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7.27 11:41최종 업데이트 21.07.27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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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는 안산 여자 양궁대표 안산이 25일 일본 유메노시마 공원 양궁장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여자 양궁 단체전 경기에서 활을 쏘고 있다. ⓒ 연합뉴스

   
2000년대 초 대한민국에 골프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장본인 박세리는 수 십 년이 지난 2021년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한 가지를 고백했다. "치마를 안 입는다고 난리를 쳤었다"라고. 짧은 치마로 되어 있는 골프 유니폼을 입어야 했던 박세리는 생전 치마를 입어본 적이 없었다. "치마를 입어본 적이 없으니 앉지도 서지도 못했다. 안절부절 못했었다." 그는 그때의 기억을 이렇게 말했다.

박세리가 은퇴한 후 5년이 지났다. 그가 처음 치마 유니폼을 입어야 했을 때부터 환산하자면 20년도 훌쩍 넘었다. 20년이 지난 세월 이후에도 비슷한 고충을 경험하는 스포츠 선수들은 생겨났다. 얼마 전, 유럽 비치핸드볼 선수권 대회에서 발생한 문제도 비슷하다. 노르웨이 비치핸드볼 여자대표팀이 비키니 대신 반바지를 입어 벌금을 받은 것이다.


노르웨이 여자대표팀 선수들은 "비키니 하의가 노출이 심하고 유니폼이 불필요하게 성적인 느낌을 준다. 특히 생리할 때 불편하다"라고 반바지를 입은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유로 2021 비치핸드볼 징계위원회는 결국 이러한 복장이 "규정 위반"이라고 주장하며 노르웨이 여자대표팀에게 벌금을 부과했다. 그들이 반바지를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벌금을 부과받을 때, 같은 종목에 뛰는 남자 선수들은 헐렁한 바지에 헐렁한 나시를 입고 경기를 이어나갔다.

'치마'는 '인간 박세리' 대신 골프를 쳐주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비키니는 비치 핸드볼 선수들 대신 경기를 뛰어주지 않았다. 필드에서 승리를 위해 뛰는 선수들에게 치마나 짧은 비키니는 걸리적거리고 불편한 천 쪼가리에 불과했다. 박세리를 골프계의 신화로 만든 것은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뛰었던 시간이지, 옷이라는 천 쪼가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도 사회는 여성 선수들에게 필드에서 '선수' 대신 '여성'으로 보이기를 강요한다. 마치 선수의 얼굴과 유니폼이 선수 대신 스포츠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치마는 골프를 대신 쳐주지 않는다
 

MBC '쓰리박 : 두 번째 심장' 방송화면 갈무리 ⓒ MBC

 
이러한 기이한 현상은 2021년 도쿄 올림픽에서도 어김없이 재현되었다. 지난날의 일들과 좀 다른 점은 머리카락 길이가 사상검증의 잣대로까지 발전했다는 점이었다. 세계 최강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대한민국의 주력 종목인 여자 양궁 경기에서 한 선수가 숏컷을 하고 경기장에 입장하자마자 우스꽝스러운 논쟁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묻기 시작했다.

"쟤 페미 아니야?"

비슷하게 머리가 짧은 사격 국가대표 박희문 선수에게도 비슷한 댓글들이 달렸다.

"숏컷하면 다 페미임"
"여자 숏컷은 걸러야됨 ㅋㅋㅋ 그래도 국대니까 봐줌"

마치 이 사회가 페미니스트들과 숏컷을 한 여성을 모두 나쁜 사람들이라 합의한 것 같은 댓글들이었다.

그런데 사실 여성 스포츠 선수들은 잘 꾸며도 욕을 먹었다. 경기장 위에 올라와 미디어에 노출되는 순간, 여성 스포츠 선수들은 "예쁘다"라는 말을 칭찬으로 들었고, 경기에서 진 순간 "외모 꾸밀 시간에 노력이나 해라"라는 말을 들었다. 하다못해 올림픽 중계까지도 "미녀 검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얼평'을 한다.

꾸미면 꾸민 대로, 꾸미지 않으면 꾸미지 않는 대로 여성 선수들은 욕을 먹었다. 여성의 꾸밈을 강요하는 각종 규제는 덤이다. 외부에 노출되는 모든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적인 시선이 스포츠에도 고스란히 적용되고 있다. 화장은 예의라서 무조건 해야 하지만 꾸민 듯 안 꾸민 듯 자연스러워야하며, 적절히 '여성스러워' 보여야 하지만 지나치게 멋을 부리면 안 된다는 기준. 사실 그 기준을 통과할 수 있는 여성은 많지 않았다.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운 합격 기준은 여성이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기분이 쥐고 있는 탓이었다.

여성_쇼트컷_캠페인
 

안산 선수가 페미라고 주장하는 인터넷 게시판 유저 ⓒ 신민주

 
안산 선수가 진짜 페미인지, 페미가 아닌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안산 선수가 밝혀야 할 필요도 없다. 그는 정말로 숏컷이 편해서 선택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설령 그가 "페미"라 밝혀도 욕을 먹어서는 안 된다.

2015년, 인생 최초로 숏컷을 선택했을 때 나도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을 끊임없이 들었다. 심지어 숏컷을 자르러 들어간 미용실에서도 "혹시 남자친구와 헤어져서 머리를 자르시나요?", "여자 분들은 머리가 너무 짧으면 별로인데 진짜 자를 건가요?"라는 질문을 들어야했다. 그 미용실은 원하는 길이로 머리를 잘라주지도 않았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수많은 남자들의 머리만큼 짧은 길이의 머리를 하고 싶었지만 미용실은 애매하게 긴 '여성용 숏컷'을 해주었다. 도대체 머리카락이 뭐길래.

'탈코르셋'이라는 단어조차 없던 시기에 머리를 자른 이유는 더웠기 때문이었다. 무더위가 계속되고, 찰랑거리는 단발머리는 묶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막상 머리를 자르고 나니 많은 것이 바뀌었다. 내가 생각보다 짧은 머리가 잘 어울린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편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한편으로, 여자가 짧은 머리를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머리를 하고 나니 여러 가지가 의심스러웠다. 내가 화장을 하는 것을 진짜 좋아하는지, 내가 브래지어를 하는 것을 진짜 좋아하는지, 내가 딱 붙는 옷을 입는 것을 진짜 좋아하는지. 그러다가 화장을 하는 것을 멈추었다. 브래지어도 하지 않았다. 더운 여름 딱 붙고 작은 옷들이 아니라 헐렁하고 시원한 소재의 옷들을 더 많이 입기 시작했다.

안산 선수가 사상 검증을 당하고 있을 때, 수많은 여성들이 SNS에 자신의 숏컷 사진을 올리며 여성_쇼트컷_캠페인에 동참했다. 그들은 아마 안산 선수가 당한 사상 검증이 그리 낯설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회에 통용되는 단 하나의 미의 기준을 거부한 수많은 여성들에게 늘 사상 검증은 뒤따라왔기 때문이다. 나도 그들과 함께 숏컷을 한 셀카 사진을 SNS에 남겼다.

안산 선수와 연대한 6000명이 넘는 '숏컷 여성'들이 있었기에 이 이야기의 결말은 스포츠라는 범주를 넘을 수 있었다. 사상 검증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모든 여성들의 얼굴과 신체가 평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를 오랫동안 좋아하게 될 것 같다. '얼평'보다는 '페미'라는 딱지가 나에게는 좀 더 영광스럽다. 페미든, 페미가 아니든 더 많은 여성들이 사회적 미의 기준에 맞추어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멋대로 사는 세상이 더 아름답기도 하다.

더운 여름날, 용기내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시원하게 숏컷을 시도해볼 것을 권한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머리카락은 곧 자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한 번의 시도는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을 고민해볼 수 있는 계기를 열어줄 수도 있다. 꾸미든 꾸미지 않든, 스포츠에서도 사회에서도 여성이 존중받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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