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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제주살이 4년차에 접어들었다. 그 사이에 거셌던 제주 러시 현상은 다소 진정된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제주 이주를 꿈꾸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제주 1년 살이 혹은 1달 살이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뜨겁다. 이 글은 동아일보 기자와 세종대 초빙교수를 지내고 은퇴한 후 제주로 이주한 한 개인의 일기이자 제주에서의 생활을 소재로 한 수필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제주도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 제주의 자연환경,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한국현대사의 축소판이라 할 제주사회를 이해하는 데 유익한 읽을거리가 되길 기대한다.[기자말]
찬란한 봄날, 딱 한군데만 가볼 수 있다면 어디일까. 나는 주저 없이 가시리를 꼽는다. 표선면의 42%를 차지한다는 가시리는 제주도의 리(里) 가운데 가장 넓은 곳이다. 내가 가시리를 꼽는 것은 이 넓은 땅에서 세 가지 보물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가시리 3보(寶)는 꽃, 말 그리고 오름이다.

제주에 드나들기 시작한 이후 4월이면 가장 가고 싶어지는 곳이 바로 가시리의 화려한 꽃길이다. 제주로 이사 온 후 집 안팎 정리하고 나니 어느새 4월이 시작됐다. 첫 나들이는 당연히 가시리로 정했다.

오늘 4월 7일은 가시리의 유채꽃 축제 마지막 날이다. 가급적 축제 기간은 피하고 싶지만 꽃이 가장 아름다운 때를 놓칠까 봐 아내와 함께 아침 일찍 서둘러 집을 나섰다.
 
가시리의 4월. 벚꽃길이 10여km에 걸쳐 펼쳐지는 장관을 이룬다.
▲ 가시리 녹산로 가시리의 4월. 벚꽃길이 10여km에 걸쳐 펼쳐지는 장관을 이룬다.
ⓒ 황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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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채꽃 축제라고 하지만 유채꽃과 벚꽃의 합작이다. 가시리 녹산로의 10km에 달하는 도로 양옆으로 노란 유채꽃의 바다가 끝없이 이어지고, 그 위로 벚꽃 하늘이 드리워져 있으니 이런 장관이 없다. 가히 최상의 산책로요,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뽑혔다는 설명은 진부하게 들린다.

녹산로의 황홀한 풍경을 절반쯤 지나와서 조랑말 체험공원 부근 임시주차장에서 내렸다. 이 일대는 유채꽃 천지다. 하얀 벚꽃 행렬 위로는 멀리 풍력발전기가 돌아가고 있다. 또 그 너머에는 오름이 저만치 물러서 있다.   
 
유채꽃과 벚꽃과 오름이 한눈에 들어온다.
▲ 봄날의 가시리 풍경 유채꽃과 벚꽃과 오름이 한눈에 들어온다.
ⓒ 황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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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기 그만이다. 요즘엔 웬만하면 사진 찍는 걸 귀찮아하지만, 이 눈부신 봄날 풍경을 어찌 모른 체 하나. 사진도 찍고, 커피도 음미하면서 이 분위기에 푹 취해본다. 이 찬란한 봄날이 곧 시든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밀려든다. 아름다운 순간은 왜 이토록 짧은 것인지, 아니면 짧기 때문에 아쉽게 느껴지는 것인지.

귀갓길에 다시 녹산로를 보기로 하고 두 번째 보물을 찾아가기 위해 시동을 걸었다. 내가 꼽는 두 번째 가시리 보물은 따라비 오름이다. 녹산로를 벗어나 조금만 달리면 된다.

마침 점심시간이 돼 이곳에 올 때마다 들르는 나목도 식당을 찾았다. 나목도 식당은 평범한 식당처럼 보이지만 두루치기가 맛있다고 소문난, 꽤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가시리 사무소가 바로 옆이다. 식당 앞 마을을 지키는 노거수 아래 평상에서 사람들이 쉬고 있다. 볼 때마다 정겨운 시골 분위기가 느껴져 좋다.

일 년 만에 와보니 그동안 식당 건물도 깨끗하게 단장했다. 2층 옥상으로 올라가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한 것도 눈에 띈다. 6000원짜리 두루치기 백반으로 맛있는 점심을 하고 자판기 커피를 뽑아 옥상으로 올라오니 제주 중산간 시골 마을의 경치가 마음을 아주 편하게 해준다.

나목도 식당에서 식사를 한 뒤에는 걸어서 5분 거리에 위치한 자연사랑갤러리를 찾곤 한다. 옛 가시초등학교를 개조해 갤러리로 꾸민 곳이다. 서재철 작가의 사진 작품을 통해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는 맛이 그만이다. 뿐만 아니라 서 작가가 사용한 다양한 기종의 카메라도 구경거리다. 학교 운동장 부지도 아기자기하게 꾸며 예쁜 정원으로 탈바꿈했다.

따라비 오름으로 향했다. 이정표를 따라 10여 분 정도 달렸을까. 숲 사이로 난 한적한 도로를 달리니 얼마 안 가 따라비 오름 주차장이 나온다. 흙길과 계단길로 이루어진 등산로가 힘들다고 느껴질 즈음 능선이 나오고 정상이 바라보인다. 울창한 숲이 끝나면서 능선에 올라서는 순간, 탁 트인 전망과 분화구의 아름다운 선이 확 눈길을 끈다.
 
녹산로 인근의 따라비 오름은 부드러운 능선이 특징으로, 오름의 여왕으로 불리기도 한다.
▲ 따라비오름 녹산로 인근의 따라비 오름은 부드러운 능선이 특징으로, 오름의 여왕으로 불리기도 한다.
ⓒ 황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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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원형 분화구(굼부리)와 크고 작은 6개의 봉우리가 오밀조밀 어우러지고 매끄러운 능선으로 이어져 하나의 산체를 이루고 있다. 절묘한 교차, 부드러운 곡선이 살아서 꿈틀거린다. 따라비 감상의 핵심 포인트다.

따라비 오름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용눈이 오름과 비슷한 분위기라는 것. 우뚝하거나 뾰족하지 않고 부드럽고 나지막하다. 압도되지 않는 대신 정감이 간다. 분화구 능선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걸으니 적당히 운동도 됐다.

이 굼부리 능선길, 아니 오솔길을 걷는 모습을 촬영하면 말 그대로 인생 사진이 될 듯하다. 따라비가 가장 멋진 계절은 억새가 만발하는 가을이다. 새별오름, 아끈다랑쉬와 함께 억새가 멋진 오름으로 유명한데, 내 느낌으로는 분화구의 곡선미가 뛰어난 이 따라비의 억새가 더 멋질 것 같다.

나는 봄마다 유채꽃과 벚꽃 보러 오는 김에 따라비 오름에 들르는데, 언젠가는 가을에 와서 억새가 물결치는 장관을 봐야겠다. 이처럼 아름답다고 해서 '오름의 여왕'으로 불리기도 한다. 전혀 생김새와 분위기가 다른 다랑쉬에도 오름의 여왕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도 재미있다.

'따라비'라는 이름의 유래가 흥미롭다. '따애비'로 불리다 '따래비' '따라비'가 됐다. 땅할아버지라는 뜻이다. 한자로는 지조악(地祖岳). 동쪽에 어머니인 모지오름(母地岳)과 아들인 장자오름 그리고 북쪽에 새끼오름을 거느리고 있어 마치 한 가족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졌다. 능선 가장 높은 곳에서 이들 오름가족들을 조망하는 맛도 특별하다.

가시리의 마지막 보물인 말은 조랑말 박물관을 둘러보고 갑마장 길을 걷는 것으로 만끽할 수 있다. 오늘 박물관은 건너뛰었다. 항상 이맘때 가시리에 오면 꽃과 오름이 우선이다 보니 박물관은 다름 기회로 미루게 된다. 갑마장 길도 무려 20km에 달하는, 조선시대 최고의 말 목장 지대인지라 하루종일 걸어야 하는 코스다. 따라비도 갑마장 길이 지나간다.

옛 목축지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갑마장 길까지 답사해야만 가시리 3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가시리 녹산로 멋진 길을 다시 통과하면서 다짐했다. 봄에는 녹산로 꽃길을, 가을에는 억새 길과 갑마장 길을 걷기로! (20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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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의 언론계 생활과 7년의 대학 초빙교수 생활을 끝내고 2018년 봄 제주로 이주했다. 애월읍의 한 생태마을에 거주하면서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과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 그리고 제주현대사의 아픔에 깊은 관심과 연대의식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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