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8.31 13:55최종 업데이트 21.08.31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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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사고가 많은 한국 사회. 그중 인권과 헌법에 반하는 사건이 유독 많습니다. 국가권력이 저질렀거나 외면했거나 왜곡한 반인권·반헌법 사건의 피해자를 도우려고 '수상한 흥신소'가 문을 열었습니다.  첫 사연은 간첩으로 몰려 감옥에서 죽은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박정민씨의 이야기입니다. [기자말]

통일혁명당 재건위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이동현씨 ⓒ 이희훈

 
(* 앞 글에서 이어집니다.)

소위 통혁당 재건위 사건의 피해자 중 이동현씨를 비롯해 박석주(사망), 진두현(사망)이 함께 재심 준비를 시작했다. 앞서 이미 박정민씨 덕분에 검찰의 기록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일본에서 진두현 등이 열차를 이용해 북한에 다녀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열차 시각표 등을 확보해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가장 큰 난관을 돌파해야 했다. 바로 재심 신청을 도와줄 변호인을 찾는 것이었다. 재심 변호인을 찾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다행히 2017년 심재섭 변호사를 만나 재심 진행에 도움을 받았다. 당시 함께 재심을 준비했던 이동현씨는 심재섭 변호인을 통해 2018년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부터 재심 개시 결정이 받아들여져 재심 재판이 열리게 되었다(관련기사- "보안사가 민간인 고문"... '통혁당 재건위 사건' 44년 만에 재심, http://omn.kr/s5c5).

당시 재판부는 재심 결정의 이유에 대해 이렇게 판시했다.
 
보안사 수사관들은 피고인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자백을 강요하며 주먹과 발 등으로 피고인의 온몸을 때리고 특히 구둣발로 피고인의 무릎을 밟는 등의 폭행과 가혹행위를 하였고, 재심 대상 판결의 공동피고인인 진두현, 박기래를 조사하면서도 이들에게 구타, 물고문, 전기고문 등 폭행과 가혹행위를 하였다.

특히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던 보안사는 이를 감추기 위해 중앙정보부 수사관 명의를 도용해 수사 기록을 조작해 검찰에 송치했다. 이에 대해서도 재심 재판부는 불법임을 판시했다.
 
일반인에 대하여 재판권을 가지는 구 군형법 제1조 제4항에 정한 범죄에 해당하지 않고, 나아가 중앙정보부 사법경찰관이 마치 피고인에 대한 수사에 입회한 것처럼 수사서류가 작성되어 있기는 하나 취급기관인 보안사가 피고인을 연행하여 조사한 것일 뿐, 중앙정보부 사법경찰관의 기명날인은 수사권한을 가장하기 위한 것으로 보일 뿐이다. 이와 같이 군사법경찰관인 보안사 수사관들이 피고인을 수사한 행위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경우로서 구 형법 제123조에 정한 타인의 권리행사방해죄를 구성하고, 위 범죄는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7호가 정한 사법경찰관의 직무에 관한 죄에 해당한다.

백년, 천년이 지나도 못 잊을 1974년 10월 3일
 

통일혁명당 재건위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이동현씨 ⓒ 이희훈

 
이러한 재심 재판부의 판단은 이동현씨의 주장과 그대로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는 보안사의 수사 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동현씨는 재심 준비에 앞서 보안사의 고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건 백년, 천년이 지나도 못 잊어. 1974년 10월 3일이야. 개천절이라 쉬는 날인데 물건 인수인계할 일이 있어서 출근을 했거든. 그래서 그날을 기억해. 나와서 일을 하는데 남자들이 찾아와서 지프차에 나를 태워. 그러고는 여기저기 들렀다가는 남산 밑에 어느 건물로 가는 거야. 그러고는 지하조사실로 들어가는데 방은 하얀 벽에 무지하게 밝은 형광등이 하나 있어. 들어가니까 군복을 주면서 갈아입게 해. 그러고는 박석주 아느냐고 해서 안다고 했지. 그러자 박석주가 간첩이니까 아는 대로 말하라는 거야. 무슨 개소리냐고 했지."

박석주의 간첩 행위를 부인하는 순간 '이 새끼'라는 욕과 함께 무수한 구타가 그의 몸에 쏟아졌다. 박석주가 한 북한 관련 발언을 써놓고는 '빨리 이야기 해' 하면서 발로 때리고, 꿇어 앉혀놓고 구둣발로 무릎을 밟았다. 무릎이 빠지는 고통을 겪으면서 버텨봤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했다. 주먹으로 얼굴을 몇 번이나 맞고, 정강이 맞고, 옆방에서는 '으악' 하는 비명이 들리고... 지옥 그 자체였다고 한다.

"수사관이 수사 기록을 작성해 와서 무인을 찍으라는 거야. 찍으면 내보내준다고. 그냥 찍었어. 물론 진술서 내용이 다 거짓인 걸 알면서도 일단 내보내 준다고 하니까 나가고 싶어서 그냥 찍었어." 

그러면서 그는 박정민씨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자신이 인정한 내용 중에 박석주의 범죄 사실과 관련된 내용도 있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제일 걱정한 건 라디오였어. 박석주가 나에게 '북한 방송 내용은 다 반대로 생각하면 된다'고 한 적이 있거든. 북한 말은 다 거짓이라는 거야. 그런데 수사관들은 그걸 다 북한을 찬양한 것으로 조작을 해버렸어. 나도 그걸 알면서 무인을 찍었고...미안하다."

이동현씨는 2018년 11월 1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재심 재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관련기사 - 44년 '간첩' 꼬리표는 한 인간을 어떻게 망가뜨렸나, http://omn.kr/1cq0g).

보안사 수사관은 내용을 조작하기 위해 피해자들을 오랜 기간 불법 구금하고, 폭행 등의 고문을 가했다. 그리고 권한이 없는 수사를 은폐하기 위해 수사 기록을 조작하기까지 했음이 이동현씨의 재판에서 드러났다.

서울고법 재판부 어떻게 이럴 수 있죠
 

법원 ⓒ 김보성

 
이동현씨와 같은 시기에 재심을 신청했던 박정민씨 부친 박석주의 재심은 여전히 열리지 않고 있다. 이동현은 회사 동료로서 박석주와 함께 회사의 기밀을 누설하는데 조력하고, 북한을 찬양하는 데 동조했다고 해서 박석주와는 공동정범(공범) 관계였다. 이동현과 박석주는 같은 수사기관의 같은 수사관들로부터 수사 받고 기소되었다. 그런데 이동현은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는데 박석주의 재심 재판을 맡고 있는 재판부는 여전히 감감무소식이다.

이동현 사건 변호인을 맡았던 심재섭 변호사는 2020년 겨울 사정상 변호인 수행을 계속하기 어려워 박석주 사건 변호인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했다. 다행히 이 당시 사회적 약자를 돕겠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수상한 흥신소'의 최정규·정진아 변호사가 이러한 사정을 알고 흔쾌히 재심을 돕기로 했다. 자칫 어려울 뻔했던 박석주씨 사건은 두 변호인의 도움으로 재심을 이어갈 수 있었다.

올해 2월 수상한 흥신소 사무실에서 박정민씨를 다시 만났다. 재심을 신청한 뒤 재심 결정이 몇 년간 지연되자 박정민씨는 그 사이 여러 차례 재판부에 전화로 항의하고, 탄원서도 제출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재판부로부터 여전히 검토하고 있다는 답변만 들었다고 한다.

"재심을 신청하고 3년이 지났어요. 아버지에게 지령을 주었다는 사람이나 회사에서 함께 근무했던 사람(이동현)은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는데 아버지 재판을 맡고 있는 서울고등법원 재판부는 3년 동안 재심에 대해 아무 말이 없어요. 억울하게 사람을 잡아다가 가두고 고문할 때는 그렇게 신속하게 처리하던 국가가 어떻게 억울하다는 사람에 대해서는 이렇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판사나 검사 가족이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해도 몇 년씩 사건을 책상 구석에 처박아 둘까요?"

박정민씨의 재심 재판은 아버지 박석주씨에 대한 진상 규명만의 의미가 아니다. 박기래, 진두현 뿐만 아니라 이 사건으로 억울하게 사형을 당해 생을 마감한 이들과 그들의 가족들에 대한 명예 회복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그의 재심 투쟁기는 오랜 시간을 거쳐 왔지만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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