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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참한 미얀마 상황을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미얀마의 민주화 시위는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이주민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 없을 것이다. 무너져 내리는 활동가의 마음을 위로할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일단 찾아가서 만나보는 것이 첫 번째라는 결론을 내리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지난 6월 3일 부천의 '아시아인권문화연대'를 찾았다. 

피난처에 찾아갔다가 바뀐 삶 
 
 아시아인권문화연대 사무실에서 만난 이란주 대표
 아시아인권문화연대 사무실에서 만난 이란주 대표
ⓒ 문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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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부천 도당동의 '강남시장' 안에 자리 잡은 아시아인권문화연대의 문을 열자 이란주(52) 대표가 반갑게 맞았다. 이란주씨와 나는 '역사와 산'이라는 산악 모임에서 안면을 튼 사이다. 벌써 2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이란주씨와 나는 흰머리가 나풀거리는 중년이 되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아요."

안부를 주고받을 새도 없이 흘린 이란주의 첫 마디에 가슴이 싸하게 내려앉았다. 25년 동안 이주민 관련 활동을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무슨 생각으로 이주민들과 동고동락 하는 삶을 선택한 것일까. 궁금한 것이 많았다. 하지만 다 물을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는 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1994년, <한겨레 21> 창간호에 '외국인노동자피난처' 라는 단체의 활동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어요. 그 기사를 보고 그해 가을에 피난처에 찾아갔어요. 당시만 해도 '이주민'이라는 단어조차 없을 때 였어요. 그런데 이 단체의 활동으로 이주노동자 이슈가 사회적으로 퍼지게 됩니다. 그래서 지역마다 이주노동자 지원 활동이 시작됐고, 부천 지역 활동에 제가 결합하게 됐어요. 피난처에 찾아갔다가 그 자리에  멈춰 서게 된 거죠(웃음)."

외국인노동자피난처는 1994년도에 산재 당한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에게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을 적용해 달라는 투쟁을 한다. 마침내 싸움에서 이겼지만 치료와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간 노동자들이 있었다. 활동가들은 그 이주노동자들을 찾아 나선다. 외국인노동자피난처는 국내 활동을 쉬게 되고, 이란주는 '부천외국인노동자의집' 에서 활동을 시작한다. 

"부천외국인노동자의집에서 일 할 때에요. 저에게 산업재해 문제로 처음 상담했던 분은 목재 회사에서 일했던 방글라데시 사람이었어요. 한 손이 기계에 눌려 못 쓰게 된 상황이었어요. 사업장은 상시노동자가 5인 이상이라는 점을 입증하지 못해서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적용이 안 되고 있었어요. 사실은 일용노동자를 많이 썼기 때문에 5인이 훨씬 넘는 사업장이었죠. 사업주도 어떻게든 보상을 해주고 싶었지만 이미 병원비로 많은 돈을 썼기 때문에 어쩌지 못하고 있었어요.

제가 이주노동자와 함께 공장에 찾아갔어요. 사장은 공장 옆에 살림집을 두었는데 공장이나 살림집이나 다 판잣집이었어요. 사장의 아내가 마당에서 목재 부스러기를 태우고 있었는데 저를 보더니 빗자루로 막 때리는 거예요. 이주노동자는 제 뒤에 와서 숨고요. 진짜 황당하죠. 회사와 우리단체가 협력해서 산재 적용을 받게 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진척이 없었어요. 그 일이 있던 즈음 이주노동 관련 활동가들이 모여서 이주노동자 보호법을 만들자는 운동을 해요. 명동성당 앞에서 농성을 했어요. 여러 언론사에서 취재를 많이 왔어요. 당시에 농성단에는 역할 분담을 하고 있었어요.

언론 담당, 살림 담당 등등. 저는 살림 담당이었어요. 그런데 선배들이 없는 사이에 조선일보에서 취재를 왔어요. 그 당시에도 조선일보 취재에는 응하지 말자는 약속이 있었어요. 그런데 조선일보 기자가 집요하게 물어보길래, 제가 '저 아저씨를 봐라. 산재를 당했는데 보상도 못 받고 너무 힘들어 한다'고 투덜거렸지요. 그랬는데 어떻게 취재했는지 다음날 조선일보에 기사가 났고 매우 빠르게 산재 승인이 났어요. 우리가 아무리 산재 적용을 요구해도 안 됐던 일을 조선일보 기사가 해결 한 거죠. 그래서 방글라데시 아저씨는 보상을 받았어요. 조선일보는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 언론이지만 좋은 일을 할 때도 있구나 하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마웠죠(웃음)."


산재를 당한 이주노동자가 치료와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 본 활동가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물론 지켜만 보지는 않았다. 동분서주하며 어떻게든 보상을 받게 하려고 불철주야 뛰어다녔다. 자주 그 일을 겪는 이란주의 가슴은 타들어 가는 것을 넘어 숯덩이가 된 지 오래다. 

"이주노동자들은 대부분 진취적이고 굉장히 열심히 일하는 분들이에요. 제가 활동하면서 가장 힘들 때는 사람들이 다치거나 아파서 치료해야 하는데 돈이 없을 때에요. 이주노동자들이 일 하다가 다쳐서 큰 수술을 해야 하는데 돈은 없고, 아무리 모금을 해도 수천 만 원이 드는 병원비를 마련하기는 힘들죠. 건강보험이 안 되니까 어지간하게 큰 수술을 하면 천 만 원이 넘는 건 기본이에요. 그래서 돈 없을 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활동이 힘들고 지칠 때도 있지만 재미 있을때도 많아요. 무엇보다 각국의 다양한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에요. 이건 이 활동이 아니면 어디서도 맛 볼 수 없는 기쁨이죠. 다양한 나라에서 온 다양한 문화와 사고를 가진 친구들을 한국에 콕 박혀 살면서도 만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몰라요. 시야가 저절로 넓어지는 것은 덤이고요(웃음). 거기다 이주민들이 워낙 어려운 상황에서 살다보니 볼 것, 못 볼 것 다 봐요. 서로 지지고 볶고 하면서 지내니까 관계가 아주 친밀해요. 원래 가족보다 더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힘든 일이 많지만 배우는 것이 많고 보람된 일도 많기에 그 자리에 있는 것이리라. 그렇지만 모든 활동가가 그렇듯이 이란주라고 소진이 오지 않았을까, 도망가고 싶을 때가 없었을까, 외롭지 않았을까. 

"도망가고 싶을 때요? 매일 도망가고 싶은데 도망갈 곳이 없어서 못 간 거예요(웃음). 정말 어떻게 할 수 없을 때는 주저앉아서 하염없이 울기도 했어요.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줄줄 흐르는 거예요. 출근해서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보는데 눈물이 그냥 터져요. 당시 곁에 계시던 독일에서 간호사로 일하다가 온 자원활동가가 그래요. '너 우울증이야. 치료 받아야 해.' 그래서 이 증상이 우울증인 걸 알았어요. 

병원에 갔는데, 제가 의사한테 막 덤벼요. '당신이 뭘 알아야 치료를 해줄 거 아니야'라는 마음으로. 한마디로 오만한 환자인거죠. 약 부작용이 심했어요. 약을 먹을 수 없었죠. 증상이 있으면 출근을 하지 말고 치료하고 쉬어야 하는데 죽어라고 나와서 눈물 줄줄 흘리고 있으니까 옆에 있는 동료들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더 심각했던 점은, 어려운 일이 있어서 상담하러 온 이주노동자에게 제가 화를 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즈음부터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상담은 피하려고 해요."


필자도 쪽방촌 주민 공동체 활동을 할 때, 주민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판단력이 흐려진 적이 있다. 혼자 감당하기 힘들어 매일 술을 마셨다. 그것도 안 되면 아무나 붙잡고 수다를 떨었다. 하지만 순간적인 모면이었고 상황을 회피하는 것밖에 안 됐다. 어느 날부터 나도 모르게 우울한 감정이 몰려왔다. 아무리 노력해도 쉬 변하지 않는 사회는 허탈한 마음이 들게 하고도 남았다. 이란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때의 상황이 잠시 오버랩 되었다. 

보여주고 싶지 않은 아픈 모습을 보여주고 상처 받은 마음을 꺼내어 이야기 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 몇 달 전에 한 인터뷰 제안을 거절하고, 두 번째 제안을 했을 때야 마지못해 수락한 심정을 이해할 만 했다. 그럼에도 필자는 질문을 하고 대화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주민의 삶을 보여주고, 이주 활동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주민과 공존을 고민하다 
 
 2018년, '토크쇼 베프 서울' 이주민을 초대해서 직접 이야기를 듣는 소통증진 활동 중 강의하고 있는 이란주 대표.
 2018년, "토크쇼 베프 서울" 이주민을 초대해서 직접 이야기를 듣는 소통증진 활동 중 강의하고 있는 이란주 대표.
ⓒ 이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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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즈음에 '이주민'이라는 용어가 생겼어요. 노동을 비롯해 다양한 활동을 하는 이들이 늘어나던 시점이라 '이주민이 이 사회 안에서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어요. 그 전에는 '공존'이라는 고민 자체가 없었어요. 우리 사회가 이주민을 바라보는 시각은 '잠깐 일만 하고 갈 사람' 이었어요. 그래서 공존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았는데, 결혼 이주자가 늘어나고 자녀가 생기니까 고민을 하기 시작한 거죠. 

우리 단체(아시아인권문화연대)에서는 교육을 통해서 문제에 접근하는 활동을 하고 있어요. 이를테면 다문화교육,  공존교육, 상호문화교육 등 다양한 이름으로 사회통합을 제안하고 시도하는 거죠. 주요 참여자는 다수자 즉 한국 사람들이에요. 이주자의 인권은 이주자의 힘만으로 향상시킬 수 없어요. 이주자를 둘러싼 다수자들의 인식이 변해야 이주자의 인권 상황이 좋아져요."


자나 깨나 이주민 걱정만 하고 있는 이란주는 코로나19가 터지면서 학교가 멈추고 집합활동이 금지되자 이주민 자녀들의 학습역량이 떨어지고 언어발달에도 지장이 생기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냥 두고 볼 수만은 없어서 조금씩 모임과 교육 활동을 다시 시작하고 있다.  

코로나19를 피해갈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도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매일매일 이주민을 만나고 한국인을 대상으로 교육을 해도 이주민의 인권이 보장될까 말까인데, 역병이 왔다. 감옥에 갇힌 듯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절망의 시간을 보냈다. 

이주민 가정의 아이들이 언어 발달이 느려지는 것을 보고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 이란주에게 자신의 어릴 적 '꿈'은 무엇이었는지를 물었다. 돌아온 답을 들으며 잠시 처연해졌다. 

"이 나이에 꿈이라니요(웃음). 무엇이 꿈이다, 무엇에 소질이 있다 없다를 생각 할 겨를이 없어요. 재능이 있느냐 할 수 있느냐와 상관없이 무슨 일이든 부딪혀야 하고 대부분 스스로 해결해야 하니까요. 뭐든지 닥치면 다 해야 하는 상황은 활동가라면 누구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돈으로 해결할 수 없으니까요. 쌓인 스트레스가 많다보니 푸는 법이 딱히 정해져 있지 않아요. 있다면, 새로 생긴 스트레스가 그전 스트레스를 밀어내는 것이라고나 할까요?(웃음) 그냥 잊어버리는 거죠."

최고의 멀티플레이어가 되어야만 '활동가'의 자질이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최고의 멀티플레이어라니. 그것만큼 폭력적인 단어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 세상 어디에도 만능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평등하지 않고 불합리한 사회환경에 적응하며 살라고 만든 말일 것이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을 너무 많이 겪는 활동가에게 '소진'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이주민 옆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사람이기에 실무와 동떨어진 정책을 다루는 공무원과는 분명히 다르게 생각하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그런 기대 속에서 한국사회가 이주민을 바라보는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지를 물었다. 

"평등하게 보지 않는다는 점이죠. 이주민도 나랑 똑같은 인간이고, 똑같은 권리를 갖고 있고, 감정이 있고, 행복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에요. 그걸 인정하고 내가 행복하고 싶은 것만큼 이 사람도 행복하고 싶겠구나, 라고 생각하면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는데, 그게 잘 안 되고 있어요. 

내국인의 일자리를 이주민에게 다 빼앗기고 있다고요? 웃기는 X소리에요. '이주 노동자들이 일 하는 곳에 가서 일 할래요?' 라고 물으면 아마, 모두 안 간다고 할 거예요. 이주노동자들의 일자리는 그만큼 안 좋으니까요. 노동 환경을 개선하지 않아 한국인들이 일 하러 오지 않으니 정부나 기업은 외국인을 고용하는 거예요. 우리나라는 한국인이 일하고 싶어하는 일자리를 절대 이주노동자에게 주지 않아요. 안 좋은 일자리만 주면서 이주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빼앗겼다고 하는 건 다 거짓말이에요. 

한국은 예상보다 빨리 인구가 감소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주민을 늘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어요. 한국이 괜찮은 사회, 괜찮은 나라가 되려면 이주민과 평등하게 공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감소하는 인구문제를 감당하기 힘들어져요. 공존하려는 노력을 지금보다 훨씬 많이 해야 해요. 공정하지 않고 민주적이지 않고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이주민 뿐 아니라 한국 사람들도 살기 힘들잖아요"


이란주는 우리 사회의 더딘 변화가 현장에서 발로 뛰기만 한다고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주민이 처한 상황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이라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에 책을 쓰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 <말해요, 찬드라>(삶창, 2003.), <아빠, 제발 잡히지 마>(삶창, 2009.), <나의 미누 삼촌>(우리학교, 2019.)이다. 최근에 나온 르포 소설, <로 지나 노, 지나>(우리학교, 2020.)에는 국내에 1~2만 명 가량 되는 비자 없는 미등록 아이들이 겪는 이야기가 담겼다. 
 
 2021년 4월 30일. NUG 미얀마민족통합정부 출범 기념행사에 참여한 이란주 대표(맨 왼쪽).
 2021년 4월 30일. NUG 미얀마민족통합정부 출범 기념행사에 참여한 이란주 대표(맨 왼쪽).
ⓒ 이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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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에는 2020년 1월 부터 현재까지 4주에 한번씩 <이란주의 할 말 많은 눈동자>라는 타이틀로 이주민의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다. 이렇게 활발한 글쓰기를 하면서도 (이주민을 대하는 한국의 태도는) "아직 멀었다"고 딱 잘라 말했다.

"이주민을 대하는 평등한 시각이 열 발자국이라면 이제 겨우 두 발자국 간 것 같아요. 아직도 여덟 발자국을 더 가야 하니까 많이 가야하죠. 이주노동자 없이 우리 사회는 존속하기 힘들어요. 그들의 도움 없이 사회에 필요한 노동력을 해결할 수 없어요. 우리는 열악한 노동현장에서 일 할 사람이 부족해서 이주노동자에게 노동을 부탁했어요. 그 알토란같은 노동력을 쓰면서  존재를 인정하지도 않고, 존중하지도 않는 것은 이율배반적이죠. 이것은 우리사회의 양심이 걸려 있는 문제가 아닐까요?"

인터뷰 하는 내내 이주노동자에 대한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대화를 이어 간 이란주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아침이면 오늘 할 일을 머릿속에 담고 출근하지만, 막상 사무실에 나오면 계획한 일을 하기보다는 갑자기 생긴 일을 할 때가 더 많다는 이란주 활동가. 그의 헌신과 열정으로 우리 사회의 품격이 한층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필자의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AUD문자통역사회적협동조합의 문자통역을 이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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