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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 잘 되면 더 바랄 게 없어"라는 말을 수시로 자식에게 던지며 불행한 결혼생활을 이어갔던 내 엄마의 한때가 있다. 그때의 나는 원하는 대로 일구고 싶은 나의 미래가, 자신의 불행이 딸에게 전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엄마의 희망과 동일 존재로 치부되는 것이 두려웠다.

가부장제의 굴레에서 오히려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불안 속에 나를 살게 했다. 엄마가 내게 '그 말'을 하면 반사 신경이 곤두선 나는, '나도 엄마처럼 살기 싫어'라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진 못하고 소리 없이 되뇌었다. 가부장제의 틀 안에 놓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엄마의 삶은 내가 타인의 고통에 무감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제대로 깨우치게 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 그것은 내게 밀어내고 싶은 감각이었다. 상처였다. 칼로 베인 상처에 가까스로 연고를 발라 치유하고 나면 날카로운 칼이 다시 같은 부위에 상처를 냈다. 일일이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반복되는 상처가 무뎌질 법도 했으나 그 쓰라린 감각은 매번 생생했다.

내가 가장 두려웠던 것은 엄마가 내게서 얻고자 했던 위로를 당사자인 나는 주고 싶지 않은 못된 마음이었다. 고통 속 가부장제의 굴레를 스스로 당당히 벗어나지 못하는 엄마가 못나 보였다. 스스로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내가 자신과 다르게 '잘 되길' 바란다는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페미니스트 비긴스 / 이은하 지음 /오월의봄 출판
 페미니스트 비긴스 / 이은하 지음 /오월의봄 출판
ⓒ 오월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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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하 작가의 <페미니스트 비긴스>는 자신의 고통을 넘어선 다른 이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말 걸어준 여성 존재들의 삶을 담아낸 책이다.

7명(유숙열, 이효린, 박이경수, 장하나, 양지혜, 고은영, 조주은)의 페미니스트는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 그리고 그것과 무관하지 않은 한국 사회의 다양한 여성 문제에 침묵하지 않았다. 여성으로 태어나 부당한 현실을 경험하며 무력한 존재로만 남지 않았다. 사회가 주입시키는 차별과 불평등에 당당히 맞섰고, 그것이 다른 수많은 여성 삶을 나아지게 하는 힘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분투했다. 

작중 유숙열은 미국 유학 중 만난 오드리 로드의 "삶은 테러와 직면하는 것, 침묵은 너를 보호하지 못한다"라는 말에 의해 소리 낼 수 있는 용기를 얻어 글을 썼고 지금도 페미니즘 서적을 꾸준히 출판하고 있다.

이효린은 페미니즘에 눈뜨면서 "굉장히 강렬하게 내 세계가 부서지는 걸 느꼈다"며 자신이 경험한 통증이 나아간 경로의 유의미함을 말했고, "여성운동이 왜 필요해?"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화가 난다는 박이경수는 여성 혐오가 드리운 사회에 꼭 필요한 활동가로서의 실행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 지금도 자신을 다잡으며 산다.

정치하는 엄마들의 장하나는 "페미니즘은 당한 놈이 안 당하려고 하는" 움직임이라며 세상을 바꾸는 것과 동시에 여성 개인의 삶이 바뀌는 경험을 만들어내고 싶고, "안다는 것은 상처 받는 일이어야 한다"는 여성학자 정희진의 문장에서 느낀 감각을 기억하며 '다른' 삶을 품고 실행하게 된 양지혜는 지금의 청소년 페미니즘 운동을 지속할 수 있길 바란다.

또한 이주민, 여성, 청년이 기댈 수 있는 안전한 세상을 만들고 싶은 페미니스트 정치인 고은영, 울산 지역 노동운동가들의 이중성을 보며 "우리 사회의 마지막 식민지는 여성"이라는 것을 느낀 뒤 페미니스트로 정부에 입성한 여성학자 조주은까지.

이 책의 페미니스트들은 관계와 경험과 같은 어떤 계기에 의해 변화하며 사회와 경합하게 된 각자의 생을 열렬히 발화한다. 작가 이은하는 이러한 다양한 영역의 페미니스트들 삶의 과정을 촘촘히 담아냈다.

7명의 페미니스트와 함께 다시 나의 한때로 돌아가 본다. 여성이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되어 손쉬운 존재로 치부되었던 구조 속에서 나의 엄마가 고통받았고, 나는 그것을 내 불행한 미래의 전조로 여겼다.

그래서 더욱 외면하고 싶었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 가부장제를 벗어나 자립할 수 있는 힘을 쉽게 얻지 못했던 엄마의 삶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함께 도울 수 없었던 그때의 어리고 유약했던 나를 돌아본다.

페미니스트들의 생애사를 통해 작가 이은하가 말하는 페미니즘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나서지 못했던 과거의 나 같은 존재들을 위한 일침이기도 하다. 지금 내게 말 걸고 있는 7명의 여성에 의해 꺼내본 기억이 가슴에 사무친다. 사랑하는 사람의 상처에 말 걸어주기를 실패했던 나의 한때를 이 글을 통해 고백한다.

덧붙이는 글 | - 2021년 상반기 '대전여민회' 회지에 실렸습니다.


페미니스트 비긴스 - 무엇이 그들을 바꾸었고, 그들은 무엇을 바꾸고 있는가

이은하 (지은이), 오월의봄(2020)


태그:#페미니스트비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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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문화, 다양한 사회현상에 관해 공부하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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