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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노동자회 회원소모임 '페미워커클럽'은 2021년을 맞아 힘들었던 한해를 거치고 우리에게 용기와 힘을 준 책 6권을 선정했습니다. 책을 함께 읽고, 코로나19 이후 단절이 부각된 세상에 '우리'가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페미워커의 시선으로 담아냅니다.[편집자말]
 
식당 서빙 아르바이트 노동을 하는 여성의 모습
 식당 서빙 아르바이트 노동을 하는 여성의 모습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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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식당 서빙 아르바이트를 오래하지 못했을까? 물론 뜨거운 솥을 들고 테이블 사이를 빠르게 헤쳐 나가는 건 체력적으로 고된 일이긴 했다. 그럼에도 그것이 서빙 아르바이트를 오래 하지 못한 진짜 이유는 아니었음을 이제야 고백해본다. 다른 아르바이트를 할 때와는 달리, 식당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던 한 달 남짓 기간 내내 나는 소위 '현타'를 느꼈다.

대학 때문에 상경을 하고 가장 설렜던 건 지방에서 보기 힘든 문화예술을 많이 접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하게 된 아르바이트도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던 공연장 안내원 일이었다. 서비스직에 수반되는 감정노동은 분명 힘들었지만, 돈도 벌면서 각종 뮤지컬과 공연을 직관할 수 있다는 건 그런 힘든 점들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이 무렵엔 학업보다 아르바이트에 더 열중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 일은 11개월 만에 그만둬야 했다.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기 위해 고용주 쪽에서 11개월짜리 계약서를 작성하게 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하게 된 아르바이트는 영화관 아르바이트였다. 공연장 아르바이트처럼 일하면서 영화를 볼 수는 없었지만, 대신 공짜표 몇 장이 매달 쥐어졌다. 이 일도 6개월 이상 했다. 사실 영화관 아르바이트는 무척 고된 육체노동이 필요한 일이었다. 기름에 절은 팝콘 기계를 매일 씻고, 핫도그를 만들고, 팝콘을 튀기고, 락스를 바닥에 뿌리고 걸레질을 하고. 그래도 내가 문화예술계에서 일하고 싶어 한다는 걸 증명하는 스펙 한 줄이 될 수 있다면 이런 것쯤은 기꺼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스펙도 되는데 돈도 주네?' 갓 대학 1, 2학년이었던 나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학교 시간표와 맞지 않아 영화관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난 뒤, 친구를 통해 새로 구한 아르바이트가 바로 처음에 이야기한 식당 서빙 일이었다. 식당은 학교와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고, 식당 사장님은 노동인권에 관심이 많은 분이셨다. 덕분에 나는 당시 최저시급을 훨씬 웃도는 시급을 받을 수 있었다. 거기다가 하루에 2시간만 일해도 되는 소위 '꿀 알바'였다.

학업과 병행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와 유연한 노동 시간, 높은 시급까지. 그러나 나는 그곳을 한 달 남짓 다니고 그만두었다. 당시에는 체력적으로 힘들어서 그만두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멀리서 봐야만 보이는 것이 있듯, 이제는 진짜 이유를 안다. 당시 내가 식당 알바를 그만두게 된 진짜 이유는, 그 노동이 내게 가치 있는 노동으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문화예술계에 관심이 많은 학생이었고, 그런 내게 그 일은 미래의 '스펙'이 되어주지 못할 것 같았다. 설사 향후에 문화예술업계로 취업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느 기업을 가든 서빙 알바 경력이 이력서의 한 줄이 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사실 설거지와 청소 노동은 앞서 말했던 영화관 아르바이트에서도 했던 일이었는데, 그 일은 문화예술계 관련 스펙을 쌓기 위해 이겨내야 하는 일로 느껴졌다.

이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를 생각하면 정말로 내가 싫었던 것이 무엇인지 명확해지는 게 있다. 실제 하는 일의 내용이 다르지 않아도 '영화관 아르바이트'와 '식당 서빙 아르바이트'는 내게 무척 다른 의미로 다가왔던 것이다.

사실 '스펙 쌓기'라는 것도 결국엔 한 기업의 부품으로 쓰이기 위해 내 쓸모를 증명하는 일에 불과한데, 나는 대학 시절 내내 스펙이 되지 못할만한 일은 피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일에는 감정노동, 청소노동, 가사노동, 돌봄노동 등이 있었다. 주로 '여성의 일'이라고 여겨지고, 실제로도 여성들이 많은 직군에 속하는 일들이다.
 
<회사가 사라졌다>(싸우는여자들기록팀 또록 지음, 파시클 펴냄) 책 표지
 <회사가 사라졌다>(싸우는여자들기록팀 또록 지음, 파시클 펴냄) 책 표지
ⓒ 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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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회사가 사라졌다>에서는 이 사회가 여성들의 노동을 가치절하하기 위해 어떤 방법들을 동원하는지가 나온다. 여성의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언제든 대체 가능한 비숙련 노동으로 취급하고, 여자는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는 생각으로 너무나 손쉽게 해고하고, 해고가 어려우면 회사를 아예 폐업해버리는 일련의 과정들. 원래는 남성이 했던 일조차도 그것이 여성의 일이 되는 순간 비숙련 노동, 누구나 할 수 있는 노동으로 가치절하 당하곤 한다.

그리고 책에서 말하듯이, 이로 인해 이득을 보는 것은 결국 자본이다. 여성의 노동이 가치 없는 것으로 인식될수록 여성 노동력은 값싸게 활용 가능한 노동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나는 여성의 일이 부당하게 취급당하는 일련의 과정을 보며, 내가 '스펙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에 빠르게 그만두었던 식당 알바를 떠올린다. 나조차 이런 인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에 그런 일들을 피해왔을 것이다. '스펙이 될 수 없다'는 이유는 상징적이다. 내 안에서도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는 잘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함께 굴러갔던 것이다.

그렇게 스펙, 취업이란 목적 지향적인 활동들만 하고 나니,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나는 크게 흔들렸다. 학부 시절엔 노동에 대해, 페미니즘에 대해 단순히 나의 화를 정당화해주는 근거로서만 관심을 갖고 있었다. 노동과 페미니즘에 관한 책을 읽고 공부하면서부터 나는 조금씩 단단해 지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점점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고민 또한 많아지는 것을 느낀다. 그 시절 내가 아르바이트를 취사선택 하고, 서빙 알바를 한 달 만에 그만둔 것이 무슨 의미였는지를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을 글로 고백하는 행위로 내 안의 부채감을 덜려는 것은 아닌지 다시 고민이 된다. 그럼에도 나의 모순과 부채감을 마주하면서 그동안엔 듣지 못한 목소리를 듣게 됐다. 이쯤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다시 고민해야 할 문제다.

[기획 / 페미워커의 마주보기]
① 거짓말하고 긴장하는 당신, 어쩌면 '거짓말 스트레스'? http://omn.kr/1szz5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한국여성노동자회 페미워커클럽 윤정님 입니다.


태그:#페미워커클럽, #한국여성노동자회, #회사가 사라졌다, #여성노동, #성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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