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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간 건 산수유, 산수유는 맛있다. 결론은 산수유만 맛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빨간 건 산수유, 산수유는 맛있다. 결론은 산수유만 맛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 노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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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연구회의 회원들 모두 겉보기와 달리 수줍음이 많은 은둔형 외톨이였다. 그들은 가슴이 두근두근 마음이 울렁울렁 얼굴이 붉어진, 당신만 아세요, 육십 일곱 살이었다. 그들을 보려면, 가만히 가만히 오세요, 요리조리로, 언제나 살벌한 산수유나무 아래로, 아마도.

함양에서 사는 사람들 모두 다 자신의 혈연·지연·학연·막걸리연의 거미줄 안에 엮여 있다고 늘 부르짖던 박 영감도 고작 마른 산수유 4개를 판매했다. 실망한 티를 안 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곰팡이처럼 저절로 피는 썩소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썩소의 다양한 종류 중 발효소(笑)와 달리 부패소(笑)는 의지와 관계없이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불수의근의 지배를 받는 모양이었다.

"(돌겠네) 44개가 아니라 4개요?"
"이사장한테 면목이 없구만."
"······."


갑자기 중평댁이 대변인이라도 된 듯 나섰다.

"이 양반 아는 사람들 이제는 다 무덤에서 산다 아이가. 4개라도 팔았으먼 무시무시하게 마이 판 기라."

무시무시? 중평댁을 연달아 두 번 무시해버리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됐고요, 음복주를 마시며 추모해야 할 친구 이외에 박 영감의 술친구만 해도 어마무시하게 많다는 걸 내가 다 알거든요. 실적현황표를 보니 설렁설렁 영업을 뛰며 21개를 판 내가 판매왕이었고, 20개를 판매한 작업반장이 내 뒤를 맹렬히 뒤쫓고 있었다.

반장이 마을 회의를 소집했다. 생산 과정에서는 비록 위세가 많이 꺾였지만, 판매 실적으로 따지면 회의를 소집할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무산댁과 우 이사를 비롯한 실용론자들 모두 반장의 눈치를 슬슬 보며 말을 아꼈다.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했는지, 반장의 표정과 말투는 산수유 작업을 처음 시작하던 시점으로 초기화되어 자신감이 넘쳐났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러지 말고, 산수유차 좀 마시고 다들 불끈불끈 힘을 내자구요. 그리고 두 분 위원장님들은 대체 뭐 하는 겁니까. 보자, 무산댁 형수가 1개 팔고, 우 이사님은 2개 팔고. 아, 이래서야 어디 일하신 분들에게 최저임금이라도 지급할 수 있겠습니까? 다들 분발 좀 부탁드립니다."

소평댁의 비밀

19개를 팔아 판매 랭킹 3위였던 소평댁에 관한 비밀을 하나 털어놓아야겠다. 소평댁은 쟁의대책위원회의 핵심 멤버로, 정보수집팀 팀장이었다. 평소에 무산댁과 함께 밤마다 술을 홀짝홀짝 마시던 친분 때문에, 위원회 내부에서는 낙하산 인사라는 논란이 있었지만, 사실상 마을에서 모든 소문이 취합되고 확대 재생산되는 곳이 소평댁의 입이었으므로, 그녀는 팀장으로서 무난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소평댁이 살금살금 고양이처럼 마을회관 안으로 스며든 건 파업 당일 오후 3시경이었다. 그녀가 정보수집팀 팀장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때까지 파업 중단 통보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바짝 긴장하고 말았다. 소평댁은 회관으로 들어오자마자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분주하게 일을 돕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간담이 서늘해질 수밖에 없었다.

손자병법 제13편 용간(用間)을 보면, 간첩에는 다섯 가지 유형이 있다. 그중에서 소평댁이 사간(死間)인지 아니면 생간(生間)인지 판단하기 쉽지 않았다. 사간은 죽음을 각오하고 적국에 잠입해서 거짓 정보를 유포하는 간첩이고, 생간은 적의 동정을 살펴서 보고하는 간첩이다.

파업 때문에 인원 부족으로 외부 작업을 할 수 없어서, 쟁의대책위원회에서 사측(社側)이라고 규정한 이 이사와 남편, 나와 반장, 중평댁과 박 영감 6명 모두는 마을 회관에서 기계조의 일을 하고 있었다. 채반 위에 쏟아진, 씨가 빠진 산수유 열매를 펼치며 시원찮은 열매를 골라내던 소평댁이 입을 열었다.

"우 위원장 그 새끼 그거 빨갱이 아이가? 테레비에서만 파업인동 뭐시긴동 봤는데, 내가 그 무서븐 거를 할라 카이까네 간이 다 오그라드는 기라. 그런 거는 빨갱이들만 하는 짓 아이가, 맞제?"

아하, 사간(死間)이구나! 회관 안에 있던 사람들 누구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평댁은 우리의 반응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바쁘게 손을 놀렸다.

"내가 여 온 거는 비밀이다, 알것제? 내는 우 위원장이 입에 달고 사는 파업이라는 말이 듣기도 싫은 기라. 파업이라 카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빨갱이가 된 거 같거든. 그라고 이거 해가꼬 품삯을 받든 아이믄 협동조합인동 마을기업인동 그거 해가꼬 뭉티기로 품삯을 받든, 나는 상관도 없는 기라. 내는 기양 내 손주 새끼한테 게임기 그거 사주믄 된다 아이가."
"아줌마, 게임기 그거 애들한테 별로 안 좋아요."
"우리 이사장! 그노무 새끼가 그거를 좋아하믄 그걸로 다 된 기라. 내가 트로트 조타꼬 손주 놈한테 트로트 가수 하라 카까?"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한 장면. 이야기를 하는 소평댁의 얼굴에 겹쳐진 빌리 엘리어트의 아빠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한 장면. 이야기를 하는 소평댁의 얼굴에 겹쳐진 빌리 엘리어트의 아빠
ⓒ (주)팝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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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통근 버스 차창에 날아와 깨지는 달걀을 바라보던 '빌리 엘리어트' 아빠의 괴로운 표정이 떠올랐다(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 아빠는 발레를 하는 아들을 위해 파업 대열에서 이탈해 작업장에 복귀한다).

그래, 발레와 게임기가 무슨 차이가 있을까. 명분론자든 실용론자든, 파업에 참여하든 배신자로 낙인찍히며 파업 대신 작업을 선택하든, 그들은 그저 사랑을 지키고 싶은 것이다. 가족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사랑, 삶에 대한 사랑. 아니다, 잘 모르겠다. 그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러면 빨갱이가 아니란 걸 증명하려고 여기 온 거요?"

반장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소평댁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그것도 있꼬, 손자새끼 게임기 빨리 사줘뿌고 싶어가꼬 그런 거또 있꼬, 일하다가 또 안 할라 카이까네 심심허기도 하고, 그래도 여서 산수유 쪼물딱대는 사람들한테 미안한 기 제일 커가꼬."

소평댁의 진심 어린 대답에 다들 조금은 숙연해지려는 찰나, 남편이 촐싹거리며 끼어들었다.

"산수유 씨 빼다 보니까 제피기도 빨갛고 내 손도 빨개졌고, 아줌마, 내 손 보이죠? 그러니까 그쪽이 아니라 여기가 빨갱이 집단이라니까요, 걱정도 팔자네, 참. 제가 얼마나 빨갱인가 하면요, 이젠 내 엉덩이도 빨갛다구요, 기계조 똥구멍은 빨개, 빨간 건 산수유, 산수유는 맛있다. 결론은 산수유만 맛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제대로 된 감동 파괴자 같으니라고.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왠지 남편의 넉살이 밉지 않았다. 다들 파업을 잊어버리고 한마음으로 깔깔거렸으니.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마른 산수유가 제법 팔려 나가기 시작한 것은 크리스마스 즈음 때부터였다. 우리 연구회가 예비 마을기업에 선정되고 난 후였다. 마을을 떠난 출향인(出鄕人)들이 예비 마을기업이 생긴 소식을 듣고, 고향에 올 때마다 동네를 돕는다는 기분으로 조금씩 사 갔던 것이다.

사실 우리는 예비 마을기업 선정에 관해서 그다지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사업신청서 접수 후 1주일 정도가 지났을 때, 평가단의 실사가 있었고, 사업신청서와 현장을 검토하던 평가단의 내부에서 의견이 첨예하게 엇갈리는 걸 봤기 때문이다.

경상남도와 함양군의 관계자들은 마을의 실태를 보며 사업신청서에 공감했지만, 경남대 공동체지원단은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평가단이 최종적인 결론을 내는 심사단은 아니었지만, 우리 사업신청서의 사업성에 관해서 계속 지적을 하는 공동체지원단을 보니, 잘 안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팔이 밖으로 휘어지지는 않지.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실사가 끝나고 남편이 공동체지원단에 관련된 온갖 정보를 검색한 뒤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 여기서 자기들한테 교육받은 팀들에게 후하게 점수를 주겠지, 우리처럼 우리끼리 후다닥 해치운 팀에게 점수를 주겠냐고? 우리는 마을기업이 아니라 협동조합 체질인 모양이지 뭐."


이 이사, 우 이사, 정 감사 등 평가단의 실사에 참석한 임원진도 선정에 관해서는 긴가민가 감을 잡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남편이 평가단과의 질의응답 중에 몇 번 삑사리를 낸 뒤 혼자서 개지랄을 떤 것 말고는 대체로 무난하다고 느꼈다.

남편은 원래 누군가에게 평가를 받는 것 자체를 못 견디는 성미라 그 정도면 나름 선방한 셈이었다. 그 점에 관해선 내 잘못도 크다. 내가 늘 이 인간에게 박한 평가를 내리다 보니, 평가 트라우마가 생겼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2020년 12월 15일에 우리 연구회는 예비 마을기업으로 선정되었다. 회원들 모두 좋아서 야단법석을 떨었고, 남편이 뭐라도 한 마리 잡아서 마을 잔치를 하자고 술주정을 하길래, 헛돈 쓸 생각이면 널 잡아버리겠다고 한마디 한 뒤 마을 회관을 벗어났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협동조합 관련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태그:#마을기업, #협동조합, #지리산의식주연구협동조합, #함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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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살다가 함양으로 귀농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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