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7.15 12:31최종 업데이트 21.07.15 15:06
  • 본문듣기
전 세계가 가짜뉴스와 프로보커터들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들은 각종 사회 이슈부터 정치담론에 이르기까지, 왜곡과 소란을 일으키며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합니다. 세계 각국에서 맹위를 떨친 가짜뉴스와 프로보커터들의 활동을 조명하고, 이에 대한 각 나라의 고민과 대안을 소개합니다. 이와 함께 이 현상을 역사적으로 톺아봅니다.[편집자말]
2020년 2월 4일 대통령 연두교서 시간. 공화당과 민주당 의원들로 가득 찬 의사당에서 연설 중이던 트럼프 대통령이 VIP석에 앉아 있던 한 남자를 지목한다. 

"그는 수백만 미국인들에게 사랑받는 특별한 남자입니다. 여러분이 만나게 될 최고의 전사이자 승자입니다. 지난 수십 년 간 미국을 위한 헌신에 감사하며 오늘 밤 그에게 미국 최고의 명예인 대통령 자유훈장을 주게 되어 자랑스럽습니다."

병색이 완연한 남자는 영부인이 직접 걸어주는 훈장을 목에 걸고 감격의 눈물을 보였다. 그의 이름은 러시 림보, 32년간 극우 라디오를 진행하며 트럼프 대통령을 만든 이 남자는 헬렌 켈러, 로자 파크스, 닐 암스트롱, 테레사 수녀가 받았던 메달을 목에 걸고 연단의 대통령에게 엄지를 보여주었다. 
 

미국 영부인 멜라니 트럼프 여사가 2020년 2월 4일 러시 림보에게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하원 의원에서 열린 합동 회의에서 연두교서를 발표하면서 메달 수여를 발표했다. 2020.2.4 ⓒ 연합뉴스

 
트럼프 이전의 트럼프

그로부터 13일 후인 2월 17일, 그가 진행하던 라디오에선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난 여러분이 라디오를 켜서 들으려 했던 그 사람이 아니라며 말 문을 연 여성은 러시 림보의 아내. 그녀는 남편이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청취자들에게 알렸다. 그의 나이 70세였다. 


AM 토크 라디오의 선구자로 불리던 러시 림보는 매일 3시간짜리 방송을 송출했다. 라디오 대기업 아이하트미디어(iHeartMedia)를 통해 전국 약 600개 방송국에 '러시 림보 쇼'가 방송됐다. 청취자는 일주일에 약 1500만 명이었다. 

메모 몇 장을 들고 와 거의 혼자 진행하는 쇼의 주요 콘텐츠는 민주당에 대한 무자비한 증오와 조롱, 괴상한 명명으로 가득했다. 미 전역의 트럭과 자동차에선 미주리 출신 진행자가 쏟아내는 인종 차별적이고 성 차별적인 발언과 음모론이 쏟아지곤 했다. 그의 사망에 맞춰 그가 했던 말들이 다시 소환되었다. 

"여러분, 클린턴 부부는 고양이를 기르고 있지요. 삭스(Socks)라는 이름의 백악관 고양이입니다. 그런데요 백악관에 개도 있다는 것 알고 있나요?"

그리고 대통령의 딸인 첼시 클린턴의 사진을 보여준다. 당시 첼시는 13살이었다. 

그는 파킨슨 병에 걸린 <백 투 더 퓨처>의 유명 배우를 조롱했다.

"(민주당 정치광고에 나오는) 마이클 J. 폭스는 지금 오버를 하고 있어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떨고 있는 건 순전히 다 연기일 뿐이에요. 여러분, 이거 정말 뻔뻔스러운 거 아닌가요?"
 

18일(미국 현지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하원을 통과했다. 의사봉을 들고 있는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 2019.12.18 ⓒ AFP=연합뉴스

 
낸시 펠로시 의원이 첫 여성 하원의장이 되자 무시가 노골화된다.

"그녀가 언제 져서 부엌으로 돌아갈지 궁금하네요. 여보세요 펠로시씨, 당신은 멀티 태스크죠. 아이들이 무릎에 앉아 있는 동안에 젖을 먹이고 발톱을 깎고 하원을 지휘할 수 있잖아요, 그렇죠?"

그는 오바마를 '하우스 니거'라고 불렀고, 성폭행 피해자를 조롱했다. 진보적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암 진단에 낄낄댔고, 산아 제한에 찬성하는 조지타운대 법대생을 창녀라 불렀다. 

노숙자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연민 파시스트"고, 낙태권을 옹호한 여성은 "페미 나치"였다. 지구 온난화는 속임수일 뿐이었다. 

그는 아무도 하지 않는 언사를 구사하며 언론과 워싱턴의 정치 엘리트들을 비난했다. 그에게 열광하던 보수적 남성 청취자들은 자연스레 2016년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로 연결됐다. 트럼프는 절친이자 대통령 당선의 1등 공신이었던 러시 림보가 죽자 <폭스 뉴스>에 전화를 걸어 그를 추모하는 인터뷰를 한다. 러시는 전설이었고 매일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에겐 종교적인 체험 같았다고 말이다. 

그래서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하는 CNN은 러시 림보를 트럼프 이전의 트럼프라 지칭했다. 라디오로 가난하고 교육 수준이 높지 않은 극우 청취자들을 자극해 트럼프에 환호하며 투표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사망 소식을 들은 한 트위터리안은 그가 방송 중 했던 막말 목록을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가 라디오를 바꿨고 토크쇼를 바꿨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자신의 플랫폼을 사용하여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증오와 폭력을 퍼트렸습니다. 그가 죽었다고 그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러시 림보의 후예들

림보의 성공으로 그를 모방한 수백 개의 보수적 토크쇼가 만들어졌다. 그중 돋보인 숀 해니티, 글렌 벡, 마크 레빈 같은 이들이 림보의 뒤를 이을 수 있을지 많은 이들이 궁금해한다. 

러시 림보 사망 사흘 후인 2월 20일 <뉴욕타임스>는 누가 러시 림보를 대신해 우파 언론의 거장이 될지 자문했다. 신문의 대답은 '아마도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당신이 트럼프를 좋아한다면 브라이트바트(Breitbart)와 뉴스맥스(Newsmax)가 있습니다. 온건한 공화당원이라면 더 블워크(The Bulwark)와 찰리 사이크스(Charlie Sykes)가 있고요. 저는 인스타그램에서 25~26세의 보수파 젊은이들의 동영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왕인 왕국은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밋 롬니의 언론 보좌관이자 공화당 전략가로 활동하는 이의 말처럼 러시 림보가 채웠던 600여 개 방송국 시간은 그의 옛날 방송들을 다시 틀어주며 서서히 다른 진행자들로 바뀌어 가는 중이다. 

<뉴욕타임스>는 오랫동안 보수 TV 채널이라는 독점을 누렸던 <폭스 뉴스>조차 극우 시청자들을 타깃으로 삼는 <뉴스맥스> 같은 신생 라이벌들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고 말한다.

지금은 '너무 많은 플랫폼과 너무 많은 목소리'가 있다는 것이다. 라디오 말고도 팟캐스트, 스마트폰 주문형 음악과도 경쟁해야 한다. 더불어 이젠 러시 림보처럼 누군가를 조롱하고 폄훼하고 악의적 네이밍에 인신공격하는 방송은 적극적인 시청자와 광고주들의 압박에 버티기 힘든 시대가 됐다. 

러시 림보조차도 조지타운대 여학생에 대한 모욕적 언사로 광고주들이 빠져나가자 정식으로 사과했다. "내가 선택한 단어는 최선이 아니었고 재밌게 하려다 전국적인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플러크씨를 향한 모욕적인 단어 선택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합니다"라며.  

이런 상황에서 많은 언론들이 러시 림보를 이을 단 한 사람으로 꼽는 이가 있다. 바로 도널드 트럼프. 그도 퇴임 후 언론 관련 사업 구상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의사당 폭력 사건 이후 상황은 급반전됐다. 스스로도 림보를 따를 생각은 없다 말한 상태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텍사스 주 파에 있는 미완성 국경 지대를 방문해 연설하고 있다. 2021.6.30 ⓒ 연합뉴스

 
트럼프 8월 복귀설의 실체

지난 6월 미국 몬마우스 대학 여론조사에 의하면 미국인 1/3이 조 바이든이 부정 선거로 당선했다고 믿는다고 했다. 로이터와 입소스의 5월 여론조사에도 공화당의 절반 이상이 트럼프를 '진정한 대통령'으로 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전문지 <폴리티코>는 미 국토안보부가 트럼프 대통령의 8월 복귀론을 우려하고 있다는 뉴스를 전한다. 국토안보부 테러방지 최고책임자가 의회 의원들을 상대로 관련 비공개 브리핑을 했다는 것이다. 이는 지난 1월 의사당 테러 때의 거짓 루머들을 재활용한 것으로 2020 대선 패배를 부정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오고 있다 했다. 

8월 트럼프 복귀설은 어쩌면 러시 림보가 그의 절친과 추종자에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일지 모른다. 방송을 통해 민주당에 음모론을 채색하고 부정선거를 설파하고 진실을 호도하게 한 그 후과 말이다. 그의 육신은 땅속에 묻혀있지만 그가 했던 말은 여전히 살아서 미국 사회를 혼란과 불안과 불신으로 몰아넣고 있다. 

진 선거를 이겼다 우기고 지지자들을 규합해 다시 백악관 입성을 꿈꾸는 전 대통령이 있는 미국은 지금 러시 림보로 대변되는 거짓 뉴스의 유령이 홀연히 떠돌고 있는 중이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이 기사는 프리미엄 가짜뉴스와 프로보커터가 지배하는 세상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