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파더> 영화 포스터

▲ <더 파더> 영화 포스터 ⓒ 판씨네마(주)


자신만의 규칙과 방식으로 직접 가꿔온 집에서 평온한 노후를 즐기는 은퇴한 80대 노인 안소니(안소니 홉킨스 분). 그런데 늘 차고 다니던 손목시계를 어디에 두었는지 고민하는 일이 잦아지고 자신을 돌봐주는 딸 앤(올리비아 콜맨 분)의 얼굴과 아끼던 집마저 낯설게 느껴지는 혼란을 겪으면서 점차 불안에 휩싸인다. 결국 안소니는 사랑하는 딸과 자신의 정신 상태, 현실의 구조까지 의심하는 지경에 이른다.

영화 <더 파더>는 동명의 연극을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이다. 2012년 파리에서 초연한 연극 <더 파더>는 프랑스의 토니상이라 불리는 몰리에르 어워드에서 최우수상을 받았고 이후 런던 웨스트엔드와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상연되어 토니상과 올리비에상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 영국의 가디언지는 "지난 10년간 새롭게 등장한 작품 중 가장 찬사를 받은 연극"이라고 극찬을 했다.

연극의 원작자이자 숱한 수상 경력을 가진 극작가 플로리안 젤러는 영화 <더 파더>의 메가폰을 직접 잡았다. <토탈 이클립스>(1995), <어톤먼트>(2007), <데인저러스 메소드>(2011)의 각본을 쓰고 <위험한 관계>(1988)로 아카데미 각색상을 받은 각본가 크리스토퍼 햄튼은 각색 작업에 참여해 극의 완성도를 높여주었다.

'치매'를 소재로 삼은 영화론 <어웨이 프롬 허>(2006), <새비지스>(2007), <아무르>(2012), <스틸 앨리스>(2015), <왓 데이 해드>(2018), <조금씩, 천천히 안녕>(2019) 등이 유명하다. 우리나라 영화로는 <러블리, 스틸>(2008)을 리메이크한 <장수상회>(2014)가 있다. <더 파더> 역시 앞선 치매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이가 더는 치매로 주위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는 상실의 고통을 담았다. 
 
<더 파더> 영화의 한 장면

▲ <더 파더> 영화의 한 장면 ⓒ 판씨네마(주)


<더 파더>의 화법은 치매를 소재로 삼은 여타 영화와 사뭇 다르다. 첫 번째 특징은 시점이다. 거리를 두고 치매 환자를 지켜보는 '삼인칭'이 아닌, 치매 환자의 입장에서 기억이 사라지는 세상을 체험하는 '일인칭'을 사용한다. 기억이 뒤섞이고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되는 안소니의 세상을 보노라면 자신의 기억에 맞서 끝없이 고독한 싸움을 벌이는 치매 환자의 정신세계를 체험하는 느낌이다. 이에 대해 플로리안 젤러 감독은 "관객이 미로 속에서 손으로 벽을 더듬어 길을 찾는 기분을 느꼈으면 했다"고 밝힌다.

두 번째 특징은 장르의 변주다. 영화는 단순히 드라마로 진행하지 않는다. 안소니의 혼란스러운 기억을 활용하여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누군가 집을 빼앗으려는 것은 아닌지 관객이 의심하게 만드는 심리 스릴러의 재미를 갖추었다. 또한, 기억이 엉망진창으로 뒤엉킨 인물이 느끼는 두려움은 한 편의 공포물과 다름이 없다.

세 번째 특징은 연극적이면서 영화적인 연출이다. <더 파더>는 단지 6명이 등장, 퇴장하고 제한된 실내 공간에서 펼쳐지는 연극적인 분위기를 바탕으로 하되 공간, 촬영을 활용하여 영화만의 고유성을 빚는다. 

무대인 아파트는 안소니의 혼란에 맞추어 다른 공간으로 변한다. 제작진은 하나의 공간을 여러 개의 다른 공간으로 느껴지도록 만들기 위해 아파트의 구조, 문, 창과 같은 기본 틀은 유지하되 색깔, 가구, 소품을 약간씩 바꾸는 방법을 사용한다. 카메라 앵글과 심도, 미장센 구성은 연극이 보여줄 수 없는 감금과 고립, 밀실 공포증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더 파더> 영화의 한 장면

▲ <더 파더> 영화의 한 장면 ⓒ 판씨네마(주)


네 번째 특징은 안소니 홉킨스의 연기다.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 역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안소니 홉킨스의 연기력은 이미 자타가 공인한다. 20세기의 그는 <드라큐라>(1992), <하워즈 엔드>(1992), <남아있는 나날>(1993), <닉슨>(1995), <아미스타드>(1997) 등에서 명연기를 남겼다.

21세기에 접어들며 안소니 홉킨스의 행보는 20세기와 딴판이다. 출연 작품의 수준은 이전보다 확연히 떨어졌다. 그 결과 <트랜스포머: 최후의 기사>(2017)로 골든라즈베리 시상식 최악의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요즘 세대에겐 마블 영화의 토르 아버지 '오딘' 역으로 각인된 상황이다. 과거 그의 연기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영화 제작사가 제공한 보도자료를 통해 좋은 작품을 고르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계속 연기하는 길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너무 일찍 은퇴하는 것보다 계속 이 일을 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저는 많은 것을 분석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큰 고민 없이 시작해서 대사를 외우고 촬영장에 가서 연기를 합니다."
  
<더 파더> 영화의 한 장면

▲ <더 파더> 영화의 한 장면 ⓒ 판씨네마(주)

 
안소니 홉킨스는 근작 <두 교황>(2019)으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 <더 파더>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는 연타석 홈런을 날렸다. 플로리안 젤러 감독은 <더 파더>를 영화화하면서 안소니 홉킨스를 주인공으로 염두에 두고 캐릭터의 이름을 '안소니'로 정하고 배경을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안소니 홉킨스는 마치 '안소니' 역을 위해 나이를 먹고 연기 경력을 쌓은 듯 혼란, 자신감, 쾌활함, 우울함, 불안감, 절망감 등 인물의 다양한 감정을 넘나들고 80대 노인부터 7살 어린이의 기억까지 아우르는 놀라운 연기를 보여준다.

내게 아카데미 시상식의 투표권이 있다면 <미나리>(2020)의 스티브 연,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2020)의 채드윅 보스만, <사운드 오브 메탈>(2019)의 리즈 아메드, <맹크>(2020)의 게리 올드만을 버리고 <더 파더>의 안소니 홉킨스에게 기꺼이 던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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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24프레임의 마음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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