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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강원도 고성 산불 당시 정부는 국가재난사태를 선포했다. 생명이 달린 위급한 재난 상황 속에서 관련 정보를 제공받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면 믿겠는가. 국가재난사태 속에서 농인은 철저히 배제됐다. 지상파 방송 3사의 재난 뉴스 속보 어디에도 수어 통역은 없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재난방송을 주관하는 국영방송 KBS는 물론, 공중파 3사 뉴스 속보에서 수어 통역이 전혀 없는 상황"이라며 "포항 대지진 이후 장애인 안전에 대해 달라진 점이 없다"고 호소했다. 수화언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농인의 정보 접근권을 보장하라는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장애의 벽을 허무는 사람들(장애벽허물기)'은 이런 문제점들을 지적하며 꾸준히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에 차별 진정서 제출해왔다. 2020년 4월 20일, 결국 국가인권위원회는 진정서를 받아들였다. 인권위는 간판뉴스에 수어 통역을 제공하지 않는 것은 농인에 대한 차별임을 인정하며, 지상파 방송 3사 메인뉴스에 수어 통역을 제공할 것을 권고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지상파 3사는 메인뉴스에 한해 수어 통역을 포함한 방송을 송출키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마침표가 아니다. 농인의 정보 접근권 문제는 아직 갈 길이 한참 멀었다.
 
KBS 뉴스의 수어 통역사의 모습.
 KBS 뉴스의 수어 통역사의 모습.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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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SBS, MBC는 '방송 화면의 제약'과 '비장애인 시청권 보장'을 이유로 수어 통역 제공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중 KBS는 수어 통역 방송편성 비율이 현행 방송법 의무 할당량 5%를 넘는다는 답변을 내놓기도 했다.

이는 영국의 공영방송인 BBC와는 상반되는 행보였다. KBS와 BBC는 수신료의 가치를 지키며 공정한 공영방송을 추구한다는 공통 지향점을 가졌다. 그러나 두 국영방송이 농인 시청자를 대하는 자세는 완전히 달랐다.

영국은 모든 시청자를 포용하고 디지털 격차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2014년부터 '디지털 통합 전략'을 펼쳐왔다. 그 흐름에 따라 BBC는 수화로 전달하는 뉴스 영상을 제공하는 등 수어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했다. 반면 KBS는 수어 통역 화면이 방송 화면을 가린다는 이유로 수어 통역을 제공하지 않거나, 수어 통역의 크기를 전체 화면의 1/16로 줄였다.
 
BBC 뉴스의 수어 통역사 모습.
 BBC 뉴스의 수어 통역사 모습.
ⓒ 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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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 통역, 농인의 '편의' 위한 '서비스'?

혹자는 자막을 제공하면 되는 것을 왜 수어 통역까지 하느냐고 묻지만, 사실 한글 자막과 수어 통역은 다르다. 수어는 단어 번역이 아닌 의미 설명에 가깝기 때문이다. 예컨대 '화합하다'라는 단어의 수어 표현은 '사람과 사람이 함께한다'라는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어로 구성된 자막과 수어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한국수화언어법' 제1조에는 한국수어가 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갖는 별개의 공용어라는 사실이 명시돼 있다. 농인에게 모국어는 한국어가 아니라 한국수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연세대학교 남기현 교수도 농인은 한국어 자막만으로 뉴스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짧은 자막으로는 뉴스의 전체 내용을 알 수 없을뿐더러, 전체 자막이 제공된다고 해도 그 내용이 깊이 있게 전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상 속에서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에게 한글 자막은 낯설고 어려울 수 있다는 걸 이해해야 한다.

심지어 뉴스는 정보 제공이라는 확실한 성격을 띤다. 신속 정확한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뉴스라면, 모든 시청자의 정보 접근권 보장이 더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방송법 제6조 제2항에는 성별·연령·직업·종교·신념·계층·지역·인종 등을 이유로 방송편성에 차별을 두어서는 아니 된다고 명시되어 있다. 동조 제3항에 따르면, 방송은 국민의 알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보호·신장하기 위해 힘써야 하는 의무가 있다.

뉴스에서 수어 통역을 제공하지 않는 것은 농인의 알권리를 침해하는 차별 행위이다. 방송, 특히 뉴스에 대한 접근권 보장은 '편의'가 아니라 '권리'를 위한 것이다.
 
MBC 뉴스의 수어 통역사의 모습.
 MBC 뉴스의 수어 통역사의 모습.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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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인의 시청권을 보장하라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는 말 그대로 '권고'일 뿐이었다. 아직도 재난, 기상, 선거, 속보, 특보에는 수어 통역이 제공되지 않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그 근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뉴스 우측 하단에 위치한 작은 파란색 동그라미. 우리에게 익숙한 수어 통역사의 모습이다.

아직도 지상파 방송 3사 메인뉴스의 수어 통역 화면은 전체 화면의 1/16만을 차지하고 있다. 농인의 의사소통은 손 모양뿐만 아니라 입 모양, 몸짓, 표정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실현된다. 구화(口話)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입 모양의 변화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서 작은 동그라미 안에 갇힌 통역사의 모습을 보기 위해 농인들은 TV에 바짝 다가가서 뉴스를 시청한다고 한다.

아직 풀어야 할 숙제가 산더미다. 인권위의 권고에 대한 방송 3사의 목전지계(目前之計)격 대처가 아쉽다.

함께 가는 건 어떨까
 
중앙방역대책본부의 코로나19 브리핑 속 수어통역사의 모습.
 중앙방역대책본부의 코로나19 브리핑 속 수어통역사의 모습.
ⓒ 중앙방역대책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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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코로나19 재난 브리핑 방송에서의 수어 통역이 이목을 끌고 있다. 처음으로 수어 통역사 모습이 축소되지 않은 채 등장했기 때문이다.

국내 방송에서 새롭게 등장한 장면의 가시적인 효과는 컸다. 남기현 교수는 브리핑 이후 수어에 관심을 보이거나 직접 배우려는 사람도 많아졌다고 언급했다. 코로나라는 범세계적 재난 사태 속에서 비로소 농인의 기본권이 집중 받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농아인협회는 코로나 브리핑 이후 인터뷰가 늘긴 했지만, 아직 농인 문화에 대한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특히 "통역사는 왜 마스크 안 쓰냐"는 잦은 지적에 농인은 큰 상처를 받는다고 한다.

수어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표정, 입 모양, 손동작이 다 같이 가야 해서 통역사는 마스크를 쓸 수 없다. 이러한 변화가 조금 낯설다고 해도, 함께 가는 건 어떨까. 대중의 관심이 이어져서 농인 권리를 위한 외침에도 닿길 바란다.

파란 동그라미를 탈출해서 옆자리에 서기까지, 흘러온 몇십 년을 기억하자.

태그:#수어통역사, #뉴스, #수어, #농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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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언론홍보영상학부 재학 중인 김도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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