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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월 19일부터 3월 1일까지 다녀온 쿠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행 직후 전세계적인 코로나19 확산으로 싣지 못했던 여행기를 1년을 맞아 공유하고자 합니다.[기자말]
아듀! 시엔푸에고스

오늘은 시엔푸에고스에서 트리니다드로 가는 날.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새벽부터 일어나 일출을 보고 아침을 먹은 뒤 다시 숙소에서 뒹굴거렸다. 아바나였으면 어떻게든 뭔가를 더 보겠노라며 호텔을 나섰겠으나, 숙소가 도심과 떨어져 있었을 뿐더러 시엔푸에고스 자체도 곳곳을 둘러볼 만큼 크지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누적된 피로 때문이었다. 어느새 쿠바에 온 지 엿새째. 여행은 중반이 넘어가는데 매일 낮에는 열심히 걷고, 밤에는 독한 럼주를 마셔대니 40대의 몸이 배겨날 턱이 없었다. 차차 발걸음이 느려질 수밖에.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앞으로의 일정이 전보다 빡빡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는데, 그것 역시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

덕분에 여유로운 아침. 캐리비안 베이를 배경으로 책도 읽고, 정비도 하다 보니 어느새 출발 시간이 되었다. 다시 로비로 모인 일행들. 다들 피곤해 보였지만, 그래도 새로운 곳을 간다는 설렘으로 들떠 있었다. 자 이제 출발. 안녕. 시엔푸에고스.

관광을 위한 중세의 도시 트리니다드
 
트리니다드의 첫인상
 트리니다드의 첫인상
ⓒ 박종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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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세 번째 목적지 트리니다드는 시엔푸에고스 남쪽에 위치한, 쿠바 중부지역의 대표적인 도시로서 1514년, 아바나보다 5년 전에 만들어진 오래된 도시라고 했다. 한때 노예를 이용한 설탕산업으로 아바나만큼 발전했는데, 18세기 노예들이 일으킨 독립전쟁 이후 몰락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에도 아바나에서 벗어난 차들의 반은 트리니다드로 향한다고 하니 쿠바의 대표적인 도시임에 분명했다.

드디어 트리니다드 도착. 창 밖을 바라보니 아바나와 시엔푸에고스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곳은 마치 시간이 멈춘 중세의 유럽 도시 같았다. 도심 중심부의 도로는 포장도로가 아니라 자갈과 바위로 이루어져 있었고, 집들 역시 아주 오래된 건물들이 대부분이었다. 자동차와 마차가 공존하고 있었다. 
 
현대와 중세의 공존
 현대와 중세의 공존
ⓒ 박종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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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 트리니다드가 카리브 해 일대의 스페인 식민지 도시 중에서는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었다고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실제로 트리니다드는 앞으로 보게 될 이즈나가 유적과 함께 198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고 했다.

버스에서 내려 우리는 가이드가 안내하는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꿀이 들어간 쿠바 정통 칵테일 '라칸찬차라'를 맛보기 위함이었는데, 칵테일 맛보다도 눈이 먼저 가는 것은 역시나 우리를 환영하는 밴드의 음악과 춤이었다. 아바나에서 보고 들었던 그 흥겨운 노래와 춤. 그것은 트리니다드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을 위한 하나의 코스인 듯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카페를 나와 식당으로 걸어가는 중에 본 트리니다드의 중심지는 관광객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도로 양쪽으로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늘어서 있었고, 또 어떤 골목은 기념품 파는 좌판이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바나의 오비스포 거리가 곳곳에 있는 느낌이었다.

도시 전체가 관광을 위해 다시 태어난 듯한 느낌. 그것은 설탕으로 흥하다가 몰락해버린 트리니다드의 운명이었다. 도시의 성장이 18세기 이후 멈춰버린 탓에 중세 스페인의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이제는 그것을 바탕으로 관광업이 흥하고 있었다. 우리로 치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던 탓에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순천의 낙안읍성쯤 될까? 
 
트리니다드의 유일한 수입원 관광
 트리니다드의 유일한 수입원 관광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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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런 트리니다드의 모습이 마냥 좋게만 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도시가 관광업 때문에 다시 활기를 찾는 건 다행이지만, 어쨌든 외부 자본에 너무 의지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과연 트리니다드는 다른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

인헤니오스 계곡의 노예 감시탑

점심을 먹은 뒤 우리는 숙소로 가기 전 시 외곽에 위치한 인헤니오스 계곡으로 향했다. 그곳은 18세기까지 사탕수수 농장이 운영되었던 이즈나가 유적이 있었던 지역으로 한때 50여 개의 사탕수수 농장이 있었던 곳이라고 했다.

이윽고 도착.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눈에 띄는 것은 우뚝 솟아 있는 탑이었다. 그것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를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써, 푸코가 이야기했던 판옵티콘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아니, 도대체 얼마나 사탕수수 농장이 크기에 탑을 저리 높게 지어야 했단 말인가. 
 
이즈나가 유적의 노예 감시탑
 이즈나가 유적의 노예 감시탑
ⓒ 박종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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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품을 보고 가라는 현지인들을 지나 다짜고짜 탑을 오르기 시작했다. 18세기 때 원형을 간직하기 위함인지 올라가는 사다리 등이 조금 부실한 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데 안전은 괜찮은 건가? 그러나 그런 의구심도 잠시, 정상에 올라 밑을 내려다보자 그 압도적인 풍경에 모든 생각이 사라졌다.

탑에서 바라본 풍경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험준한 산맥을 배경으로 한 광활한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예전에는 그곳이 모두 사탕수수 밭이라고 했다. 이렇게 농장이 넓으니 감시탑을 이리 높이 지을 수밖에.
 
노예 감시탑에서 바라본 사탕수수 농장의 흔적
 노예 감시탑에서 바라본 사탕수수 농장의 흔적
ⓒ 김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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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기계가 개발되기 전만 하더라도 사탕수수는 인간이 재배하는 식물 중 가장 어려운 작물이었다. 벼나 밀과 달리 3미터가 넘는 사탕수수를 수확하기 위해서는 가축을 사용할 수 없고 오로지 사람의 노동에만 의지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탕수수는 베고 나면 줄기 안에 설탕 성분을 저장한 부분이 차츰 딱딱하게 굳어간다. 수확하고 저장할 수 있는 벼와 달리 사탕수수는 한꺼번에 수확해 곧바로 정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니 사탕수수는 효율성을 위해 대규모로 재배할 수밖에 없고 이를 위해서는 노예가 필수적이었다. 쿠바에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노예로 끌려온 이유이기도 하다.

저 넓디넓은 사탕수수 밭을 갈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예들이 처참한 삶을 이어가야 했을까? 영문도 모른 채 고향으로부터 끌려와 인간다운 대접도 받지 못하고 착취당했을 그들. 덕분에 유럽에서 설탕은 비싼 사치품이 아니라 기호식품을 만들기 위한 하나의 재료가 되었지만, 그 단맛은 결국 아프리카인들의 피와 땀의 결과였다.
 
농장주의 대저택
 농장주의 대저택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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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서 내려와 버스에 오르려다 보니 그 옆에 놓여 있는 철길이 보였다. 그렇게 수확한 설탕이 이 철길을 따라 아바나 항으로, 그리고 유럽으로 건너갔겠지. 그것은 일제 강점기 때 갓 설치된 철로와 항구를 통해 쌀을 빼앗긴 우리의 역사와도 비슷했다. 식민지 수탈의 경험과 공산주의. 어쩌면 그 역사적 공통분모가 쿠바와 북한 사이를 끈끈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트리니다드로 돌아오는 길. 가이드는 이곳에서의 숙소는 호텔이 아닌 까사, 우리 식으로 말하면 민박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래도 현지에 왔으면 현지인들도 만나고, 현지에서 가장 많이 애용되는 숙박 시스템도 경험해 봐야 된다는 것이었다. 마냥 편한 여행을 추구하지 않고 될수록 많은 경험을 선사해주려 하는 주최 측에게 고마울 뿐이었다. 자, 우리는 어떤 집에서 묵게 될까?

태그:#쿠바, #트리니다드, #인헤니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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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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