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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꽃시장에 갔다. 시장 안은 완연한 봄이었다.

노란 후리지아가 많았고, 갖가지 색깔의 튤립도 겹겹이 쌓여 있다. 노란색에 주황색이 조금 섞인 망고 튤립과 하얀 튤립을 샀다. 봉오리 단면이 네모였다가 터지면 별모양인 분홍색 부바르디아와 헬레보루스라는 처음 보는 꽃도 샀다.

너무 많이 샀나 싶었지만, 집안에 꽃잔치가 열린 듯 풍성해지자 그 마음도 금세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실내가 건조하고 더워서 그랬는지 일주일도 못가 꽃이 시들기 시작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 라더니.'

'열흘가는 붉은 꽃이 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한 번 성한 것은 반드시 기운다'는 뜻이다. 만개했던 꽃도 반드시 지듯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영원한 권력도 영원한 젊음도 있을 수 없다고 곱씹다보니 나에게 온 완경이 생각났다.

완경이 왔다
 
만개했던 꽃도 반드시 지듯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만개했던 꽃도 반드시 지듯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 elements.env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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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나이가 들어 배란이 멈추고 여성호르몬이 감소해 월경을 하지 않는 상태를 지금까지 폐경이라 했다. 나는 닫힌다, 막힌다는 부정적인 의미의 폐경(閉經) 대신 '월경을 완성, 완결했다'는 의미의 완경(完經)을 쓰자는 운동에 찬성해 완경이라 부른다.

마흔 중반을 넘기니 월경 날짜가 불규칙해지고, 점점 간격이 길어졌다. 산부인과 정기 검진을 갔다가 완경 검사를 부탁했다. 며칠 후 '완경'이라는 검사결과 전화를 받았다. 홀가분하면서도 허전한 기분, 시원섭섭했다.

이제 월경을 안 해도 되니 시원하면서도, 내 몸 안의 시계 중 하나가 멈춘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일 년 가까이 월경이 없다. 일반적으로도 1년 동안 월경이 없으면 완경으로 진단한다. 2018년 대한폐경학회가 발표한 우리나라 평균 폐경 나이는 만49.3세라고하니 이상할 것도 없다.
 
체온이 조금만 올라가도 화끈거리고, 체온이 조금만 떨어져도 추위를 더 많이 느낀다.
 체온이 조금만 올라가도 화끈거리고, 체온이 조금만 떨어져도 추위를 더 많이 느낀다.
ⓒ elements.env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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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년기 증상이 시작됐다. 평소 에어컨 바람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작년 여름엔 열이 확확 올라 계속 에어컨을 켰다. "혹시 나만 더운 거야?" 가족들에게 묻고 다녔다. 가족들이 덥다 하면 괜스레 안심되었다.

갱년기에는 체온 조절에 큰 역할을 하는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 수치가 급격히 떨어져, 체온 조절 기능이 저하된다. 체온이 조금만 올라가도 화끈거리고, 체온이 조금만 떨어져도 추위를 더 많이 느끼게 된다.

오랜만에 대화를 시작한 대학 동창 단톡방에도 온통 갱년기 이야기였다. 더웠다 추웠다 해서 에어컨과 가디건을 끼고 산다고 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안면홍조 뿐 아니라 손등과 발등에만 열이 나기도 한다고 했다. 홍삼을 먹어라. 석류를 먹어라. 호르몬제를 먹어야되니 안 되니, 부부관계의 불편함은 어떡하면 좋으냐...

아직도 만나면 얼굴이 옛날과 똑같다며 서로 호들갑을 떨지만, 대화의 내용은 원숙한 중년 부인의 수다다. 한 친구가 조용히 "난 아직 정기적으로 월경 하는데" 이모티콘으로 손을 들었다. 친구들은 자랑하냐며 부러워했다. 매월 월경이 시작되면 생리통과 불편함으로 '벌써 또 돌아왔나' 괴로워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수면장애(불면증), 체중증가, 피부건조, 관절통, 요실금 등도 일반적인 갱년기 증세다. 나는 어느 한 증세가 심하지는 않지만 골고루 경험하고 있다. 지성피부라 로션 하나로 살아온 나도 갈수록 피부가 건조해져 영양크림을 꼭 바른다. 자다가 과도하게 땀을 흘려 한밤 중에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자기도 했다.

갱년기는 신체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정신적 변화도 가져온다. 감정 기복, 상실감, 우울감, 기억력과 집중력 장애로 인해 자신감이 떨어진다. 친구는 날씨에도 영향을 받아 비가 올 것 같은 흐린 날씨에는 몸도 아프고, 기분까지 잠겨 온종일 누워 있다고 했다.

나에게 집중할 시간도 함께 왔다

갱년기는 극복해야 하는 증상으로 가득 찬 우울한 시기라는 생각을 바꾸게 된 것은 플로리스트 친구가 해준 말 덕분이다. 나는 꽃시장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며, 다루는 꽃이 시들거나 죽으면 속상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꽃은 변하기 때문에 아름답다며, 꽃이 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좋다고 했다. 시드는 것 역시 꽃의 일생 중 자연스러운 한 과정이기 때문에, 꽃이 시들고 다 떨어질 때까지 화병에서 빼지 않는다고 했다.

완경 역시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몸의 순리에 따른 통과의례다. '여성성'이 사라진다는 상실감이나, '쇠약한 노년'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조바심을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6학년때 초경을 시작해 임신과 출산, 모유수유 4년을 뺀 33년 동안 약 400번이 넘는 월경을 무사히 치른 나를 칭찬하고 싶다. 최소 2000일, 4만 8000시간 동안 피를 흘린 나에게 수고했다고 어깨를 두드려 주고 싶다.

미술 작가 홍이현숙은 '폐경의례'라는 사진·영상 시리즈 작품을 통해 '완경은 월경이 닫히는 폐경(閉經)이 아닌 경계를 허무는 것 폐경(廢境, 폐할폐 지경경)'으로 보았다. 그는 최근 DTC 아트센터 기획전 '시선 37.7°C'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완경을 맞이한 여성들은 사회가 짊어준 삶의 짐을 내려놓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더 용감하게 박차고 나와 다른 삶을 살아봐도 되지 않을까요."
 
완경은 지금부터 솔직하고 자유롭게 살라는 몸의 아름다운 선언이 아닐까? 내 심연의 욕망에 충실할 수 있는 시간이 왔다. 완경의 장점을 충분히 활용하려고 한다. 이제 운동이나 여행 날짜에 월경일이 겹칠까 걱정하거나 날짜를 조절할 필요가 없다. 월경 때 마다 찾아오는 감정 기복, 두통, 여드름, 부종 등 월경전증후군(PMS)으로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

딸도 모두 성인이 되었다. 엄마라는 돌봄 노동에서도 다소 느슨해질 수 있다. 보다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기가 된 것을 축복한다. 딸들에게 초경파티를 해주며 축하해주었듯이, 완경이 온 친구들과 축하파티를 하고 싶다. 신나게 떠들고 웃고 마시며 우리의 앞날을 이야기하고 싶다.

월경을 완주(完走)한 우리가 다시 한번 뛰어갈 새로운 트랙에 대해. 눈부신 시작을 위해.

태그:#완경, #폐경, #갱년기 , #완경파티, #에스트로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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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으로 세상의 나뭇가지를 물어와 글쓰기로 중년의 빈 둥지를 채워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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