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2TV <달이 뜨는 강>의 한 장면

KBS 2TV <달이 뜨는 강>의 한 장면 ⓒ KBS

 
온달 장군은 전투에 특별히 능했다. 군인들 중에서도 유난히 돋보였다. 이 점은 수나라의 중국 통일 직전에 동아시아 최강이었던 북주(후주)의 침공을 물리칠 때도 증명됐다. 실학자 안정복의 <동사강목>에 따르면, 이 전쟁은 577년에 있었다. <삼국사기> 온달열전은 이때의 활약상을 이렇게 전한다.
 
"온달이 선봉이 되어 날쌘 모습으로 싸우며 수십여 급을 베니, 많은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힘껏 쳐서 크게 이겼다. 전공을 논할 때, 온달을 1등으로 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날쌘 모습으로 싸우다'의 원문은 질투(疾鬪)다. 질주(疾走)의 '질'이 들어간 글자다. 질주를 연상케 하는 모습으로 전투에 임해 수훈갑이 됐던 것이다. 국가권력에 의한 살상을 합법적 전쟁으로 미화하는 기존의 역사해석은 향후 지양돼야 마땅하지만, 적어도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온달은 군인 적성에 잘 맞는 유능한 인물이었다.
 
온달의 '질투'하는 모습은 최후의 순간인 590년 아차산성(아단성) 전투 때도 나타났다. 온달열전은 그가 "날아오는 화살을 맞고 넘어져 죽었다"고 말한다. 부마의 특권을 앞세우지 않고 격렬한 전투 현장에 몸소 뛰어든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죽음을 불사하고 선봉에 서서 용맹을 발휘하는, 전투에 최적화된 전사였던 것이다.
 
그처럼 국가권력이 선호하는 기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의 역량 발휘를 제약하고 그 이상의 도약을 억제하는 요인이 있었다. 그것은 온달열전에 묘사된 그의 빈곤한 성장 배경과는 무관했다. 그가 역적으로 몰린 귀족의 아들이었다는 KBS 2TV 드라마 <달이 뜨는 강>의 설정과도 무관했다.
 
그것은 중국의 정세와 고구려의 국가전략이었다. 장수태왕(재위 413~491) 시기에 조성된 중국의 정세와 그에 맞춘 서수남진(西守南進)이라는 대외전략이 온달의 도약을 제약하는 요인이 됐다.
 
진시황의 통일로 인해 거대 중국이 출현한 이래, 한민족의 운명은 중국의 동향과 밀접한 연관성을 띠었다. 고구려가 만주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서기 4세기 초반부터 중국이 극심한 분열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다섯 유목민족에 의해 북중국에서만도 16개 왕조가 난립했다 해서 '5호 16국 시대'로 불리는 서기 4세기 이후로, 고구려는 서쪽 중국으로 진출하는 서진(西進)주의를 국가전략으로 표방했다. 동시에, 서쪽과 남쪽을 함께 공략하는 서남(西南) 동시공략주의도 병행했다. 광개토태왕의 영토 확장은 이런 흐름을 반영했다. 중국의 분열과 이에 따른 서진주의가 고구려의 영토 팽창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그런데 북중국의 북위(386~534)가 국력을 팽창하면서부터 정세가 달라졌다. 북위의 팽창으로 중국의 분열이 수습 국면을 보임에 따라, 중국 역사는 북중국과 남중국에 원칙상 각각 1개의 왕조가 존립하는 남북조 시대로 이행했다.
  
 KBS 2TV <달이 뜨는 강>의 한 장면

KBS 2TV <달이 뜨는 강>의 한 장면 ⓒ KBS

 
5호 16국 시대가 남북조 시대로 넘어가는 상황은 고구려의 서진 정책에 장애물이 됐다. 남중국도 아닌 북중국이 강력해지는 정세 속에서 북중국을 향한 서진주의가 예전처럼 힘을 발휘하기는 힘들었다. 이런 속에서 고구려가 선택한 것은 서쪽 중국보다는 남쪽 한반도로 영토를 넓히는 것이었다.
 
서쪽을 지키고 남쪽 진출에 주력하는 서수남진 전략을 채택한 군주는 장수태왕이었다.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고구려 역대 제왕들은 서진주의나 서남 동시공략주의를 썼다"며 "서수남진주의를 쓴 것은 장수태왕 때부터"라고 설명한다. 장수태왕이 427년에 만주 국내성에서 한반도 평양성으로 천도한 것도 이 전략의 일환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장수태왕 이후의 고구려는 중국이 먼저 침략해오면 방어하되 가급적 중국을 자극하지 않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런 가운데, 남쪽 한반도를 우선적으로 공략했다.
 
이런 전략에 저항하는 인물은 신변상의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었다. 온달이 전사하고 22년 뒤인 612년에 살수대첩을 이끈 을지문덕도 그런 사례에 포함될 수 있다. 그가 살수대첩 이후로 역사 기록에 더는 등장하지 않는 원인이 바로 이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조선상고사>에서 신채호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해상잡록>이라는 역사서를 근거로, 살수대첩 직후에 을지문덕이 '이 여세를 몰아 수나라로 진격하자'고 주장했지만 영양태왕이 기득권세력인 보수파의 주장에 따라 수나라와의 화친을 추구했다고 설명한다.
 
이와 관련해 <동사강목>은 "이때 수나라 군주의 악정이 극심하고 천하가 어지러웠으니 만약 고구려 영양왕 원(元)이 난리를 평정할 재기를 간직하여 국세가 쇠잔해지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면, 안으로는 을지문덕 등 여러 신하를 등용하고 밖으로는 신라·백제와 연합하고 말갈의 무리와 합세하여 수나라의 뒤를 쫓아가 죄악을 드러내 토벌하고 의무려산(醫巫閭山, 만주에서 중국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웅거하여 천하에 격서를 보내서 군사를 일으킬 수도 있었으련만"이라며 영양태왕이 을지문덕의 건의를 채택하지 않은 것을 아쉬워했다.
 
수나라 역사서인 <수서> 양제 본기는 수나라 양제(수양제)가 612년에 동원한 병력 규모와 관련해 "합계 113만 8300명이었다"고 한 뒤 "군량을 운송하는 사람은 곱절이 되었다"고 말한다. 전투원이 113만이고 비전투원이 250만 정도였다면, 근 400만 정도가 동원됐다는 말이 된다.
 
그런 대군을 물리친 주역이 바로 을지문덕이다. 이 공적이 제대로 인정받았다면 612년 이후의 기록에도 을지문덕이 등장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렇지 않으니, 살수대첩 이후에 을지문덕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을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신채호는 문학 형식을 가미한 <을지문덕전>에서 "이때 을지문덕이 파직을 당하였는지, 아니면 참소를 만났는지, 늙어서 죽었는지 도무지 상고할 길이 없"다고 아쉬워했다.
 
612년 살수대첩에 힘입어 수나라에 결정적 참패를 안긴 고구려는 그 뒤 수나라를 압박하기는커녕 도리어 613년과 614년에도 연달아 침공을 당했다. 이 같은 기현상이 벌어진 것은 고구려가 서수남진 정책에 따라 적극 대응을 삼갔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장수태왕 이래로 근 2백년간 대(對)중국 수비에 치중했으니 갑자기 공격 모드로 전환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서수남진의 극복이 을지문덕 시대에도 이처럼 힘들었기 때문에, 그 이전인 온달 시대에는 더욱 더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온달의 더 큰 도약은 구조적으로 쉽지 않았다. 중국의 통일 기운과 고구려의 기존 전략 고수가 온달의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온달 시대는 중국 전역이 통일되기 직전이었다. 중국이 '슈퍼 초강대국'으로 부상하기 직전이었다. 도널드 트럼프와 조 바이든이 보여주는 것처럼, 특정 국가가 슈퍼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려 할 때는 다른 나라들이 적극적으로 견제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중국 통일 직전의 고구려 지도부는 트럼프 행정부나 바이든 행정부처럼 하지 않았다.
  
 KBS 2TV <달이 뜨는 강>의 한 장면

KBS 2TV <달이 뜨는 강>의 한 장면 ⓒ KBS

 
온달이 장군이 된 577년부터 전사한 590년 사이에 평강태왕(평원태왕)은 북중국의 수나라 및 남중국의 진(陳)나라와 친선을 도모하는 데 주력했다. 그런 흐름 속에서 589년에 수나라가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근 400년 만에 '통일 중국'을 성사시키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 상황이 660년 백제 멸망과 668년 고구려 멸망으로 이어졌다.
 
중국의 통일이 임박한 평강태왕 시대에 고구려가 중국을 견제하거나 혹은 고구려 자체의 국력을 배가시키지 못한 것은 고구려를 둘러싼 백제·신라·중국이 동시에 성장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구려의 국가전략이 장수태왕 시대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구려가 중국에 대해 유화적이었던 데다가 신라·백제·중국이 모두 성장세를 보였기 때문에, 이 시기 고구려의 처지는 '샌드위치'를 떠올리게 할 만했다. 이런 시기에 '질투'하는 전투력을 가진 온달이 그 샌드위치 속으로 빨려 들어갔던 것이다.
 
그런 구도가 온달의 기능 발휘를 제약했다. 그가 데뷔전인 577년 전쟁을 빼고는 이렇다 할 전승을 거두지 못한 데는 그런 요인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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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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