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6.25 19:17최종 업데이트 21.06.25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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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이승만 정권에 변곡점 역할을 했다. 이 전쟁은 청년단체들에 전폭 의존했던 이 정권이 새로운 지지층을 적극 모색하게 만들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청년들에게 상당한 '애착'을 보였다. 미군정도 한국 청년들을 '남'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청년 실업이 심각했던 해방공간에서 미군정은 극우 혹은 이북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그들의 단체를 지원하며 정치적 활로를 열어줬다.


미군정은 청년들을 개별적으로 보살펴주기도 했다. 2010년에 <4·3과 역사> 제9호·제10호 합본호에 실린 역사학자 김평선의 논문 '서북청년단의 폭력 동기 분석'에 따르면, 미군정은 청년단원 박아무개를 서귀포시 표선면사무소에 취업시켰다가 거기서 해고되자 미 육군 제24사단 방첩부대(CIC) 성산포사무소 직원으로 다시 채용했다. 이런 식으로 미군정은 극우 혹은 이북 청년들을 알뜰하게 챙겼다.

이승만 정권의 경우에는 청년단체에 대한 의존도가 더 높았다. 미군정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은 있었지만 남한에 대중적 기반이 없어서 이북 출신 청년들을 정치적으로 악용했다. 이승만 정권은 대중적 기반이 취약한 것은 물론이고 군대에 대한 장악력도 약했다.

군대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영향력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에서 국군 일부가 반란(여순사건·여순항쟁)을 일으킨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항상 강한 쪽에만 선을 대던 군인 박정희가 이 시기에 이승만 정권이 아닌 남조선노동당(남로당)에 충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군대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이승만은 미군정보다 훨씬 더 청년단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지지 기반이 취약한 정권
 

연합국 환영대회에서 처음으로 대중에게 연설하는 이승만(1945. 10.) ⓒ NARA / 눈빛출판사

 
이승만이 청년들에게 얼마나 애착을 보였는지는 같은 해 11월 28일 밤의 방송 연설에서도 알 수 있다. '전국 청년들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이 연설에서 그는 청년이란 단어를 수도 없이 언급했다. 요즘 같았으면 '대통령이 청년을 몇 번 언급했다'는 내용이 언론에 보도됐을 수도 있다. 그날 발행된 <동아일보> 기사 '총단결 총궐기하라'에 따르면, 그는 이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과거 3년간에 청년들의 투쟁이 아니었으면 공산 반역의 화를 막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물론 경찰의 애국 충성으로 많은 성적을 우리가 힘입어 이만치라도 안녕질서를 보전하고 공산분자의 작난(作亂)을 진압해온 것이지만, 우리 청년남녀의 결사투쟁이 아니었다면 경찰 힘만으로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해방 직후의 진보진영(이른바 좌파)을 탄압하는 일에서는 청년단체보다는 주한미군이 더 큰 역할을 했지만, 이승만은 "소위 해방 이후의 광경을 보면 남북 정세가 다 공산화한 것 같이 되었던 것인데, 우리 청년들이 궐기해서 결사 투쟁한 결과로 경찰관들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데까지 청쇄(淸刷, 쓸어버림)시킨 것"이라며 청년들에게 공을 돌렸다.

그러면서 청년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역설했다. "만일 우리 청년들이 잠자고 있으면 우리 순량(純良)한 동포는 다 이리와 호랑에게 먹힌 바가 될 것이오"라고 한 뒤 "우리 용감한 청년들은 이런 기(期, 때)를 좋은 기회로 알고 용기와 흥분을 내어서 질거히(즐겁게) 전진하자"고 호소했다.

이렇게까지 열렬히 '구애'한 것은 무엇보다 그의 정치적 취약성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미국에 거주했기 때문에 그의 국내 기반은 당연히 허약할 수밖에 없었다. 미군과 보수세력이 돕기는 했지만, 이승만과 그들의 결합은 화학적인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것이었다. 미군과 보수파는 진보 진영을 상대하는 일에서는 기꺼이 함께했지만, 여타 문제에서는 이승만이 불만을 느낄 여지가 적지 않았다.

미군은 정부수립 1개월 뒤인 9월 15일 '이승만을 놔두고' 철수를 개시했다. 보수정당인 한국민주당(한민당)은 헌법을 만드는 과정과 초대 내각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이승만과 척을 졌다.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만든 한민당은 내각책임제 헌법을 통해 그를 견제하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뒤이어 한민당 지도자 김성수를 국무총리로 만들고자 했지만 그것 역시 실패했다. 이승만은 내각제 대통령이 아닌 대통령제 대통령이 되는 데는 성공했지만, 최대 우군인 한민당을 잃고 말았다.

군대뿐 아니라 경찰 역시 이승만의 확실한 우군이 아니었다. 당시의 경찰은 미군정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경찰이 대한민국 내무부의 관할을 받게 된 것은 1948년 9월 3일이다.

이 날짜 <동아일보> 1면에 따르면, 9월 2일에 대한민국 공보처는 "대한민국 대통령과 미 주둔군 사령관은 1948년 9월 3일 정오를 기하여 '남한과도정부의 경무부의 지휘권은 대한민국 내무장관에게 이양될 것'임을 금일 발표하였다"고 표명했다. 남한 경찰이 3년 정도나 미군정의 지휘를 받았기 때문에, 이승만은 그들에게서 전폭적인 충성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국회 기반 역시 취약했다. 한민당의 협력으로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1952년에 무리수를 써가면서까지 직선제 개헌을 관철한 것은 잘 알려진 것처럼 국회 내에 지지 세력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미군은 철수를 개시하고, 한민당과는 등을 지고, 국회에는 우군이 없고, 경찰과 군대는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이승만은 다른 데로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지방 토착세력이나 신흥 상공인들에게 관심을 쏟는 한편, '우리 용감한 청년들'에게 더욱 더 의존하게 됐다.

군경을 대체할 자기 휘하의 사병부대

명목상으로는 대한민국 공권력을 이끌게 됐지만 군대와 경찰을 전폭 신뢰하지 못했던 그는 청년 단체들을 통합해 군사 조직을 만드는 구상에까지 이르게 됐다. 민병대 조직인 청년방위대를 설치하는 구상이 그것이다.

그는 청년방위대 조직은 "청년들에게 무엇이고 남겨주려고 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청년들에게 훌륭한 유산을 남겨주고자 청년방위대를 조직하게 됐다고 말했지만, 그의 진짜 목적은 군과 경찰을 대체할 자기 휘하의 사병 부대를 만드는 데 있었다.

그는 24개 사단으로 편제된 20만 청년방위대 결성을 추진했다. 이에 들어갈 만만치 않은 비용을 마련하고자 1949년 12월 3일 대국민 담화를 통해 애국공채 발행을 추진하기까지 했다. 12월 4일 자 <동아일보> '면치 못할 국민의무'에 따르면, 담화에서 그는 "이러한 비용은 정부의 통상경비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라며 공채 발행을 합리화했다.

그가 정규군이 아닌 민병대를 구상한 것은 외부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5월에 <역사학 연구> 제82집에 실린 유상수 순천대 교수의 논문 '한국전쟁 전후 이승만의 사적 통치 기반 형성과 변화'는 "반대세력의 간섭에서 최대한 벗어나 자신의 대표적인 통치 기반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방안"이었다고 해석한다. 미국과 국회 반대파의 통제 내지 간섭을 벗어나 자유롭게 사병부대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청년방위대라는 민병대 조직, 엄밀히 말하면 사병 조직을 결성했지만, 얼마 뒤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그의 구상은 뒤틀리고 만다. 전쟁 중에 청년방위대가 해산되고 이들은 예비군인 국민방위군에 편입됐다. 민병대 조직이 국가 공권력으로 바뀐 것이다. 뒤이어 국민방위군 간부들의 보급품 횡령으로 병사 수만 명이 굶어 죽거나 얼어 죽는 국민방위군 사건이 터지면서 국민방위군마저 1951년 5월 17일 완전히 해체된다. 
 

국민방위군 ⓒ 진실위 자료

 
청년정책을 명분으로 청년단체들을 결집해 정권의 충복으로 삼으려 했던 이승만의 구상은 한국전쟁 발발로 무산되고 이로 인해 그의 권력 기반도 흔들렸지만, 그는 새로운 곳으로 '희망'을 찾아 나섰다.

그는 전쟁 중에 자유당을 창당하고 여기서 생긴 에너지를 발판으로 임시수도 부산에서 경찰을 동원해 국회를 포위하고 직선제 개헌을 관철(부산 정치파동)했다. 이 과정에서 국회 반대파가 힘을 잃음에 따라, 국회에 대한 그의 영향력이 높아지게 됐다. 또 전쟁이라는 비상 상황이 군대와 경찰에 대한 그의 장악력을 높여줬다.

이로써 이승만은 한국전쟁 이전에 갖지 못했던 권력 기반을 갖게 됐다. 청년방위대를 잃은 뒤에 훨씬 더 큰 것들을 갖게 됐던 것이다. 청년 사병부대를 상실한 대신 자유당·군대·경찰·국회를 얻은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한국전쟁이 '상실'과 '치유'라는 이중적 의미를 띠는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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