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 포스터.

영화 <내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 포스터. ⓒ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할리우드를 대표할 만한 각본가에서 좋은 연출자로 진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존 말코비치 만들기> <이터널 선샤인>의 각본가 찰리 카우프만이 선례를 보였고, <어 퓨 굿맨> <소셜 네트워크> <머니볼>의 각본가 아론 소킨이 뒤를 따랐다. 두 각본가는 각각 <아노말리사>와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이라는 빅 타이틀로 감독으로서의 명성도 드높였다. 그들 사이에 테일러 쉐리던이 있다. 

그는 20여 년 동안 단역 활동을 전전하다가 2015년 <시카리오>로 일약 주목받는 각본가 반열에 오른다. 이듬해 <로스트 인 더스트>로 명성이 수직 상승했고, 다시 이듬해 <윈드 리버>로 연출(각본도 맡음) 데뷔까지 훌륭하게 해냈다. 그리고 또다시 이듬해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 각본까지 마쳤다. 4년 사이에 각본가 데뷔, 명망 있는 각본가, 연출가 데뷔까지 이뤄낸 것이다. 

그리고 2021년 전격적으로 연출(각본도 맡음)작 한 편과 각본작 한 편을 선보였다. <내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과 <위드아웃 리모스>, 두 편 다 테일러 쉐리던의 명성과 그를 향한 기대에 못 미치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럼에도 <내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은 기대를 많이 모았는데, 안젤리나 졸리 등 유명 배우들이 다수 포진했거니와 그가 그간 관심을 쏟았던 주제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작품은 과연 어떠했을까, 들여다보자. 

킬러와의 추격전, 화마가 덮치는 숲마을

공수소방대원 한나는 1년 전 본인이 책임졌던 산불 진압 작전에서 세 아이를 잃었다. 바람의 방향을 잘못 보는 바람에 눈앞에서 보고도 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후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산불 감시탑에 배정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 길 잃은 듯한 소년 하나가 보였는데, 코너라는 이름의 그는 킬러들에게 쫓겨 마을로 가고 있던 중이었다. 한나는 코너와 함께 마을로 향한다. 

코너는 아빠가 살해당하는 모습을 눈 앞에서 봤는데, 두 킬러 잭과 패트릭이 지령을 받고 지방검사를 죽인 후 연관된 자를 쫓아 죽인 것이다. 그가 바로 회계사로 일한 코너의 아빠였다. 왜 죽고 죽여야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코너의 아빠는 코너에게 자신이 좋은 일을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사실이 알려지면 미국이 뒤집어질 거라고도 했다. 여하튼 킬러들은 코너의 아빠를 죽이고 코너를 쫓는 한편 코너가 중요한 내용을 알리려고 한 아빠의 매형 에단에게 향한다. 에단은 부보안관이었고 그가 있는 곳은 미국 서부 몬타나 주였다. 

두 킬러는 코너의 아빠가 빼돌리려고 한 중요한 내용을 은폐해야 하기에 코너뿐만 아니라 부보안관 에단의 마을을 없애 버리다시피 해야 했다. 하여, 그들은 사람들 이목도 분산시키면서 혼란을 야기하고 마을도 없애 버릴 요량으로 산불을 낸다. 나무가 빽빽한 숲에 이내 큰 화마가 닥치는데... 

이 영화의 아쉬운 점들

테일러 쉐리던은 그간 '미국'을 가운데 두고 고통과 슬픔과 희망을 이야기해 왔다. 적절하고 촘촘하게 직조된 상징과 비유 그리고 심장 쫄깃하게 하는 리얼한 액션이 영화 볼 맛을 나게 했다. 각본은 물론 연출까지 말이다. 그런데 이 영화 <내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은 그의 전작들에 미치지 못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주로 촘촘하지 못한 면에서 그랬다. 

러닝타임이 1시간 30분가량으로 짧은 축에 속함에도 종종 시간을 때우려는 의도 아닌가 싶을 정도로 뜬금없는 장면이 튀어 나왔다. 스토리상 복선 또는 캐릭터 설명인 듯 성의 있게 표현한 장면이 결국 아무런 쓸모가 없어지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두 킬러가 무슨 연유로 죽이고 쫓아오는지 구체적인 이야기를 전혀 전해 주지 않아 답답하기도 했다. 허술한 듯 구멍이 숭숭 뚤린 느낌인 한편, 다른 누구도 아닌 테일러 쉐리던이기에 의도를 한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굳건한 믿음이 생기진 않았다. 

이를테면, 그가 '국경 3부작'이라고 불리는 세 편의 영화(시카리오, 로스트 인 더스트, 윈드 리버)를 통해 보여주려 했던 미국의 속살과 고통 어린 이들의 면면 그리고 희망의 불씨까지 이 영화에서도 이어가려 한 것 같은데... 결국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그의 전작들보다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포지션으로 보기에도 무리가 있다. 보기 힘든 직업인 공수소방대원의 이야기를 풀어낸 것도 아니고, 킬러가 미국 서부 숲속으로 쫓아와 펼치는 긴박한 액션을 선보인 것도 아니다. 

이 영화의 미덕들

이 영화의 미덕은 다른 데 있다. 눈앞에서 아이가 죽어가는 걸 구할 수 없었던 때의 트라우마로 힘들어하는 한나에게, 코너는 '구원'과 다름없다. 그녀가 본인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아이를 목숨 걸고 지키는 게, 곧 그녀 자신의 목숨을 살리는 일이었다. 죽은 세 아이를 대신할 수도 되살릴 수도 없겠지만, 코너를 살려내며 트라우마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아이'라는 데에서 그는 화마에 휩싸인 마을에 핀 희망과 다름없다. 하지만 그는 고아이고 한나는 그를 지켜야 할 의무가 남아 있다. 

한편, 여성 캐릭터가 도드라진다. 코너를 지키려는 한나, 그리고 에단의 아내도 큰 역할을 수행한다. 주체적이고 강인하며 믿음직하다. 예전이라면, 여성 캐릭터가 할 수 있는 최대치가 정신적인 보살핌 정도였는데 이젠 육체적인 해결까지 나아가는 바 이 영화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하겠다. 반면 남성 캐릭터들은 노소를 막론하고 별 힘을 쓰지 못하거나 킬러들처럼 악랄하기만 할 뿐이다. 

그럴 순 없겠지만, '테일러 쉐리던'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내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를 보면 달리 보이는 게 많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수작이라 칭하긴 힘들 테지만 낙제점은 면할 수 있을 테다. 있어 보이는 평작 정도엔 포지셔닝이 가능하지 않겠나 싶은 것이다. 

그럼에도 적당히 즐기는 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지루함을 전혀 찾아볼 수 없거니와 시종일관 뒤를 기대하게 하기에 시간이 금방 가 버린 느낌이다. 대신, 영화를 다 보고 복기하지 않아야 한다. 허술한 부분과 애매한 느낌이 그때 발견되기 때문이다. 테일러 쉐리던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며...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singenv.tistory.com에도 실립니다.
내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 테일러 쉐리던 트라우마 킬러 추격전 산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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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책에 관련된 어떤 거라도 환영해요^^ 영화는 더 환영하구요. singenv@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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