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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아침부터 요플레를 많이 사시네요. 유통기간이 길지 않아요. 평균 1주일 정도예요."
"네. 요양원에 계시는 할머니를 만나러 가려고요. 원래 콜라를 좋아하셨는데, 요즘은 요플레를 좋아하신다네요. 다른 어르신들도 계셔서 함께 드시라고요."


동네 가게에서 일하시는 직원과 할머니 요양원 얘기를 하면서 가판대에 놓인 요플레를 모두 샀다. 나의 할머니는 100세를 넘긴 초고령 노인이다. 당신이 기억하는 실제 나이는 호적보다 더 많다고 말씀하신다. 분명한 것은 주민등록상 나이가 104세이니, 99세 백수(白壽), 100세 상수(上壽)도 훨씬 넘은 나이를 가진 분이 내 할머니다.

작년 코로나 발생 직후 2020년 2월에 가족들은 할머니의 요양원행을 결정했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할머니는 홀로 거동과 생활이 가능했다. 할머니의 자식 중 맏자식이었던 아들, 내 아버지는 10년 전에 돌아가셨다.

자식이 부모를 앞선 슬픔이라, 아버지의 부고를 한 달이 지나서야 말씀드렸다. 지긋지긋한 가난한 삶에 자식새끼 제대로 공부 한번 시켜보지 못하고 평생을 뱃사람으로 살게 했다고, 무식한 부모 만나서 제 명대로도 살지 못했다고 통곡하셨다.

코로나 백신 2차 접종은 언제쯤? 

1910년대, 일제강점기 시대에 섬에서 태어나서 평생을 섬에서 살아온 할머니의 삶은 어떤 것일까. 나는 도저히 그 삶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가늠할 수가 없다. 단지 나이 팔순이 넘어서야 도시에 있는 딸의 거처로 옮기고 요양원에 계시기까지 섬 생활보다 더 닫힌 세상에서 당신의 여생을 보내는 할머니의 현재를 볼 뿐이다.

요양원 입소 전, 일주일간 나는 딸과 함께 할머니를 매일 방문했다. 방안에만 계셨어도 방송을 통해 코로나라는 전염병을 아셨다. 젊은 너희들이 건강해야 된다고 몇 번을 당부하셨다. 당신 젊었을 적에는 호열자(콜레라균)라는 전염병으로 섬에서도 사람이 많이 죽었다며, 네 할아버지도 그때 돌아가셨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증손녀가 되는 딸은 왕할머니로만 알고 있다가 일주일간의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서 새로운 정이 쌓여서 막상 요양원에 들어가는 날에는 눈물 바람을 하며, 할머니를 만나지 않았다. 단지 전날 군고구마와 귤을 가지고 가서 할머니와 맛있는 얘기를 주고받았다. 자주 찾아뵙겠다고 곰 모양의 원터치 조명등을 선물로 드리고 어두컴컴하게 계시지 말라고 당부도 했다.

1년이 지난 올 2월, 설날을 앞두고 며느리인 엄마와 나는 할머니 면회를 신청하고 요양원을 찾았다. 아직 코로나 백신이 시작되기 전이었지만, 지역확진자가 다소 줄어든 때여서 15분간의 만남이 가능했다. 다행히도 할머니의 총기와 기력이 강건해서 식도 고향섬 얘기, 손주들 얘기에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리고 4월에 코로나 백신주사 1차를 맞았다고 전해 들었다.

4월 1일부터 시작된 75세 이상 노령자들의 1차 백신 신청접수 마감 소식을 듣고 할머니의 2차 접종 여부와 건강 근황이 궁금해서 요양원에 전화를 했다. 1차 때와 같이 초고령자가 많아서 의료진이 직접 요양원으로 와서 백신주사를 놓는다고 했다. 대상자 모두 2차 접종 신청이 끝났고, 6월 4주 차에나 접종하며, 간단한 면담은 가능하다고 해서 길을 나섰다.

정신적 만남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요즘은 한국 날씨가 아열대지방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종종 내리는 따뜻한 비에 황사 섞인 바람까지 대기권의 평균온도 상승이란 표현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할머니의 요양원 가는 길은 슬픈 추억이 가득하다. 친정아버지,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생전에 누워계셨던 병원 가는 길과도 통한다. 뚝 떨어져 있는 길이 어디 있겠냐고 묻겠지만 유독 사람과의 슬픈 이별 추억 속에 놓인 길은 지글거리는 태양 빛에 누워있어도 늘 축축할 뿐이다.

면담 시간에 맞춰 도착하자마자 할머니 역시 바로 나오셨다. 원래는 면담신청자가 유리문 안쪽으로 들어가 있는데, 외부인은 내원규칙(발열체크 및 서류작성)을 먼저 작성해야 해서 할머니를 먼저 안쪽으로 모셨다. 할머니는 누군가의 면회 소식을 사전에 몰랐다고, 단지 휠체어로 이동하는, 일종의 운동으로 알고 내려오셨다 했다. 내가 누구냐고 물으셨다.

"할머니, 저예요. 향숙이에요. 엄마는 안 오고 저 혼자 왔어요."
"내가 눈이 잘 안 보이고, 귀가 잘 안 들려서 몰라."
"제가 안 보이세요? 요양사님, 물어봐 주세요. 제 이름을 기억하는지요. 4개월 전에 왔을 때만 해도 저를 바로 알아보셨는데, 안 보이신다고 하시니 걱정돼요. 왜 그럴까요."


15분간의 면담 내내, 할머니와의 대화는 요양보호사의 도움으로만 이루어졌다. 중간중간 나를 아는지 물어보아도, 내 얼굴을 보면서 대답하는 게 아니고 보호사 쪽을 보면서 들었던 이름을 기억하셨다.

첫 만남이 단지 3~4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오늘 보니 할머니의 육체가 허락하는 정신적 만남은 몇 년이나 지난 듯해서 슬픈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면담 시간이 아까워서 보호사의 도움을 받아 계속 대화를 주고받았다.

"할머니, 누구를 보고 싶으세요?"
"우리 새끼들이지. 손주들이 보고 싶지."

"할머니, 혹시 가고 싶은데 있으세요?"
"식도(고향섬)도 가고 싶은데 걸을 수가 없응게."

"할머니, 지난번 주사 맞고서 아프지 않았어요?"
"어. 하나도 안 아팠다."

"할머니, 그럼 이번 두 번째 주사 맞으면 마스크 벗고 우리랑 손도 잡을 수 있데요. 제가 꼭 모시고 식도 갈게요. 아빠가 살던 집 기억하죠? 엄마가 새집처럼 페인트칠 다 했어요."


시간을 내어서 무슨 일이 있어도 할머니를 고향 섬으로 모시고 가야겠다 결심했다. 성당의 노인들을 위해 10여 년이 넘도록 차량 봉사를 하고, 무료급식센터에서 도시락 만드는 봉사활동이 무슨 대단한 일처럼 보인다.

이런 내가 정작 내 할머니의 소망, 그것도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는 소원 하나를 제대로 들어주지 못한다면 말이나 되는가. 아프리카 속담에서처럼, 노인은 장구한 세월을 견디며 살아온 뜨거운 심장을 가진 도서관이다. 내 할머니는 100년이 넘는 역사의 증인이니 한 사람의 가고 옴에 아름다운 흔적을 남겨드리는 것이 도리리라.
 
"할머니, 코로나 2차접종 끝나면 손잡고 고향섬 가요."
 "할머니, 코로나 2차접종 끝나면 손잡고 고향섬 가요."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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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서 엄마께 할머니의 상황을 전하니, 다음 주라도 모시자고 했다, 딸에게 착잡한 심정을 토로하니, 할머니의 손 흔드는 그림 한 장을 보내주며 기운 내라 했다. 자기도 도울 일이 있으면 당장 내려오겠다는 딸의 고마운 마음이 잠시 나의 슬픔을 덜어냈다.

나의 일정표에 있는 반드시 지킬 약속(Must Do)칸에 4대를 잇는 네 여자의 여름 여행을 기록했다.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딸과 함께 나의 고향 섬, 아름다운 1박 여행!"

태그:#요양원, #백세노인, #코로나2차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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