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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일까? 길가에 알록달록 꾸며진 예쁜 냉장고 한 대가 놓여 있다. 어떤 사람이 와서 냉장고 문을 열더니 달걀과 요거트를 꺼내간다. 잠시 후 또 다른 사람이 와서는 양손 가득 들고온 식료품을 냉장고 안에 채워넣고 돌아선다. 냉장고는 누구의 것이고, 그들은 무슨 관계일까?

토론토, 밴쿠버, 캘거리, 해밀턴, 레지나 등 캐나다 도시 곳곳에서 코로나 팬데믹 이후 하루에도 수십 차례씩 펼쳐지는 광경이다. 일명 '공동체 냉장고(Community Fridge) 프로젝트'라는 건데, "필요한 것을 가져가세요. 할 수 있다면 놓고 가세요(Take what you need – leave what you can)"를 모토로 삼고 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니 필요하다면 누구든 음식을 가져갈 수 있고, 원하는 누구나 냉장고를 채울 수 있다. 냉장고는 누구의 것도 아닌 동시에 모두의 것이다.

도깨비 방망이
  
캐나다 캘거리시에 설치된 공동체 냉장고 앞에서 한 시민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캘거리 공동체 냉장고 커뮤니티 인스타그램 갈무리).
 캐나다 캘거리시에 설치된 공동체 냉장고 앞에서 한 시민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캘거리 공동체 냉장고 커뮤니티 인스타그램 갈무리).
ⓒ calgarycommunityfri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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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공동체 냉장고'는 이미 수년 전부터 세계 곳곳에서 생겨나고 있었지만, 특히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서 그 수가 치솟은 것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다. 팬데믹 기간이 길어지면서 실직 등으로 식품 구매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급격히 늘어난 까닭이다. '공동체 냉장고'를 홍보·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국제 네트워크 'Freedge(프리지)'의 데이터에 따르면, 현재 전세계에 320여 개의 '공동체 냉장고'가 운영되고 있다.

최근 캐나다 매체들은 여러 지역에서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는 '공동체 냉장고'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CBC뉴스의 "공동체 냉장고가 여려움에 처한 이들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 <더 글로브 앤 매일(THE GLOBE AND MAIL)>의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공동체 냉장고가 늘고 있다", <허프포스트(HUFFPOST)>의 "캐나다인들은 어떻게 공동체 냉장고를 시작했는가" 등을 통해 '공동체 냉장고'가 이야기하는 상호협력의 정신을 전했다.

식료품점은 신선하지만 엄격한 미적 기준에 맞지 않아 버려질 위기에 처한 농산물을 기부함으로써 음식물 쓰레기를 줄임과 동시에 나눔을 실천한다. 동네 빵집이나 레스토랑, 개인들도 각자가 가진 것으로 가능할 때마다 냉장고를 채워넣는다. 당장의 먹거리가 넉넉치 않은 이들은 언제든 기다릴 필요없이, 주거지와 가까운 곳에서, 통조림이나 건조식품 외에 신선한 음식들까지 얻을 수 있으니 든든한 '도깨비 방망이' 하나 손에 쥔 셈이다.

냉장고를 둘러싼 나무 구조물에는 팬트리 공간이 있다. 통조림과 보존식품도 넣어둘 수 있다. 또 화장실 휴지, 분유, 기저귀, 샴푸, 위생용품, 마스크 등 음식 외의 물품들을 보관하는 공간도 따로 마련돼 있다.

공동체 냉장고의 6단계 
 
캐나다 캘거리시에 설치된 공동체 냉장고. 식료품 등이 채워져 있는 모습(캘거리 공동체 냉장고 커뮤니티 인스타그램 갈무리).
 캐나다 캘거리시에 설치된 공동체 냉장고. 식료품 등이 채워져 있는 모습(캘거리 공동체 냉장고 커뮤니티 인스타그램 갈무리).
ⓒ calgarycommunityfri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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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공동체 냉장고' 설치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긴 뒤 유지·보수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이들의 품이 들어간다. 현재 캐나다의 거의 모든 '공동체 냉장고 프로젝트'는 비슷한 방식으로 시작되고 있다. 프로젝트를 시작하려는 이들은 이미 경험이 있는 다른 지역 선배(?)들에게서 소셜미디어를 통해 정보를 건네 받는다. 캘거리는 '공동체 냉장고'를 이미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던 토론토와 뉴욕의 팀들에게서 노하우를 얻었고, 이후 레지나는 기후가 비슷한 캘거리로부터 겨울철 냉장고 관리법을 전수받았다. Thebarriofridge의 인스타그램 페이지에 공유된 대략적인 '공동체 냉장고' 조직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팀을 꾸린다
2. 소통방법을 정한 뒤 그룹 대화를 통해 누가 어떤 식으로 참여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3. 개인 및 사업체에 연락을 취한다. 음식을 모으는 일에서부터 냉장고 청소, 음식 채우기, 정보 교환, 냉장고 꾸미기 등의 일을 누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실행계획을 짠다
4. 식료품점, 빵집, 레스토랑 등 음식을 기부 받을 수 있는 곳들의 리스트를 작성하고 픽업 시간표를 짠다
5. 전력, 날씨, 접근성 등을 고려해 냉장고 설치 장소를 결정한다. 그런 뒤 벼룩시장 등을 통해 무료 냉장고를 찾는다
6. 모두 함께 냉장고를 깨끗하게, 비어 있지 않도록 유지한다. 이를 위해서는 매일의 조율과 협력, 검토가 필요하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모두 대가 없이 일하는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이뤄진다. 아버지와 함께 얼음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토론토시의 제이크 실바는 자신의 가게 앞에 냉장고를 설치하도록 하고 전기를 공급하기로 했다. 지역 아티스트들은 냉장고에 그림을 그려넣어 생기있게 꾸미는 일을 맡는다. 숙련된 경험이 필요한 일에는 지역의 회사가 나서기도 한다. 지역 건설업체가 자재와 시간을 기부해, 혹독한 겨울날씨로부터 냉장고를 보호하기 위한 구조물을 설치하는 경우가 그렇다.

냉장고를 청결하게 유지하고, 음식이 넉넉한지,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은 없는지 살핀다. 식료품점에서 기부 받은 음식들을 가져다 넣는 일들도 모두 자원봉사자들이 순번을 정해서 한다.

"삶의 무게 덜어줘... 상상해본 적 없는 친절"
 
캐나다 레지나시 공동체 냉장고의 모습(레지나 공동체 냉장고 인스타그램 갈무리).
 캐나다 레지나시 공동체 냉장고의 모습(레지나 공동체 냉장고 인스타그램 갈무리).
ⓒ reginacommunityfri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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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날씨에 구조물을 짓느라 수고한 건설업체 직원들에 대해, 레지나시의 '공동체 냉장고'를 조직한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공동체를 위해 추위 속에서 구조물을 짓는 사람들을 보며 지금껏 최고의 감정을 느꼈던 것 같아요. 상호협력이 공동체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을 아주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해요."

CBC뉴스는 토론토시 다운타운에서 냉장고를 오가는 이들을 인터뷰했다. 80세의 패트리샤 레이드는 '공동체 냉장고'를 "하늘이 준 선물"이라고 불렀다. 냉장고를 채우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잘 모르지만 이 냉장고가 자신의 삶을 다르게 만들어주고 있음을 알았으면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내 삶의 무게를 덜어주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친절할 수 있다는 걸 상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간호사로서 사람들을 도우며 최일선에서 코로나에 맞서고 있는 캐스린 아랍은 할 수 있을 때마다 냉장고를 채워넣곤 한다.

"저는 그 사람들을 알아요. 길거리에서 힘겨워하는 모습을 봤어요. 구걸하거나 인도에서 잠들어 있는 걸 본 적도 있고요. 그들은 제 형제고 자매고 친구예요. 할 수 있는데 왜 돕지 않겠어요?"

캘거리시에서 '공동체 냉장고' 프로젝트를 조직한 앨리스 램에 의하면, 처음엔 하루 한 번쯤 냉장고가 채워지리라 예상했지만 최근에는 하루 일곱 번까지도 채워지고 비워지고를 반복한단다. 레지나시의 냉장고에는 매주 6000달러가량의 식료품이 오간다고. 다른 시의 냉장고들도 상황은 비슷하다. 이는 팬데믹 기간에 경제적 상황이 악화된 이들이 많다는 뜻인 동시에, 그들을 도우려는 이들 또한 그만큼 많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팬데믹이라는 어둡고 긴 터널 속에서, 뜬금없이 길가에 놓인 냉장고가 우리에겐 여전히 이웃이 있음을 알리고 있다.

태그:#공동체 냉장고, #코로나 팬데믹, #캐나다, #상호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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