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7.27 13:01최종 업데이트 21.07.27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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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림이 26일 일본 도쿄 지요다구 무도관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유도 남자 73kg급 시상식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고 있다. 2021.7.26 ⓒ 연합뉴스

 
재일한국인 3세 안창림 선수가 도쿄올림픽 남자유도 73kg급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1994년 생으로 만 27세인 안창림은 닛폰부도칸(일본무도관)에서 열린 3·4위전에서 아제르바이잔의 루스탐 오루조프 선수와 겨뤄서 메달을 차지했다.

닛폰부도칸은 쓰쿠바대학 2학년 때인 2013년에 안창림이 전일본학생선수권대회 챔피언이 된 곳이다. 그 뒤 일본유도연맹의 귀화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한 그가 바로 그 닛폰부도칸에서 태극 마크를 달고 메달을 획득했다.


안창림의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건너갔다. 할아버지가 정착한 곳은 도쿄와 일본 본토 최남단의 중간쯤인 교토다. 여기서 성장한 안창림은 가라테 도장을 운영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초등학교 3학년 때 유도를 시작했다. 일본유도연맹의 귀화 제의를 받을 정도로 이 분야에서 성공을 거뒀지만, '한국 사람이라면 태극 마크를 달아야 한다'며 그는 귀화를 거부하고 있다.

안창림과 흡사한 사례가 57년 전의 도쿄올림픽 때도 있었다. 1964년 도쿄올림픽 때는 김의태 선수의 사연이 한국인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1964년의 안창림' 김의태

교토에서 자동차도로로 남서쪽 75km 떨어진 고베시에서 1941년 출생한 김의태는 아버지 때 일본에 정착한 재일한국인 2세다. 그의 아버지 김길룡은 가난 때문에 도저히 살 수 없어 1926년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갔다. 김길룡은 일본에 살면서도 창씨개명을 끝끝내 거부했다.

아들 김의태도 일본의 귀화 요구를 거절했다. 21세 때인 1962년 파리에서 열린 제3회 세계선수권대회에서 3위를 기록했기 때문에 귀화 요구가 거셀 수밖에 없었지만, 일절 호응하지 않았다. 1963년 12월 10일자 <동아일보> 기사 '이 해의 스포츠 (4) 유도'는 "재일교포 김의태 선수가 일본 귀화에의 유혹을 받으면서도 오직 나의 조국은 한국이라고 고집하면서 귀화를 거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1966년 5월 18일자 신문에 실린 김의태 선수의 사진. ⓒ 동아일보

 
결국 그는 한국 국가대표가 되어 57년 전 도쿄 올림픽에 출전했고, 유도 중량급에서 타이완(대만·자유중국)·베트남·브라질 선수 등과 겨뤄 동메달을 획득했다. 안창림 선수와 여러 모로 비슷한 선수였다. 안창림은 '2021년판 김의태'이고, 김의태는 '1964년판 안창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66년 5월 18일자 <동아일보> '입경한 김의태 선수'는 "수많은 교포 선수 중 일본인이 귀화를 거의 강요하다시피 한 것이 유도의 김의태와 프로야구의 장훈 두 선수"라면서 "이들은 한결같이 일본에의 귀화를 거부하고 모든 핸디캡을 감수하여 가며 한민족의 얼을 고수한 체육인"이라고 평가했다.

부득이 귀화를 선택한 한국인들도 물론 적지 않다. 한·일 국교정상화 3개월 보름 전인 1965년 3월 3일 발행된 <경향신문> '한일교섭 막바지에서 보는 일본 안의 한국'은 재일한국인 인구가 60만이라고 한 뒤 "일본정부 당국에서는 귀화한 한국인의 수를 밝힐 것을 극히 꺼리고 있지만, 단편적으로 입수된 숫자는 52년 4월 28일부터 57년 12월말까지의 5년 7개월 동안에 2만 9576명이며, 61년 5월 1일부터 63년 4월 말까지의 2개년 동안에 5300여 명"이라고 보도했다.

이렇게 일부 동포들이 조금이라도 차별을 덜 받고자 일본 국적을 선택하는 속에서도, 대다수 동포들은 귀화를 한사코 꺼렸다. 스포츠를 비롯해 국가권력의 협조나 지원이 특히 절실한 분야에 종사하는 한국인들도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일본 국적을 거부했다.

일본 귀화를 거부한 재일한국인들

3085안타라는 대기록을 수립한 장훈 선수의 사연은 잘 알려져 있다. 그도 한때는 귀화를 고려했다. 오랜 차별에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겪은 차별의 일부를 1974년 10월 13일자 <조선일보> '한국인으로 살아가겠다 - 장훈 선수, 조국의 품 선택하기까지'는 이렇게 소개한다.
 
장 선수는 18세의 나이에 일본 프로야구에 입단했을 때 처음(에는) 아무도 그에게 배팅볼을 던져주지 않았고 그의 배트를 불태우고 글로브를 감추는 등 숱한 고난을 당했던 사실을 회상했다. 그의 일본 이름인 하리모도(張本)는 '무법자', '폭력배'의 대명사처럼 일본에서 쓰이고 있다고 전한 장 선수는 '내가 그렇게 악착같이 하지 않으면 일본 야구계에서 나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지난날을 되새겼다.
 
장훈이 차별을 이겨내고 훌륭한 선수로 성장하자 일본은 귀화를 요구했다. 요구가 거세지자 그도 잠시 흔들렸다. 위 기사는 "일본 팬과 매스컴의 야유, 가네다 감독 등 귀화한 한국인 동포의 냉대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해 일본 귀화를 고려"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결국 마음을 굳혔다. "장훈은 영원히 한국인이기를 결심했다"며 "한때나마 귀화를 생각했던 자신이 부끄럽다고 말했다"고 위 기사는 전한다.

농구선수 조영자의 사연도 이 시기에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 역시 귀화 요구를 받았지만 끝까지 거부했다. 이로 인해 소속팀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1970년 8월 19일자 <조선일보> '귀화 강요로 퇴사, 일(日) 농구선수 조양'은 "조영자(21, 일본명 이와모도 에이꼬)가 국적 관계로 20일 소속팀 유니치카야마자끼 회사를 퇴사한다"며 이렇게 보도했다.
 
조양은 작년도 일본 리그에서 최우수선수로 선발된 뒤 회사 측으로부터 일본으로 귀화할 것을 요구받았으나, 조 선수의 가족이 반대하여 지난 5월부터 출전을 중지하고 있었다.
 

안창림이 26일 일본 도쿄 지요다구 무도관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유도 남자 73kg급 동메달 결정전에서 루스탐 오루조프(아제르바이잔)를 상대하고 있다. ⓒ 연합뉴스

 
비슷한 사연은 여타 분야에도 많았다. 법조계에 진출했다가 귀화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채용을 거절당한 사례도 있었다. 1976년 12월 1일자 <조선일보> '사법고시 합격 재일동포 법학도, 일(日) 귀화 않는다고 채용 거절'은 "한국 국적을 가진 재일교포의 한 법학도가 어려운 난관을 뚫고 일본 사법국가고시에 합격, 변호사를 지망했으나 일본에 귀화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법수습성 채용을 거절"당했다고 한 뒤 이렇게 보도했다.
 
김경득 씨(27, 동경 신숙구 변천정)는 지난 10월 9일 50 대 1이 넘는 일본 사법시험 제2차 시험에까지 합격, 내년도 사법수습생 채용 신청을 최고재판소에 제출했으나 거절당했다. 최고재판소는 거절 이유로 '사법수습생 채용 결정 시까지 일본에 귀화하겠다는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신청 서류를 수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일본은 재일한국인들을 모질게 차별하면서도 김의태·장훈·조영자·김경득과 안창림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태도를 달리했다.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재일한국인들은 어떻게든 일본인으로 만들려 했다. 위의 '한일교섭 막바지에서 보는 일본 안의 한국' 기사는 "일본 정부는 교포들 가운데서 쓸모 있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일본인으로의 귀화를 권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이 귀화를 거부하는 이유 

가장 바람직한 것은 해외동포들이 현지 국적을 갖고 현지 문화에 정착하면서 모국과 교류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해외동포와 자손들은 물론이고 모국과 현지 국가의 관계에도 유리하다.

그런데도 상당수의 재일한국인들이 귀화 요구를 거부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일본 사회에 대한 동화를 꺼리도록 만드는 조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993년 6월 8일자 <한겨레>에 보도된 재일한국인 사업가의 발언이 그런 사정을 반영한다. '재일동포 그 격동의 현주소 (6) 귀화'에 그 사업가의 사연이 소개돼 있다.
 
무역업을 하는 40대의 한 재일동포가 몇 해 전 미국에 출장을 갔다가 변호사를 하는 한국계 여성을 만났다. 한국계 2세인 그 변호사는 자신이 미국에서 전문인으로 자리 잡게 된 과정을 자랑스럽게 얘기하면서 '왜 재일동포들은 일본에 빨리 귀화해서 적극적으로 사회에 진출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 질문에 분노를 느낀 재일동포는 태평양전쟁 종전 뒤 일본에 남게 된 동포와 자발적으로 본국을 떠나 미국에 정착한 동포의 역사적 배경의 차이, 소수민족에 대한 일본과 미국의 정책 차이 등을 들어 반박하려 했다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알아듣지 못할 것으로 생각해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간 한국인들은 제국주의 경제정책 때문에 더 이상 고향에 살 수 없게 됐거나 강제징용 등의 이유로 끌려간 사람들이다. 설령 자기 발로 걸어서 갔다 해도, 일본제국주의가 그렇게 만든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끌려간 거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일본 국적을 갖고 싶어 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거기다가 일본이 한국인들을 혹독하게 차별하는 것은 물론이고 1923년 간토대지진(관동대지진) 때처럼 무슨 일만 생기면 한국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해를 입히곤 했으니, 재일한국인들의 눈에 일본이 어떤 나라로 비칠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 일본이 성공한 한국인들을 찾아다니며 귀화를 권유 혹은 강요했으니, 위의 '일본 안의 한국' 기사에 표현된 것처럼 '쓸모 있는 한국인만 찾아다니며 귀화를 권유한다'는 인식이 생길 만도 했던 것이다.

귀화 요구를 받은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함께 고생하던 동포들과의 관계도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될 수밖에 없다. 조영자 선수의 가족이 귀화를 반대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본 안의 한국' 기사는 "재일교포들의 일본에서의 사회적인 위치는 식민정책에 의해 강제이주되었던 기본적인 요인 때문에 아직도 외국인 아닌 타국인 대우를 받고 있다"고 말한다. 재일한국인들을 일본국민도 외국인도 아닌 '타국인'으로 대하며 차별하는 일본의 태도를 그 기사는 그렇게 표현했다.

지금 일본이 해야 할 것은 성공한 한국인들에게 국적 변경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재일한국인에 대한 대우를 전반적으로 개선하는 것이다. 한국인을 타국인으로 대우하는 종전의 정책을 폐기하는 것이 급선무다.

미국인과 영국인을 대하듯이 재일한국인을 외국인으로 대우해준다면, 귀화 요구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응도 훨씬 자연스러워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향후 있을지 모르는 세 번째 도쿄올림픽에서 '김의태', '안창림'이 또다시 배출되지 않도록 하려면, 재일한국인들을 최소한 외국인 손님으로라도 대우해주는 변화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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