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독립유공자를 만나는 일은 독립유공자 묘역과 무후선열제단, 임시정부요인 묘역, 국가유공자 묘역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충혼당과 부부위패판, 현충탑 위패봉안관, 심지어 장군 제1묘역에서도 독립유공자를 만날 수 있다. 앞으로 3회에 걸쳐 충혼당과 부부위패판, 현충탑 위패봉안관, 장군 제1묘역 등에 안장돼 있는 독립유공자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 기자말

국립서울현충원은 2006년부터 납골당인 '충혼당'을 운영하고 있다. 정부는 국립서울현충원의 공간이 묘지를 수용할 수 있는 한계에 봉착하자 1979년 국립대전현충원(당시는 대전국립묘지)을 새로 만들었다. 하지만 수도권 안장을 희망하는 유족들의 요구가 계속 이어졌고, 이에 국립서울현충원에 충혼당을 설립했다. 그런데 이마저도 포화상태에 이르렀고, 2020년부터는 충혼당 바로 옆에 제2충혼당을 건립하고 있다. 충혼당은 장군 제1묘역이나 국가유공자 제1묘역에서 바로 보이는 곳에 있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2020년 12월 31일 현재 충혼당에는 오의선의 유해 등 순국선열 12위와 조완구, 박두종, 계봉우의 유해 등 애국지사 157위의 유해가 봉안돼 있다. 
 
국립서울현충원은 2006년부터 납골당인 충혼당을 운영하고 있다. 충혼당에는 2020년 12월 31일 현재 충혼당에는 오의선의 유해 등 순국선열 12위와 조완구, 박두종, 계봉우의 유해 등 애국지사 157위의 유해가 봉안되어 있다.
▲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 국립서울현충원은 2006년부터 납골당인 충혼당을 운영하고 있다. 충혼당에는 2020년 12월 31일 현재 충혼당에는 오의선의 유해 등 순국선열 12위와 조완구, 박두종, 계봉우의 유해 등 애국지사 157위의 유해가 봉안되어 있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오의선, 해방을 보지 못하고 끝내 옥사하다

경기도 용인 출신의 오의선(1889~1931)은 1919년 2월 일본 메이지대학에 재학 중 2.8 독립선언이 있은 후, 상하이로 망명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선 인물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경기도 대표로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원으로 활약했고, 이후 국내에 들어와 '시대일보' 기자 등으로 근무하면서 군자금 모금 활동도 벌였다. 오의선은 1925년부터 조선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했는데,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 창립의 기반이 됐던 정우회의 창립멤버이기도 했다.

오의선은 조선공산당에 대한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면서 1926년부터 수배 상태가 됐다. 1926년 9월 수배 상태에서도 김철수 등과 비밀 회합을 해 책임비서 김철수, 조직부 오의선, 선전부 원우관으로 하는 임시 중앙간부를 조직하고 조선공산당을 재정비하는 일도 담당했다.

다시 만주로 망명한 오의선은 1926년 10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제2대 책임비서에 선출돼 동만 지방을 중심으로 급격히 세력을 확대해나가던 중 1931년 3월 일경에 체포되고 말았다.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오의선은 고문 후유증으로 그해 5월 6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그의 나이 43세 때의 일이다.

오의선의 고향인 경기도 용인의 원삼면 죽능리에는 오의선의 손주 며느리가 지키고 있는 생가가 남아 있다. 죽능리는 독립운동에 나섰던 해주 오씨 집안의 집성촌이었다.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돼 있는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한국광복군 국내지대장을 맡았던 오광선, 한국광복군의 오희영과 2021년 현재 생존해 계신 오희옥 여사 등이 해주 오씨 집안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다.
  
오의선의 고향인 경기도 용인의 원삼면 죽능리에는 오의선의 손주 며느리가 지키고 있는 생가가 남아 있다. 죽능리는 독립운동에 나섰던 해주 오씨 집안의 집성촌이었다.
▲ 독립운동가 오의선의 생가 오의선의 고향인 경기도 용인의 원삼면 죽능리에는 오의선의 손주 며느리가 지키고 있는 생가가 남아 있다. 죽능리는 독립운동에 나섰던 해주 오씨 집안의 집성촌이었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한편, 무후선열제단에 위패로 봉안돼 있는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지낸 죽능리 출신의 여준(1860~1932, 무후선열제단)도 오의선의 고향에서 '삼악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오의선도 아마 이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오의선이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활동에 참여한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였음에도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80년에 임정요인 자격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을 수 있었던 것도 용인 해주 오씨 집안의 노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물론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옥사한 백광흠(1895~1927)이 1909년 신민회 계열의 대동청년단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196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은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신민회의 지도자와 통합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동휘(1873~1935)가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라는 이유로 1995년에야 뒤늦게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1980년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오의선의 사례는 지극히 이례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임시정부를 지킨 작은 거인 조완구, 남과 북의 국립묘지에 동시에 안장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동총판 등을 역임한 조완구(1881-1954)는 무후선열제단에 위패가 안치되어 있었는데, 2019년 충혼당에 봉안되었다. 6·25 한국전쟁 당시 김규식, 유동열 등과 함께 납북된 조완구의 유해는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 무후선열제단에 안치되어 있을 당시의 독립운동가 조완구의 위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동총판 등을 역임한 조완구(1881-1954)는 무후선열제단에 위패가 안치되어 있었는데, 2019년 충혼당에 봉안되었다. 6·25 한국전쟁 당시 김규식, 유동열 등과 함께 납북된 조완구의 유해는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동총판 등을 역임한 조완구(1881~1954)는 무후선열제단에 위패가 안치돼 있었는데, 2019년 충혼당에 봉안됐다. 김규식, 조소앙 등 동지들이 있는 무후선열제단에서 충혼당으로 옮긴 이유는 부인 홍정식 여사와 함께 안치하기 위한 유족들의 희망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대한제국의 관료 출신인 조완구는 백전노장의 독립운동가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내무주사 직을 사직하고 대한협회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1914년에 70세의 노모와 부인 그리고 3남매를 남겨둔 채 홀로 북간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길에 올라 전로한족중앙총회 등에서 활동했다.

1919년 3.1 혁명 직후 결성된 대한국민의회 의원이 됐고, 김동삼·이시영·이동녕 등과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조완구는 이후 임시정부의 내무부장과 재무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27년 간 임시정부를 지켰다. 조완구는 해방과 함께 1945년 12월 2차 환국단에 포함돼 1914년 고국을 떠난 지 32년 만에 고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6.25 한국전쟁 당시 김규식, 유동열 등과 함께 납북된 조완구는 조소앙, 안재홍, 원세훈, 엄항섭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1954년 평양 용성 중앙병원에서 "통일, 통일, 통일. 먼저 가네, 먼저 가…"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고 한다. 조완구의 유해는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장돼 있다.

박두종, 6.10 만세운동의 주역
 
박두종(1904-1967)은 이천진·박하균·이병립·이선호·유면희 등 11명과 함께 6·10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이다.
▲ 재판받고 있는 박두종(당시 <동아일보> 기사) 박두종(1904-1967)은 이천진·박하균·이병립·이선호·유면희 등 11명과 함께 6·10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이다.
ⓒ 동아일보

관련사진보기

   
박두종(1904~1967)은 이천진·박하균·이병립·이선호·유면희 등 11명과 함께 6.10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이다.

기독청년회관 영어과에 재학 중이던 박두종의 죽첨정 소재 하숙방(현 4.19혁명기념도서관 자리)은 각 학교 학생대표 40여 명이 모여 순종의 인산일인 6월 10일에 맞춰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정한 아지트이기도 했다.

박두종은 함께 하숙하던 고향(함남 홍천) 후배 박하균과 함께 준비자금 마련책 역할을 담당했고, 태극기와 격문 제작도 담당했다. 6.10 만세운동 당일에는 경성사범학교 앞(현 을지로5가)에서 태극기를 들고 격문을 뿌리며 만세운동을 주도하는 역할을 했던 박두종은 결국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언도받아 옥살이를 했다.

박두종은 재판 과정에서 재판장을 압도하는 답변을 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재판장은 요즘으로 말하면 색깔을 입히려는 목적으로 "피고는 사회주의를 연구하였는가?"라는 질문을 했고, 이에 대해 박두종은 "연구할 마음은 있었소마는 아직 착수는 안 했었소!"라고 답변해 재판장을 당혹케 했다. 이어 "만세를 부른 동기와 경로를 말해보라"는 질문에는 "동기는 삼척동자라도 알 일이오, 경로는 아까 이병립이 다 말한 듯하오"라고 잘라 말했다.

거듭 당황한 재판장은 "피고는 조선독립을 목적하고 있었던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박두종은 "물론 평소부터 그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어왔는데, 6월 8일 이천진, 이선호, 이병립 등이 찾아와서 계획을 말하기에 찬성하고 나도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하였소"라고 답한다. 재판장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만세를 부른 동기를 말해보라"는 질문을 거듭하게 되었고, 박두종은 재판장과 격론까지 벌이며 열렬한 말로써 답변을 마쳐 재판정을 뜨겁게 달궜다고 한다.

계봉우, 이역만리 카자흐스탄에서도 조선말과 역사를 지켜내다
 
역사학자이자 국어학자이기도 한 계봉우(1880-1959)는 카자흐스탄에서 사망하여 크질오르다 중앙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었는데, 2019년 국내로 유해가 봉환되었다. 아래 왼쪽에서 두번째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다.
▲ 독립운동가 계봉우(뒷줄 가운데) 역사학자이자 국어학자이기도 한 계봉우(1880-1959)는 카자흐스탄에서 사망하여 크질오르다 중앙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었는데, 2019년 국내로 유해가 봉환되었다. 아래 왼쪽에서 두번째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다.
ⓒ 독립기념관

관련사진보기

   
역사학자이자 국어학자이기도 한 계봉우(1880~1959)는 카자흐스탄에서 사망해 크질오르다 중앙공원묘지에 안장돼 있었는데, 2019년 국내로 유해가 봉환됐다.

계봉우는 1910년 이후 북간도로 망명하여 광성학교에서 국사와 국어를 가르치면서 '조선역사' '조선지리' 등 한국사와 한국어 교과서 편찬을 주도하여 간도 전역에 보급하는 등 북간도 한인사회의 민족교육과 항일독립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1919년 3.1 혁명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던 계봉우는 그해 8월 이동휘와 함께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1919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북간도 대표의원으로 부임해서 1년 간 의정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계봉우가 카자흐스탄까지 간 것은 1937년 일제의 침략을 우려한 스탈린이 연해주 일대에서 살고 있던 고려인에 대한 강제이주 정책을 펼친 때문이었다.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는 1929년 한인들이 처음 이주하여 척박한 땅을 개간하여 벼농사를 시작한 곳이기도 했다.

계봉우는 이곳에서 함께 이주 당한 한인사회당 중앙위원 출신의 이인섭, '15만원 탈취 사건'의 주역 최봉설(최계립) 등과 의논하여 자신의 삶과 활동을 정리하는 형식을 빌려 조선어를 지키고 조선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을 벌였다.

계봉우의 이러한 활동은 1939년 여름 조선의 말·관습·문화를 없애고, 성과 이름을 바꾸려 하는 일본정부의 조선인동화정책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면서 조선의 식민지 상태가 장기화된다면 조선말, 조선예절, 조선역사를 지킬 사람은 외국에 나와 있는 조선인들뿐이라는 위기의식에 기초한 것이었다.

계봉우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22년 동안 크질오르다에서 모국어와 역사를 가르쳤고, '조선문학사' '조선문법' '조선역사' 등을 집필해 한국어와 한국역사를 연구·보급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그는 자신의 유년 시대를 기록한 소설 '금강산', 미완의 자서전 '꿈속의 꿈'도 남겼다.

덧붙이는 글 | 다음 기사에서는 부부위패판에 안치되어 있는 독립운동가 이야기를 다룹니다.


태그:#국립서울현충원, #독립운동가, #충혼당
댓글25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현충원 역사산책>(2022),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2015) 등이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