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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 기사 조선의 명운을 짊어진 최초의 방미사절단에서 이어집니다.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것은 1492년 10월 12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이 아메리카를 발견한 것은 콜럼버스가 발견한 지 390년 쯤 후인 1883년 9월 2일이었습니다.

콜럼버스는 오늘날의 바하마 제도의 한 섬에 발을 디뎠지만 조선인들은 샌프란시스코에 첫 발을 디뎠지요. 만일 그때 조선인들이 옛날 콜럼버스와 같은 행동을 했다면, 어떤 광경이 벌어졌을까요? 콜럼버스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은 기도를 하고 성호를 긋고 섬에 산살바도르San Salvador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땅을 스페인 영토로 선포한 거였지요.

그 섬은 원주민들이 대대로 과나하니Guanahani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콜럼버스에게는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었지요. 만일 조선선비들이 콜럼버스를 따라 했더라면  '샌프란시스코' 같은 건 무시해버리고 그곳을 '이순신항'이나 '신제물포' 같은 이름을 새로 붙였을까요?

두 경우가 전혀 다른 맥락속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이런 의문 자체가 넌센스이지만, 어떤 경우가 되었든 염치를 아는 조선 선비들이 콜럼버스처럼 행동하지는 않았겠지요. 

하지만 1883년 9월 2일(일요일) 조선인들이 단군이래 처음으로 미국땅과 그 사람들을 발견한 사실은 부인할 수 없겠습니다. '발견'이 우리 서양인만의 전유물은 아닐테니까요. 이제 조선인들이 미국에서 무엇을 발견했는지, 또 거꾸로 미국인들은 그들에게서 무엇을 발견했는지를 되살려 보려 합니다.

열명이 넘는 조선사절단이 샌프란시크코에 입항했을 때에 그들은 세관 통과를 걱정했을 겁니다. 사절단의 주요 인물들은 해외 여행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들은 꽤 많은 수하물을 가져갔지요. 각자 몇 벌씩의 옷을 가져갔고 먹과 벼루, 종이, 부채 같은 것도 가져갔고 도자기와 홍삼 같은 것도 가져갔으니까요. 통관이 까다롭지 않을까? 세금을 내라고 하면 어쩌지? 걱정했다면 그건 기우였습니다. 자유통과의 특혜를 받았으니까요.

얼마 전에 프릴링하이젠Frelinghuyesen 국무장관이 재무장관에게 조선 사절단에 대하여 최고의 예우로써 무관세통관조치를 요청했고, 그에 따라 재무장관이 샌프란시스코 세관장에게 특별지시를 내렸었지요.

항구에는 육군 소장 스코필드John M. Schofield 장군이 영접을 나와 안내했습니다. 조선사절단은 자신들을 이처럼 정중히 대해주는 미국인들에게 감사하면서 시내 숙소로 향했지요. 멋진 집들, 시가전차, 남녀가 밝은 표정으로 걷는 모습, 화려한 상가 등 여러 풍물을 보며 조선인들은 눈을 크게 떴습니다.

하지만 정작 놀라운 광경은 호텔이었습니다. 지은 지 8년 된 9층짜리로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어머어마한 규모의 팰리스Palace Hotel이었습니다. 우아한 장식이나 화려한 가구도 놀라왔지만 호텔 접견실에 멋지게 옷을 차려입은 남녀가 앉아서 천연덕스럽게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야말로 놀라웠습니다. 어찌 이럴 수가....
 
1875년 신축
▲ 샌프란시스코 팰리스 호텔 1875년 신축
ⓒ 공개된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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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들이 미국인에 놀랐다면 우리 미국인들도 조선인들에 놀랐습니다. 그들의 패션 때문이었죠.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모두가 환성 그 자체였습니다. 모자부터 신기했습니다. 대나무대를 비단실과 말총으로 촘촘히 엮어짠 것인데 하늘이 비치는 투명체였습니다.

그 안을 들여다 본 사람이 있다면 또한 번 놀랐을 겁니다. 마치 젤리 깡톨처럼 생긴 탕건이라는 것이 있고 그 안에 또 호박琥珀이 달린 망건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죠. 망건안에는 상투라는 것이 틀어져 있었으니까요.

의상이야말로 환상 그 자체였습니다. 겉에는 흰색 비단 두루마기를 자르르 걸치고 있었죠. 조선인들은 그걸 도포라고 불렀지요. 아닌 게 아니라 딱 도인 패션이죠. 발목에는 대님을 매고 버선을 신고 있었고 신발은 가죽으로 만든 중국풍이었습니다.

공식행사때나 방문객을 맞을 때에는 전혀 다른 의상을 차려 입습니다, 사모관대 차림의 관복이었지요. 최고급 비단 옷으로 청.홍.백.흑의 색깔과 그림이 예술 그 자체였지요. 조선인의 패션은 가는 곳마다 센세이션을 일으키게 될 겁니다.

하지만 유력한 미국인들이 타는 듯한 눈빛으로 조선과 조선인들에게 관심을 쏟는 부분은 따로 있었습니다. 경제적 실리였지요. 구체적으로 통상, 자원, 이권이었지요. 미국의 경제인과 위정자들은 조선의 최고 실력자들로 구성된 사절단의 방미를 황금의 기회로 여겼지요. 사절단을 정중히 대하고 환대를 한 것은 물론 그런 배경에서였습니다. 사절단에 대한 기사가 처음 나온 것은 9월 5일자 아닌가 싶군요. 신문을 같이 볼까요?
 
인디아나폴리스 1883년 9월 5일자
▲ 보빙사보도 인디아나폴리스 1883년 9월 5일자
ⓒ 미국 의회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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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로 번역해 보면,  
 
조선 사절단 접수
칼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9월 4일-조선 사절단이 오늘 샌프란시스코 시장의 방문을 받았다. 시장은 그들에게 샌프란시스코 방문을 환영한다는 인사말을 했다. 그 후 한 시간이 지난 뒤에 스코필드Schofield장군(육군 소장) 일행이 방문했고 이어서 상공회의소와 무역위위원회 대표들이 찾아와 자신들의 기관을 방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사절단 대표는 흔쾌히 응락하면서 나라의 근간인 상업분야의 대표들이 초청해 주니 더없이 기쁘다고 대답했다. 공식 환영회는 목요일 오후에 개최될 것이다.
(끝)
 
9월 4일 사절단의 일정을 보면, 샌프란시스코의 관광 명소인 클리프 하우스Cliff House, 골든 게이트 파크와 금문교를 방문했지요. 다음 날은 프레시디오Presidio 육군기지를 방문했는데 사령관 스코필드 소장의 영접으로 예포가 울리는 가운데 군의장대를 사열했지요. 그때 뜻밖에도 지휘관이 민영익에게 대포를 한번 발사해 보라고 권유합니다. 민영익은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대포를 발사했지요.

그 다음날 오후 2시에 샌프란시스코 상공회의소를 방문했는데 의외로 큰 환영회였습니다. 약 300명의 상공인이 모인 가운데 리셉션이 열린 것입니다. 서로 연설을 하고 건배를 하고 덕담을 주고 받으며 앞으로 잘해 보자고 다짐을 나누었죠. 리셉션이 끝난 후 사절단은 유니온 철공소를 비롯한 산업시설을 시찰하였지요. 사절단은 9월 7일 금요일 오전에 샌프란시스코 바틀레트Bartlett 시장을 예방하고 고별인사를 건넨 후 기차로 워싱턴으로 향했지요.

조선인들에 대한 소문은 바람을 타고 미국 전역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9월 6일자 한 일간지가 그 일단을 말해주지요. 기사를 같이 볼 수 있습니다.       
  
실버스테이트지 1883년 9월 6일자
▲ 보빙사 기사 실버스테이트지 1883년 9월 6일자
ⓒ 미국의회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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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해 보면,
 
조선사절단
조선사절단이 며칠 전에 홍콩을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는데 그들 민족으로서는 최초의 미국방문이다. 그들은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내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날 것이다. 그들은 토요일 오후에 이곳을 통과할 것이다. 그들은 젊고 키가 크고 잘 생겼다고 한다. 조선인들은 몽골족이며 외모로는 일본인을 닮았고 의상으로는 중국인을 닮았는데 언어는 중일 두 나라와 다르다(끝).
 
이제 그들이 워싱턴에 도착하면 나 조지 포크를 발견하게 될 겁니다.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태그:#조지 포크, #보빙사, #민영익, #샌프란스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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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자의 최신기사제2의 코리아 여행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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