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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6월 10일 독립만세시위가 올해로 95주년을 맞는다. 그동안 초·중등 교과서에서 일제강점기 '6·10만세운동'이라고 간략히 언급돼 왔다. 2020년 12월 8일 '각종기념일등에관한규정'이 국무회의를 통과, 국가기념일(주관 국가보훈처)로 지정되어 올해 처음으로 6·10만세의거는 국가기념일로서 그 행사를 하게 된다.

이날은 융희 황제(순종)의 인산일(因山日, 장례일)이었기에 전국 각지에 망곡단(望哭團), 봉도단(奉悼團) 등이 조직되어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의 타계를 애도했다. 9년 전 광무 황제(고종)의 독살설로 더욱 거세게 일어났던 3·1만세의거를 겪은 일제는 경찰을 동원해 삼엄한 경계를 폈다.

하지만 인천·개성·강경·홍성·공주·당진·전주·고창·구례·순창·통영·마산·하동·원산·이원·평양·신천 등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났고, 일제강점기 두 번째 전국 규모의 반일만세의거였다. 이 의거로 약 5000여 명이 연행되었고, 뒤이어 이를 주도했던 조선공산당 간부를 중심으로 100여 명이 검거되어 고초를 겪었다.

이날 전북 정읍에서는 일장기에 검은 리본을 매달아 조의를 표하라는 조선총독부 지시를 따르지 않고 백기(白旗)를 게양해, 정읍 거리가 온통 백기의 물결을 이룬 이색적인 반일의거가 있었다.

"백기를 세우세, 백기를 세우세"

1926년 6월 10일 전북 정읍군 정읍면 시기리, 새벽 같이 못자리에 가서 모를 내기 전 작업인 '피사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농부 최태환(崔泰煥, 1897~1984)은 인근 일본인 집에 내걸린 이상한 일장기를 보았다.

'왜 깃대에 검은 베를 동여매고 기를 달았을까?' 궁금해 한 최태환이 길가에 있던 일본인에게 물어보니, '조선의 마지막 왕의 국장일이라 애도를 표하는 것'이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리하여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타계하여 국장을 치르는 날임을 알게 되었다. 최태환은 늦은 아침밥을 먹은 후 이웃에 사는 아우들을 불렀다.

"오늘은 우리 임금께서 영원히 지하로 귀토(歸土)하는 날이니, 백기(白旗)을 세우고, 노점(露店)을 보지 않도록 해라."

이후 그는 베잠방이를 입은 채 정읍시장으로 가서 '백로지(白露紙)' 20장을 구입, 이를 200매로 만들어 백기를 매달 흰 천이 없는 집이 있으면 나눠주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제일 먼저 정읍 청년회관으로 가서 "국장일이니, 백기를 세우자"라고 제안한 후 급히 시장으로 가서 옥양목 한 폭을 사왔다.

그는 "순사가 와서 누가 백기를 세웠냐고 물으면, '최태환이가 세우라 했다'고 해라"라고 당부한 후 동아・조선일보 지국으로 가서 지국장에게 백기 세우기를 권했다. 또 끝내 일본기를 세우려고 한 집 3곳에 가 일본기를 빼앗아 찢고, 백기를 세울 것을 선전했다. 그는 거리를 다니면서 "오늘은 우리 임금께서 영원히 지하로 귀토하시는 장례일이니, 백기로 조문합시다"라고 외치면서 오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백기를 세우세, 백기를 세우세. 우리 임금 장일(葬日)에 백기를 세우세"하면서 백로지 한 절씩을 나눠주고 급히 돌아다녔다.

이렇게 하기를 두어 시간 지나자 정읍 거리는 어느새 백기의 물결로 가득 찼다. 이를 알게 된 정읍경찰서 순사들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백기를 내리라고 소리쳤고, 주동자를 붙잡기 위해 혈안이 됐다.
 
‘정읍에 백색기’(「시대일보」. 1926. 06. 14)
 ‘정읍에 백색기’(「시대일보」. 1926. 06. 14)
 
그날의 모습을 <시대일보> 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
 
井邑에 白色旗
인산 당일에
[정읍] 순종효황제(純宗孝皇帝) 인산 당일인 지난 10일 오전에 전라북도 정읍(全北 井邑)에서는 각 상점(各商店)과 각종 음식점까지 일제히 철시(撤市)를 한 후 시가지의 각 상점은 물론 방방곡곡의 집집마다 옥양목(玉洋木)으로 순백색기(純白色旗)를 만들어 달고 애도의 뜻을 표하였으며, 뒤를 이어 동 11시에는 당지 청년회관(靑年會館)에서 사회 각 단체(社會各團體)와 학생시민연합(學生市民聯合)으로 성대한 요배식(遙拜式)을 거행하였다고.

靑年 一名 檢擧 [정읍]
별항 보도한바 정읍에서는 집집이 다 흰기[白旗]를 달아 애도(哀悼)를 표하였다는데, 당지 경찰서 고등계(高等係)에서는 돌연이 계원이 출동하여 시기리(市基里)에 거주하는 최태환(崔泰煥)이라는 청년 한 명을 검거하여 엄중한 취조를 하는 중이라는데, 그 자세한 말은 이직 알 수 없으나 전하는 말을 들은 즉, 전기 최태환이가 그날 마침내 볼일이 있어 정거장(停車場)까지 갔다 읍내(邑內)로 돌아오는 길에 본정통(本町通)에서 직조(織造) 영업하는 풍산사(豊産社) 주인 안봉일(安奉日)이가 조기를 달려고 나오다가 그 청년을 만나 정거장통(停車場通)에는 어떻게 기를 달았더냐? 물으매, 전부 흰기[白旗]를 달았다고 말을 하여 조기를 달지 아니 하였으므로 그와 같이 계속(繼續) 취조 중이라는데, 장차 이 사건의 발단(發端)이 커짐에 따라 자못 주목할 뿐이라고.
(<시대일보>. 1926. 06. 14)

그날 오후 4시가 넘자 최태환은 자진해 정읍경찰서로 들어섰다.

"오늘 우리 임금 국장일에 백기 선전을 한 사람을 찾고 있습니까?"
"하, 그놈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구려."
"바로 나요."

이후 최태환은 일본 경찰들에게 심한 구타를 당했고 신문을 받았다.

"무슨 일로 백기는 선전하고, 일본기는 못 세우게 할 뿐만 아니라, 왜 국기를 찢었느냐?"
"백기를 선전함에 대하여는 우리 조선은 복(服)을 입는 법이 색이 있는 것은 입지 않으므로 국장일이기에 오직 흰 기만을 선전한 것이며, 일본 국기는 이런 의미에서 타당치 못하므로 못 세우게 하다가 내 말에 응치 않으려는 사람과 싸우다가 찢은 것이오."
"네가 백기 선전을 하면서 만세도 부르려고 준비했다니, 그 말이 사실이냐?"
"우리 임금 국장일에 조문하기 위하여 백기만 선전했지만 준비만 있었다면 만세도 불렀을 것이오."

이후 며칠 동안 최태환은 백기 선전을 공모한 자가 없는지 신문을 당했다. 그가 유치장에 구금된 지 달포가 지나자 당시 정읍군 정읍면 부면장 등 수십 명의 군민들은 그를 풀어줄 것을 요청하러 정읍경찰서장을 찾아갔다. 경찰서 주변을 둘러싼 정읍 군민의 기세에서 전주·고창처럼 6·10만세시위가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에 경찰서장이 최태환을 서장실로 불렀다.

"네가 국기 셋을 찢어버린 것에 대하여는 적어도 30년 징역에 처할 것이나 국장 시에 한 일이니까 특사하여 내보내는 것이다.……."

최태환은 정읍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된 지 46일 만에 풀려났다.

최태환 지사, 95년 만에 포상될 것인가

최태환 지사의 행적을 기리던 독우(獨愚) 장봉선(張奉善, 1902~1972)은 <영산실록(瀛山實錄)>이란 이름으로 책을 간행했다. 독우 선생은 정읍 출신 사학자로 혼자 힘으로 1936년 <정읍군지>와 <전봉준실기>, 1939년 <영산실기> 초간본, 1960년 <영산실기> 재간본 등을 저술했다. <영산실기> 재간본 서문에는 그 사유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이 책이 과거 일정말엽에 발간되었는데, 다시 재간(再刊)된 이유는 그가 항일전선에 입각, 고투(苦鬪)하여 우리 민족의 정기를 북돋웠건만 그 당시 포악무도한 일제는 치안상 영향이 크다는 이유 아래 사실을 그대로 두고는 간행을 허가할 수 없는 조건을 걸고, 이를 전부 삭제하고 인쇄하도록 위협함으로써 만부득이 대일항쟁 등의 조목은 놈들의 무리한 요구에 침해당함은 만유감(萬遺憾)으로 생각하여 금일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래서 만시지탄이나마 항일사항(抗日事項) 몇 조목과 해방 후의 언행 몇 가지를 첨가재간(添加再刊)하고…."

최태환 지사는 광복 후 40여 년 동안 정읍에서 씨앗 장사를 하면서 4남매를 훌륭하게 키웠다. 또 애국애족하는 일에 솔선수범한 것이 언론에 다수 보도돼, 정읍시장이 그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기도 했다.

지난 2001년 최태환 지사의 따님과 조카가 지사의 공적을 정리해 국가보훈처에 포상을 신청했지만 '자료미비'를 이유로 포상되지 못했다.
 
최태환 지사의 막내딸 최영임 여사
 최태환 지사의 막내딸 최영임 여사
ⓒ 이태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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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약 20년이 지난 2020년 10월 하순, 혼자 거동하기 불편한 한 할머니께서 서류 뭉치가 든 무거운 손가방을 들고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를 찾아왔다. 최태환 지사의 막내 따님 최영임(89) 여사였다.

"저희 선친께서는 순종 황제의 인산에 정읍 사람들에게 백기를 달게 하는 과정에서 일장기를 3차례 찢고, 흰 천이 없는 집에는 백지를 주며 백기를 달도록 해서 정읍 읍내는 온통 백기를 게양했다는 것이 당시 신문에도 나와 있습니다.

선친은 소요죄와 일장기 모독죄로 정읍경찰서에서 심한 구타를 당하고 고문을 받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청원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유치장에서 46일 만에 간신히 풀려났다고 합니다.

이 사실은 <정읍군지>에 나와 있는데도 포상 신청을 하면 서류가 미비하다고 통보를 해 오니, 20여 년 동안 화병이 생겨 저도 얼마 안 있어 선친 곁으로 갈 것 같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선친을 뵙게 될 때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선처해 주십시오."

필자는 최태환 지사에 대한 포상신청을 다시 하면서 '정읍백기사건' 진술서를 제출했다. 이에 국가보훈처는 아래와 같이 답신해 왔다.

"이번에 귀하께서 제출한 자료(진술서)를 공적심사에 반영하고, 면밀한 검토와 자료 재조사를 거쳐 최태환 선생을 2022년 3·1절 계기 공적심사에 부의하고, 심사결과는 2022년 2월경 공문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같은 소식에 최 지사의 막내따님은 "20여 년 동안 너무나 애태웠던 일이라 포기하고 하늘나라로 가서 선친께 용서를 구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코로나 예방접종하고 내년 3월을 기다리겠다"고 하시면서 "국가보훈처의 선처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내년 3월 최 지사의 공적이 인정돼 막내따님을 비롯한 후손들의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
 
 최태환 지사의 행적을 다룬 중앙일보 기사(1983.6.10).
  최태환 지사의 행적을 다룬 중앙일보 기사(1983.6.10).
ⓒ 이태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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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이태룡님은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입니다.


태그:#최태환, #독립운동, #정읍백기사건, #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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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한말 의병을 30여 년 연구를 해 오고 있습니다. 대표 저서: 의병 찾아가는 길1.2, 한국근대사와 의병투쟁 1~4(중명출판사) 한국의병사(상.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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