Eibokken)과 베네딕트 클럭(Benedictus Klerk)을 인터뷰 해서 얻은 정보들이었다.

클럭은 로테르담 출신으로 제주에 표류할 때 불과 열두 살이었다. 그의 관심은 주로 고래사냥이었고, 조선의 종교와 관습에 대해서도 조금 관심이 있는 정도였다. 에이보켄은 네덜란드 북서부의 작은 항구 엥크호이젠(Enkhuizen) 출신으로 출항 당시 외과 의사 견습생 겸 이발사였다. 18~19세 정도에 조선에 도착하였다. 기록을 보면 그는 조선에서 효종의 호위 무사로도 일을 하였고, 탈출 직전에는 하멜을 포함한 다른 일행과 함께 순천에서 거주하였다.

비첸은 이 두 사람을 만나 조선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정리하여 자신의 책 내용에 포함한 것이다. 하멜은 초판이 간행된 1692년에 고향에서 사망하였다.
 

네덜란드 호린험에 세워져 있는 헨드릭 하멜의 동상. ⓒ wiki commons

 

한국의 음료를 소개하는 부분에서 소주(sakki로 표기)와 차(tea)를 만들어 마시는 풍습을 소개하면서도 피면접자 에이보켄이나 클럭 그리고 면접자 비첸이 이들 음료를 커피와 비유하지 않은 것을 보면 하멜이 네덜란드를 떠나 아시아로 향했던 당시나 인터뷰를 하던 1690년대까지도 커피는 암스테르담에서 일상적 음료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간 기착지인 자바 지역에서도 아직은 커피 재배가 본격화되기 이전이었다.

이 책에서 비첸은 143개의 한국어 단어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유럽에 소개된 가장 오래된 한국어 기록이다. 주로 에이보켄의 기억이 반영된 기록이다. 이 단어 목록에 보면 우선 숫자 표기가 나온다. 무역에 관심이 있었던 네덜란드인들의 관심을 보여 주는 측면이다.

일 단위, 십 단위, 백 단위, 천 단위까지의 발음은 지금과 유사하다. 그런데 만 단위는 억으로 표기한 것이 특이하다. 예컨대 1만은 irŏk, 5만은 oŏk으로 되어 있다. 숫자 이외의 단어 중에는 1월부터 12월까지의 명칭, 동서남북 등 방향, 각종 동물과 광물, 식재료와 일상 용품들이 많이 들어 있다. 사탕, 코끼리, 포도 등이 흥미롭다. 하멜 일행이 조선 체류 기간 주로 뱃사람과 같은 하층민들과 생활한 탓에 머리(Head)를 "대갈"로 표기한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유럽과 아시아 간 지식의 불균형

비첸의 이런 지적 호기심과 한국에 대한 이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대항해시대 이후 유럽인들과 아시아인들 사이에는 상대방에 대한 지식에서의 불균형이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비첸이 활동을 하던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에는 그 격차가 매우 컸다.

유럽에서는 코란, 유교 경전, 힌두교 경전이 여러 언어로 번역될 정도였지만 아시아인들은 여전히 유럽에 대한 지식의 확장에 무관심하였다. 유럽의 과학과 기계 장치에 대한 호기심은 있었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나 그들이 이룩한 정치와 문화적 성취에는 눈을 돌리지 않고 있었다. 비첸은 이런 시대적 특징을 상징하는 인물의 하나였다.

이렇게 한국과 간접적 인연이 있는 비첸이 커피나무의 동인도 전파와 자바 커피의 유럽 전파 주인공이라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1707년에 있었던 오스만터키에 의한 커피 수출 금지 조치는 유럽인들의 커피 이식 노력을 자극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네덜란드에 의해 자바 커피는 점차 재배 지역을 확대하였고, 이에 따라 수확량도 증가하였다. 모카커피를 대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토양과 기후가 다른 자바에서 나는 커피 맛은 모카커피와 달랐다. 모카커피에서 나는 초콜릿 단맛이 없었다. 모카커피에 익숙한 유럽인들의 기호에 맞추기 위해 커피에 처음으로 단맛이 나는 이물질을 섞기 시작하였다. 이후 모카커피는 초콜릿 단맛이 가미된 커피를 의미하게 되었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Antony Wild(2004). Coffee: A Dark History. New York: W. W. Norton & Company
Heinrich Jacob저, 남덕현 옮김(2006). 커피의 역사. 자연과 생태. 초판은 1934년 독일어.
Frits Vos(2002). Master Eibokken on Korea and Korean Language: Supplementary Remarks to Hamel’s Narrative. Transactions, Volume L, 1975. Korea Branch, Royal Asiatic Society.
Kenneth Pomeranz·Steven Topik(2003). 박광식 옮김, 《설탕, 커피 그리고 폭력》, 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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