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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여름 방학이 되면 동무들과 뽀얗던 살이 까맣게 타도록 산천을 뛰어다녔다. 뛰다가 허기가 지면 설익은 복숭아도 따먹고 산딸기도 따 먹었다. 콩도 볶아 먹고 달콤한 꽃잎도 쭉쭉 빨아먹었다. 설익은 참외 서리를 하다 몽둥이 들고 쫓아오는 주인을 피해 줄행랑을 치기도 했다. 까무잡잡한 사춘기 시골 소년에게 산과 들은 가장 훌륭한 놀이터이자 입장료 없는 식물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식물을 잘 모른다. 길가에 피는 민들레, 진달래, 제비꽃, 코스모스 정도만 겨우 구분할 줄 안다. 식물을 잘 알지 못하니 집에서 식물을 키우는 것도 잘 못한다. 어쩌다 지인들에게 작은 화분이나 다육이를 선물 받으면 고마우면서도 잘 키울 수 있을까 하는 걱정부터 앞선다. 선물 받은 식물을 햇빛 잘 드는 곳에 놓고 물을 주지만 채 몇 달이 안 되어 시들어 버린다. 작년에 선물 받은 다육이도 두 달 전 시들고 하나 살아남았다.
 
식물세밀화가 이소영이 쓴 도시 식물에 관한 책이다.
▲ 식물의 책 식물세밀화가 이소영이 쓴 도시 식물에 관한 책이다.
ⓒ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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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시선으로 담은 도시 식물 이야기

두 달 전쯤 지인에게 책을 한 권 선물 받았다. 식물세밀화가 이소영 작가가 쓴 도시 식물에 관한 책 <식물의 책>이다. 책 표지를 장식한 식물의 생김새와 명칭이 익숙하면서도 뇌세포 안에서만 맴돈다.

틈틈이 작가가 정성들여 그린 세밀화 속으로 들어갔다. 엷은 책장 사이로 싱그런 바람이 분다. 길가에 핀 꽃을 누벼 만든 것 같은 꽃잎들이 휘날린다. 줄기와 꽃대궁, 울긋불긋한 꽃잎 사이로 부는 바람이 목덜미와 귀와 눈썹을 간지럽힌다. 

책을 읽으면서 식물의 종류와 특성 외에도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일제식민지의 잔재는 토종 식물에도 남아 있다. 우리 땅에서 자생하는 토종 식물의 학명이 일본 이름이다. 울릉도의 식물들이 그렇다. 그중 느티나무의 학명이 일본식(Zelkova serrata Makino)이다. 자생식물의 명칭이 여전히 일본 이름(학명)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더욱이 국제사회에서 공인된 학명은 한번 정해지면 바꿀 수가 없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마키노를 포함한 일본의 다른 식물학자들이 우리나라 자생식물을 명명한 경우가 여럿있습니다.학명중에 종소명은 보통 식물의 형태적 특징이나 형태적 특징이나 정보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 때문에 울릉도에서 자라는 식물을 일본 학자가 먼저 발견한 경우엔 '다케시마엔시스(takesimaensis)'라고 명명했습니다. - p.30

노벨상을 받은 잡초를 아시나요?
 
식물 세밀화
▲ 식물의 책 식물 세밀화
ⓒ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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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학자나 한의사가 아니어도 식물에겐 치유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아무곳에서나 쉽게 자라는 식물을 잡초라고 한다. 하지만 아무런 쓸모 없을 것 같은 잡초가 때로는 인류의 생명을 구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잡초가 쑥이다.

쑥은 전 세계에 250여 종이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24종이 자생하고 있다. '쑥대밭'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쑥은 생장하는 속도도 무척 빠르고 무리를 지어서 자란다. 그래서 쑥은 시골이나 도시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중국의 과학자 투유유 교수가 개똥쑥에 있는 아르테미시닌이란 성분을 이용해 말라리아 치료제를 개발해서 실제로 말라리아 퇴치에 많이 기여햇다는 이유로 2005년에 노벨생리학상을 받은 거예요. - p.132

반면 우리곁에 가까이 있지만, 가깝지 않은 식물이 있다. 우리나라의 국화인 무궁화다. 최근에 길가에서 무궁화를 본 기억이 없다. 심지어 무궁화는 원산지가 우리나라가 아니다. 진달래, 코스모스, 국화 등은 주변에서 쉽게 볼수 있는 반면 국화인 무궁화는 잘 볼수가 없다. 왜 그럴까?
 
우리 민족이 근대에 겪은 아픔과 시련 때문이다. 사람들이 무궁화를 좋아해서 라기 보다는 일제 시대 민족운동학자들이 '민족의 단합'을 위해서 정한 것이다. 식물학자들도 자생식물이 아니라는 이유로 국화에 반대한다. 국화를 진달래로 바꾸자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하지만 작가는 한번 지정된 국화를 바꾸는게 쉬운 일은 아니기에 국화인 무궁화를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한다.
 
"이 중국 원산의 무궁화가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재배되었다는 기록은 고려시대 문헌에 적힌 '무궁'이란 단어를 통해서 알수 있어요. 무궁화가 우리나라 국화로 지정된 건, 1900년대 민족운동이 한창 활발할 때 민족 단합을 위한 상징물로 국화를 무궁화로 정하고 부터였어요."- p.249

한때 '복수초'라는 일일 드라마가 커다란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다. 그 드라마 탓인지 나는 복수초가 부모나 가족의 원한을 갚는다는 의미로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복수초는 한겨울을 견디고 복을 가져다 주는 의미다. 겨우내 꽃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수초가 피었다는 소식은 정말 반가운 소식이었을 것이다.

복수초는 그리스 신화에도 나온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연인이었던 아도니스가 사냥을 하던중 맷돼지에 허벅지를 물려서 죽는다. 아프로디테는 슬퍼하며 죽은 연인이 피흘린 자리에 신의 음료인 넥타르를 뿌리자 그 자리에서 붉은 꽃이 피었다. 그래서 복수초를 영문으로는 '아도니스'라고 한다.

지금은 사진과 영상의 시대다. 아날로그 방식인 식물 세밀화의 가치와 의미는 무엇일까? 식물을 주제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이들은 그 마음도 식물성일까. 작가와는 일면식도 없지만, 식물을 향한 열정과 순수가 엿보인다. 작가가 섬세하게 묘사한 세밀화 속에 담아낸 꽂의 역사적 의미도 남다르게 다가온다.
 
"식물 세밀화는 보타니컬 아트(Botanical Art)라고도 해요. 보타니 인아트(Botany in Art: 예술 안에 있는 식물), 즉 식물화가 아니라, 아트 인 보타니(Art in Botany: 식물학 안의 예술), 즉 과학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지요. 쉽게 설명하면 식물화는 아름다움을 위한 것으로 예술 안에 있고, 식물 세밀화는 식물의 식별을 목적으로 종의 형태를 정확히 기록하는데 의미가 있는 일종의 기록물인 거예요." - [라메드] (인터뷰) 이소영 식물 세밀화가, 정확한 기록과 관찰의 삶, 2015.2.11

싱그러운 5월이다. 밖을 나서면 사람들은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있지만 초록초록한 봄 빛깔과 향기로 가득한 풍경 속으로 들어가기에 절정이다. 책 속에서 발견하는 식물 세밀화도 푸른 계절과 어울리며 건조한 나를 푸르게 생장시킨다. 허름한 도시의 골목을 걷다가 잿빛 담장을 뚫고 피어난 잡초를 발견하면 잠시 쪼그려 앉은 채 그 끈진길 생명력에 감탄하곤 한다.
 
콘크리트 벽을 뚫고 자라고 있는 잡초.
▲ 잡초 콘크리트 벽을 뚫고 자라고 있는 잡초.
ⓒ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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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에 의한, 꽃을 위한 다큐

이 책을 한줄로 정리하자면, 꽃을 위한, 꽃을 위한 다큐다. 각각이 주인공인 옴니버스 다큐다. 책 속에서 꽃들이 절절히 사랑을 하거나 질투를 하지 않는다. 제 한 몸 출세를 위해서 배신하지 않는다. 능소화와 히야신스 그리고 제비꽃이 뒤엉킨 삼각관계 속에서 애증의 갈등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식물의 세계 안에서도 욕망의 주인공은 인간이다. 식물은 단지 그 자리에 단단히 뿌리 내린 채 어쩔 수 없이 욕망의 대상이 될 뿐이다. 작가의 시선은 관심과 사랑으로 포장된 인간의 욕망을 경계한다.

식물 버블의 시작, 크리스마스트리의 기원, 꽃을 피우지 않는 식물, 노벨상을 받은 잡초처럼 꽃과 나무들에 담겨진 다양한 사연들이 책 읽는 재미를 더한다. 풀밭을 넘기는 것 같은 질감의 책장도 인상적이다. 싱그러움이 더해가는 봄날, 몸과 마음이 투명한 쇠사슬에 묶인 채 담장을 넘지 못할 것 같다면 식물의 책을 보시기를 권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인철 시민기자의 <네이버 블로그와 다음 브런치>에도 실을 예정입니다.


식물의 책 - 식물세밀화가 이소영의 도시식물 이야기

이소영 (지은이), 책읽는수요일(2019)


태그:#식물, #세밀화, #이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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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 뉴스 시민기자입니다. 진보적 문학단체 리얼리스트100회원이며 제14회 전태일 문학상(소설) 수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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