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5.31 07:15최종 업데이트 21.05.31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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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3일 베를린에서 열린 '미친임대료' 및 '도이체보넨 몰수' 시위 ⓒ 이유진


지금 베를린에서는 약간 혁명적 분위기가 감돈다. 부동산 기업 국유화를 위한 시민투표 운동이 절정에 달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독일 최대의 부동산 기업 두 곳이 합병을 발표했다. 기업의 '지속가능성'과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면서.

독일 1위 부동산 기업인 보노비아(Vonovia)와 2위 기업 도이체보넨(Deutsche Wohnen)은 지난 25일 베를린 시청에서 합병 계획을 발표했다. 보노비아는 전국에 주택 40만 채, 그 중 베를린에 4만 채를 소유하고 있다. 도이체보넨은 전국 15만 채 중 베를린에서만 11만 채를 가지고 있다. 두 기업이 합병되면 베를린 전체 임대주택의 9%를 소유하는 초대형 부동산 기업이 된다.
 

독일 최대 부동산회사 보노비아와 도이체보넨이 합병을 결정했다. ⓒ vonovia/Deutsche Wohnen


기업 합병을 발표한 시기와 장소, 그 내용에 이목이 집중됐다. 기자회견은 베를린 시청에서 미하엘 뮐러(Michael Müller) 베를린 시장과 함께 진행했다. 부동산 기업의 국유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진 지 이틀만이었다. 두 기업은 합병 소식과 함께 사회적이고 세입자를 위한 베를린 주택 정책에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이들은 "사회적이고 지속가능한 주택정책을 위해 책임을 지겠다"라며 "베를린 최대의 부동산 기업으로서 베를린시와 '주거를 위한 미래·사회협약(Zukunfts- und Sozialpakt Wohnen)'을 맺었다"라고 발표했다.

협약에 따르면 두 기업은 합병 이후 ▲ 향후 3년간 임대료를 최대 1% 인상하고, 이후 2년간 인상 폭도 인플레이션 수준을 유지하며 ▲ 베를린에 주택 1만 3000여 채를 신축하고 ▲ 베를린시에 주택 2만 채를 매매할 예정이다. 그 외에도 신축 주택의 일부를 사회주택으로 활용한다.
 

베를린 시청에서 열린 보노비아와 도이체보넨 합병 기자회견.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미하엘 뮐러 베를린시장, 보노비아 대표, 베를린시 재정담당관, 도이체보넨 대표. ⓒ 베를린시


롤프 부흐(Rolf Buch) 보노비아 대표는 "베를린 시민들이 우리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는 걸 안다. 그래서 새롭게 시작한다는 신호를 확실히 보내고자 한다"라며 "베를린시와 함께 공동의 미래를 도모하고, 특별한 제안을 하기로 결정했다"라고 말했다.

미하엘 찬(Michael Zahn) 도이체보넨 대표도 "기업의 이익을 도시에 다시 투자하겠다. 노후주택을 리모델링하고 새 주택을 짓는데 지속가능성과 파트너십이 필요하다"라며 "법적 조치가 아니라 자율적으로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고자 한다. 그게 더 낫고 빠른 길"이라고 강조했다.


두 기업의 합병과 사회적인 행보 뒤에는 베를린을 휩쓸고 있는 부동산 기업 국유화 운동이 있다.

'부동산 기업 몰수' 시민운동

지금 베를린 도시 곳곳에 '도이체보넨 몰수(Deutsche Wohnen & Co enteignen)' 시민 운동의 깃발이 나부낀다. 이들은 베를린에서 주택 3000채 이상을 소유한 부동산 기업을 국유화(Vergesellschaftung)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베를린 최대 부동산 기업인 도이체보넨을 상징적인 이름으로 내세웠다.

비현실적으로 들리지만 방법이 있다. 시민투표다. 시민들의 직접 투표로 주요 정책 결정을 내릴 수 있다.

2019년 시민투표를 위한 1차 관문으로 7만여 명의 서명을 받았다. 이후 베를린시는 해당 사안이 법적으로 시민투표 대상이 되는지 심사했고 1년 만에 "시민투표를 허용한다"고 밝혔다.

2차 관문으로 베를린 시민 17만 5000명의 서명을 받으면 시민투표가 성사된다. 기한은 오는 6월 25일. 4월 말 기준 약 13만 명의 서명을 모았다. 무효 서명을 제외해도 상당한 속도로 서명 수를 채우고 있다. 서명을 다 모으면 9월 26일 독일 총선과 함께 시민투표가 진행된다.

지난 23일 베를린 포츠다머플라츠에서 열린 '미친 임대료' 및 '도이체보넨 몰수' 시위에는 수천여 명이 거리로 나왔다. 경찰 추산 2000명, 주최 측에 따르면 1만여 명이 참가했다. 도이체보넨, 보노비아, 아켈리우스 등 주요 부동산 기업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5월 23일 베를린에서 열린 '미친임대료' 및 '도이체보넨 몰수' 시위 ⓒ 이유진

   

5월 23일 베를린에서 열린 '미친임대료' 및 '도이체보넨 몰수' 시위 행진 ⓒ 이유진


사라지는 탐욕의 이름, 도이체보넨

합병 소식이 들려온 건 '이러다가 정말 시민투표 하겠는데?'라는 우려 혹은 기대가 도시를 채우고 있을 즈음이었다. 합병된 기업의 이름은 보노비아로 정해졌다. 운동의 상징이자 탐욕의 상징이었던 이름, 도이체보넨이 아예 사라지게 됐다. 간판을 바꿔 단 셈이다.

보노비아와 도이체보넨의 합병 시도는 과거에도 있었다. 이번 합병이 100% 시민운동의 영향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시민투표 여부가 결정되기 직전인 이때 공익적 내용으로 합병 소식을 알린 데는 시민운동의 영향이 컸다.

기자회견장에서도 관련 발언이 나왔다. 뮐러 시장은 "우리는 공공주택을 많이 짓고 있지만 베를린의 주택 정책 목표를 이루고 시민들의 부담을 정말로 줄이기 위해서는 민간의 참여도 필요하다"라며 "시민투표 운동으로 대중들의 우려가 표현되었고, 이제 해소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대립하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그는 시민투표 운동을 '갈등'이라고 표현했다. 시 정부와 기업이 어느 정도(?) 합의를 봤으니 '이제 그만 하시라'는 메시지다.
 

5월 23일 베를린에서 열린 '미친임대료' 및 '도이체보넨 몰수' 시위. 부동산 기업 국유화를 결정하는 시민투표 서명을 받고 있다. ⓒ 이유진

 

5월 23일 베를린에서 열린 '미친임대료' 및 '도이체보넨 몰수' 시위 ⓒ 이유진

 
싸움의 효과

'도이체보넨 몰수' 운동은 멈추지 않는다. 더 큰 부동산 기업의 출현으로 오히려 전투력이 강해졌다.

이들은 운동의 성과를 자축하면서 기업들의 기만을 비판했다. 이들은 "캠페인 압력이 효과를 보고 있다. 도이체보넨은 이름을 바꿈으로써 베를리너(베를린 시민)들이 더 이상 시민투표에 서명하지 않기를 바란다"라며 "우리는 독일 상장 기업을 굴복시켰다. 시민투표도 성공할 것이라고 본다. 베를리너들은 이번 합병이 '과대포장'임을 알고 시민투표에 찬성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독일 언론 <쥐드도이체 차이퉁>은 "베를린의 혁명적인 분위기가 효과를 보면서 전국적으로 신호를 주고 있다"라며 "4월 연방헌법재판소가 베를린시의 임대료 동결법에 위헌 결정을 내린 이후 혁명적 분위기는 더욱 거세졌고, 시민의 절반 가까이가 사기업을 국유화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전했다.

독일 헌법재판소는 임대료 입법권은 연방의 권한으로 주 정부에서 결정할 수 없다는 취지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시민사회는 '그렇다면 연방정부가 나서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기업 몰수를 위한 시민투표가 성사될지 아직 알 수 없다. 부동산 기업은 여전히 이익을 추구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탐욕'의 얼굴로 기업을 운영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의 기본권인 주거를 다루는 곳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베를리너들이 일으킨 '갈등'과 싸움의 효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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