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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동학농민혁명군을 추모하기 위해 백화산 자락에 세운 추모탑. 그 뒤로 보이는 바위가 교장바위다. 동학농민혁명군 추모탑 인근에 위치해 있어 동학 관련 기념사업회와 유족회 등은 '교장(絞杖)바위'라는 한자를 쓰고 있다.
▲ 충남 태안의 영산 백화산 동학농민혁명 추모탑과 위쪽에 있는 교장바위 태안동학농민혁명군을 추모하기 위해 백화산 자락에 세운 추모탑. 그 뒤로 보이는 바위가 교장바위다. 동학농민혁명군 추모탑 인근에 위치해 있어 동학 관련 기념사업회와 유족회 등은 "교장(絞杖)바위"라는 한자를 쓰고 있다.
ⓒ 김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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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는 역사적으로 상징성이 아주 많다. 위로 보이는 교장바위 혹은 교살바위는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처형당한 동학농민혁명군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다. 전국 최초로 민간인 단체가 자발적으로 추모탑을 건립하여 선열들을 추모하고 있다."

지난 7월 9일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위한 촉구 결의대회'가 열린 충남 태안군 태안읍 백화산 동학농민혁명 추모탑 앞에서 동학농민혁명태안군기념사업회(아래 기념사업회) 정용주 회장이 한 말이다. 

당시 정 회장은 "태안군은 북접의 기포지이자 동학농민혁명군이 배수의 진을 치고 최후의 항전을 치르면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곳"이라며 상징성을 부여했다.

그런데 최근 태안군 내에서는 정 회장이 언급한 교장바위의 유래를 두고 엇갈린 해석이 나오고 있다.

우선 기념사업회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동학농민군이 목을 졸려 죽임을 당하고 몽둥이로 맞아 죽었고, 무참하게 학살된 통한의 바위로 목을 졸라 죽인다는 '교살(絞殺)'과 몽둥이로 때려죽인다는 '장살(杖殺)'을 줄여 교장(絞杖)바위라고 이름 지어 현재까지 부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일부 향토사학자는 일제강점기 태안보통학교의 교장이었던 나카오 이따로(中尾猪太郞)에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바위 한쪽 구석에 그의 이름을 새겼다며, 학교장의 교장(校長)바위라고 주장하고 있다.

교장바위는 백화산의 참극  
  
동학농민혁명태안군기념사업회와 동학농민혁명태안군유족회, 충남동학농민혁명단체협의회 등은 지난 7월 9일 백화산 동학농민혁명 추모탑 앞에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위한 촉구 결의대회를 열었다.
▲ 동학농민혁명군 추모탑과 교장바위 동학농민혁명태안군기념사업회와 동학농민혁명태안군유족회, 충남동학농민혁명단체협의회 등은 지난 7월 9일 백화산 동학농민혁명 추모탑 앞에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위한 촉구 결의대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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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바위는 그 유래를 두고 여러 차례 입길에 올랐다. 기념사업회가 지난 2005년 4월 펴낸 <태안지역 갑오동학농민혁명 자료집>을 보면, 이들은 교장바위를 동학농민군과 관련한 역사까지 연계해 '백화산의 참극'이라 소개하고 있다. 그 내용을 그대로 옮겨보면 이렇다.
 
 "백화산 기슭에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무참하게 학살되어 천추의 한이 서린 유서 깊은 교장바위가 있다. 당시 이 끔찍하고 잔인한 학살행위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외세 일본군을 끌어들여 동족을 살육했다는 사실은 천인공노할 일이다. (중략)

특히 백화산 중턱에 있는 큰 바위(교장바위)에서는 동학농민군 수백 명을 붙잡아다가 10여 명씩 포승으로 한 줄씩 묶어 목을 졸라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죽였다. 눈알이 빠지고, 배가 터져 창자가 나오고, 목이 잘린 시체가 쌓이거나 여기저기 흩어졌다. 관군과 일본군들은 시체를 일일이 헤쳐 보면서 혹 산 사람이 있으면 확인 사살했다고 한다. (중략)

교장바위 부근은 도살장을 방불할 정도로 처참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중략) 그 당시 동학농민군들이 죽어가면서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는 소리가 산천이 진동했다고 한다. 비극적인 이 참살 장소인 바위를 교장바위라고 후손들은 전하고 있다.
 
태안군 소원면 모항리에 거주하는 송길성씨와 소설가 지요하씨 등도 동학농민군 연관성에 힘을 실었다. 

송길성씨는 "교장바위가 학교장의 교장(校長)바위라면 자라나는 세대들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참으로 우려된다"면서 "태안군민들이 이른바 교장바위라고 칭하는 바위는 그 명명을 해제하는 것이 마땅하고, 그 바위가 가지고 있던 본래 이름을 찾아 주던가 혹은 새로운 이름을 붙여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지요하씨는 한 걸음 더 들어갔다. 지씨는 1997년 출간한 <태안읍지>에 등장하는 향토사학자를 인용해 "그는 일본인 교장의 이름을 새긴 데서 '교장(校長)바위'가 생겼다고 했지만, 이후 자괴감이 든다며 입장을 바꿨다. 기록은 없지만, 동학농민혁명군 참살과 관련해 '교장(絞杖)바위'로 논증이나 유추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지씨는 또 "원래의 이름인 교장(絞杖)바위가 교장(校長)바위로 쉽게 바뀐 것은 일제식민지 시절의 사회 분위기도 일정 부분 작용했다"며 "백화산 기슭에 태안초등학교가 자리 잡은 것도 한몫했다"고 덧붙였다. 

일본인 학교장의 교장바위는 어디서 유래됐나

 
일본인 교장의 비석이 새겨진 교장바위. 일부 향토사학자는 일본인 교장의 비석을 근거로 교장바위의 한자를 '교장(校長)바위'로 쓰고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 교장바위에 새겨진 일본인 교장의 비석 일본인 교장의 비석이 새겨진 교장바위. 일부 향토사학자는 일본인 교장의 비석을 근거로 교장바위의 한자를 "교장(校長)바위"로 쓰고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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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교장의 비석 흔적이 남아있다.
▲ 이름이 훼손된 일본인 교장 비석 일본인 교장의 비석 흔적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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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일본인 학교장에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교장(校長)바위로 명명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동학 선양을 위한 스토리텔링도 중요하지만, 역사적 진의가 왜곡돼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들의 주장은 교장바위 인근에 일본인 교장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있고, 태안초등학교를 졸업한 졸업생과 일부 향토사학자들의 증언에 따른 데 있다. 문헌상의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태안초등학교 개교 100주년을 맞아 2013년 12월 발간된 <태안초등학교 개교 백년사>에서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향토사학자이면서 태안초등학교 21회 졸업생인 박국환 선생은 '모교는 그립다'에서 교장(校長)바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태안에는 조선 사람 부자들이 많았다. 동양척식이라는 주식회사가 조선 구석구석의 땅을 사들여서 우리 농민을 소작농으로 만들어 5할 타작제를 하고 조선은행, 금융조합을 만들어서 농민을 수탈하여 우리의 농민들은 살 수 없어 제 땅을 버리고 만주 땅으로 남부여대하여 고향을 등지게 된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일이다. 

이즈음 경의정 밑에서 장사하던 일인(高橋)이라는 자가 오만하고 성깔이 되먹지 못해 분노한 학생들 수십 명이 모여 그 자의 가게를 때려 부숴버렸다. 주재소(지서)의 순경들이 학생들을 모두 잡아들였고 이에 당황한 학부형과 학교의 교장이 풀어줄 것을 애걸하게 되었다. 

그때의 교장은 나카오 이따로(中尾猪太郞)이라는 분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교육 책임을 들어 사과하고 학생들과 함께 주재소 마룻바닥에서 자면서 취사도구를 가지고 학생들에게 식사를 지어 먹으며 풀어줄 것을 호소하여 학생들이 풀려났다.

그래서 태안사람들은 그 교장이 고마워서 바위 한쪽 구석에 그 일인 교장의 명자를 새겨 고마움을 표시하였던 것인데, 해방 후에 전부 깨어버렸다고 하니 안타깝다."

이와 함께 일부 향토사학자들은 훼손된 일본인 교장의 비석에 비추어 일제 흔적 지우기의 일환으로 '교장(校長)바위도 그 대상의 하나가 된 게 아니냐'는 주장도 펼치고 있다. 역사적 배경을 언급하며 기념사업회가 주장하는 교장(絞杖)바위를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한 향토사학자는 "동학농민군들이 도망쳐 왔을 때 당시 나무도 없던 백화산으로 숨어들어왔겠나. 도망가려면 관군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숲속으로 도망가지 않았겠나"라면서 "관군도 백화산까지 동학농민군들을 데리고 와서 죽였겠나. 그리고 교살, 장살은 있어도 교장살이라는 단어는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인사는 "교장(校長)바위를 가보면 알겠지만, 암벽 등반할 정도의 가파른 바위이다. 그곳에서 동학도들을 처형했다는 게 상식선에서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교장바위를 찾았던 누군가가 교장바위에서 밧줄을 묶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둥근 쇠고리가 바위에 박혀 있는 것을 봤다고 했는데 실제 확인되지 않고 있다"면서 "존재한다고 해도 그 둥근 쇠고리가 동학도 처형을 위해 줄을 매달기 위해 설치한 것인지 확정할 수 없고, 다른 용도로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의견을 피력했다.

교장바위 유래를 두고 이처럼 엇갈린 해석이 분분한 가운데 태안군은 교장바위의 정확한 유래를 찾기 위한 학술용역에 들어갔다. 태안군 관계자는 "군에서 교장바위와 관련한 학술용역을 백제고도문화재단에 지난 7월 20일에 의뢰했다"면서 "학술용역 착수계를 제출한 상황으로, 교장바위의 확실한 유래를 찾아 논란을 일단락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번 학술용역을 통해 지난 수년간 논란이 된 교장바위의 진위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덧붙이는 글 | 태안신문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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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의 지역신문인 태안신문 기자입니다.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밝은 빛이 되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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