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019년 6월 14일, 백기완 선생은 금속노조, 공공운수노조, 현대자동차지부가 주최한 ‘승용차 기증식’ 행사장 앞에서 김병기 기자를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다.
 2019년 6월 14일, 백기완 선생은 금속노조, 공공운수노조, 현대자동차지부가 주최한 ‘승용차 기증식’ 행사장 앞에서 김병기 기자를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사진 속 그가 크게 웃었다. 2019년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 들어가기 전, 고 백기완 선생과 함께 찍은 마지막 사진이다. 병원에 계실 때 두 번 더 찾아뵈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병실 문을 나서 혜화동 통일문제연구소 방문을 열었더니 책상 위에 놓인 원고지와 안경이 눈에 박혔다. 길거리에서 백발의 갈깃머리 휘날리며 포효하듯 외쳤던 말과 글의 흔적이다.

그 자리에서였다. 선생님은 대거리를 하다가도 외래어나 외국어를 쓰면 말을 끊고 타박했다. 

"그런데 말이야, 젊은이. 세월은 우리말로 '달구름'이야. 지구는 '땅별'이지. 대체 오마이뉴스가 뭐야? '오! 나의 새뜸(소식)'으로 바꿔! 안 바꿔? 그럼 다시는 나 보러 올 생각하지 마!"  

[버선발] 순도 100% 우리말 책, 가능했다
 
통일문제연구소 출범 50주년 기념 및 고 백기완 선생 87년 인생의 바라지(중심)이자 민중사상의 원형 '버선발 이야기' 출간 이야기 한마당이 지난 2019년 4월 23일 오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렸다.
 통일문제연구소 출범 50주년 기념 및 고 백기완 선생 87년 인생의 바라지(중심)이자 민중사상의 원형 "버선발 이야기" 출간 이야기 한마당이 지난 2019년 4월 23일 오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렸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우리말 천태만상' 기획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인물은 백기완 선생님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2018년 여름 선생님께서 대학로 학림다방으로 나를 호출했다. 창가 자리, 학림다방 이충열 대표가 배려한 고정석에 앉아 계셨다. 두툼한 서류봉투를 테이블 위에 놓고 입을 뗐다. 

"자, 이거 읽어봐. 처음 보여주는 거야. 읽고 소감을 말해줘. 안 읽으면 총살감이야! 하-하."

서류봉투에서 A4용지로 정리한 원고의 첫 장에는 '버선발 이야기'라고 적혀 있었다. 버선발이 주인공이었다. 맨발, 즉 '벗은 발'을 뜻했다. 그 자리에서 첫 장을 읽었다.
 
썰렁하게 빈 방, 거기에 아무렇게나 쌓아둔 조짚 낟가리 같다고나 할까. 그렇게 납작납작 엎드린 집들이 즐비한 마을을 지나고 또 지나고 나서도 한참을 가파른 골짝으로 꺾어 들면 갑자기 무지 높다란 바윗돌, 그 외로운 그림자만을 이웃으로 한 코촉집(방이 하나뿐인 집) 하나가 느닷없이 불쑥한다.

오래된 문투였지만 고리타분한 게 아니라 신선했다. 홍명희 작가 '임꺽정'을 처음 읽었을 때가 생각났다. 낯선 말이 곳곳에 등장했지만,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입말체는 싱싱하고 구수하며 감칠맛까지 돌았다. 한 단어, 한 문장에서도 삶의 정서가 우러나왔다. 생경한 능동태는 글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것만은 아니었다. 
  
"영어는 물론, 한자도 없어. 순우리말로만 쓴 글이야." 

순도 100% 우리말로 엮은 책. 이게 가능할까? 세 번을 읽었고 매번 짧은 독후감을 선생님께 전했다. 영어는 물론 일본어 표기, 그 흔한 한자어도 보이지 않았다. 백 선생님의 마지막 책인 <버선발 이야기>(2019년 3월 오마이북 출간)를 세상에 내놓은 까닭이 있었다. 학림다방에서 마지막 독후감을 전할 때, 백 선생님이 힘주어 말했다. 

"우리말(토박이말)이 영어에 묻혀 없어지는 것은 인류 문화를 죽이는 일이야. 무지랭이들의 말에는 민중들의 삶과 사상이 담겨 있어서 그래. 이 책을 낸 것은..."  

[불통의 언어] 비치코밍? 워케이션? 슬리포노믹스?

하지만 우리말을 둘러싼 상황은 백 선생님의 뜻과는 달랐다.      

- 부산 해운대서 비치코밍 페스티벌
- 공정위·소비자원 '홈코노미 제품 어린이 안전사고 주의'
- '워케이션 참여하세요' 하동군, 경남형 한 달 살이 시행
- 대구광역시, '대구 침장 특화산업 육성 슬리포노믹스 선도한다'

위의 기사 제목을 보면 말의 정신까지 찾을 겨를이 없다. 소통조차 어렵다. 국민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면서 뜻 모를 외국어를 그대로 쓴 언론도 문제지만, 영어사전에도 없는 표어를 남발하는 공공기관의 책임도 크다. 국민 세금으로 벌인 사업인데, 국민들이 알기 힘든 말로 참여를 독려하는 경우도 많았다.  

2019년 서울시 공공언어사용 실태 결과, 200개의 보도자료 중에서 외국어 남용으로 볼 수 있는 용어는 총 685개로, 조사 대상 전체 용어의 83%였다. 2020년 문화체육관광부는 외국어 표현 3500개를 선정해 국민들의 이해 정도를 조사한 결과, 응답자 60% 이상이 이해하는 단어는 30.8%였다. 70세 이상은 6.9%만 이해했다. 

[백기완] 빈 땅에 콩을 심듯 한 글자, 한 글자 
 
통일문제연구소 백기완 선생님의 책상 위에 놓여있던 원고지와 안경
 통일문제연구소 백기완 선생님의 책상 위에 놓여있던 원고지와 안경
ⓒ 김병기

관련사진보기

 
<버선발 이야기>의 맨 첫 장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백기완 선생님은 '글쓴이의 한마디'에 순우리말로 책을 펴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이 이야기엔 한자어와 영어를 한마디도 안 쓴 까닭이 있다. 그 옛날 글을 모르던 우리들의 어머니 아버지, 니나(민중)들은 제 뜻을 내둘(표현)할 때 먼 나라 사람들의 낱말을 썼을까. 마띵쇠(결코) 안 썼으니 나도 그 뜻을 따른 것뿐이니 우리 낱말이라 어렵다고 하지 마시고 찬찬히 한 글자 한 글자 빈 땅에 콩을 심듯 새겨서 읽어주시면 어떨까요.

민중들의 정서와 사상이 우리말(토박이말)과 함께 사라지고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담겨 있다. 이런 백 선생님은 스무 살이던 1951년에 부산 중앙일보에 "한국이 낳은 수재 '매시간 영어단어 백자를 암송'"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났을 정도로 '영어 천재'였다. 이 때문에 '해외유학장려회'의 제1호 유학생으로 권유를 받기도 했지만, 거절했다.  

그 뒤 서울 남산 및 후암동 산기슭에 천막을 쳐놓고 도시빈민운동을 벌이면서 '달동네 새뜸(소식)'이라는 소식지를 만들어 배포했다. 당시 '하꼬방'이 아니라 '달동네'라는 표현을 썼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2001년에는 '새내기' '달동네' '모꼬지' '동아리' 등과 같은 우리말을 널리 퍼트린 공로를 인정받아 '우리말 살리는 겨레모임'이 주관한 올해의 '우리말 으뜸 지킴이'로 선정되기도 했다.
    
최근 국립국어원이 만드는 새말은 백 선생님이 펴낸 '버선발 이야기'처럼 순도 100%의 토박이말이나 우리 고유어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적어도 공공언어는 국민들이 소통할 수 있는 어휘를 사용해야 한다는 취지다. 위에서 예로 들었던 공공기관과 언론매체의 외국어 표현을 국립국어원이 다듬은 '새말'로 한번 바꿔보자.

- 부산 해운대서 해변정화(비치코밍) 축제(페스티벌)
- 공정위·소비자원 '재택 경제 활동(홈코노미) 제품 어린이 안전사고 주의'
- '휴가지 원격 근무(워케이션) 참여하세요' 하동군, 경남형 한 달 살이 시행
- 대구광역시, '대구 침장 특화산업 육성 숙면산업(슬리포노믹스) 선도한다'

이 정도라면 우리말을 지키려고 일제 탄압에 맞섰던 구국의 결단을 요구하는 건 아니다. 더군다나 국립국어원이나 전국국어문화원연합회, 한글문화연대 등이 공무원과 기자들을 대신해 우리말을 다듬고 있다. 각 기관 누리집에 들어가서 확인할 약간의 시간과 품만 들이면 된다. 외국어를 배척하자는 게 아니라 최소화하면서 되도록 우리말로 고쳐 쓰자는 것이다. 

'우리말 천태만상' 기획에 들어가며 백기완 선생님의 얼굴을 떠올린 이유이다. 

버선발 이야기 - 땀, 눈물, 희망을 빼앗긴 민중들의 한바탕

백기완 지음, 오마이북(2019)


태그:#우리말, #천태만상, #세종국어문화원, #새말, #공공언어
댓글6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환경과 사람에 관심이 많은 오마이뉴스 기자입니다. 10만인클럽에 가입해서 응원해주세요^^ http://omn.kr/acj7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