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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3.15민주묘지에 있는 부조물.
 국립3.15민주묘지에 있는 부조물.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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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마산에 있는 3.15의거 기념탑.
 창원마산에 있는 3.15의거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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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3.15의거기념탑 뒤편에 세워진 '3·15의거 학생참가기념비'의 비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3.15 민주의거의 주인공은 마산의 학생이었습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역사며 변하지 않는 명제입니다."

3.15의거기념사업회는 창원시로부터 1억 원을 지원받아 마산합포구청(옛 마산시청) 앞과 마산의료원 앞, 그리고 이곳에 조형물을 세운 바 있다.

마산합포구청 앞 조형물에는 "정의로운 분노가 피운 위대한 애국심의 꽃이었으니"란 제목으로 3.15의거를 대한민국 최초의 '시민 불복종 운동'으로 평가하는 글을, 마산의료원 앞 조형물에는 김주열 열사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담은 글을 새겨 놓았다.

학생참가기념비에는 마산고, 마산공고, 마산상고, 마산창신고, 마산여고, 마산제일여고, 마산성지여고, 마산간호고 등 당시 8개 고교와 옛 해인대학(현 경남대) 학생들에 대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3.15의거의 주인공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우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다. 특히 지금의 중·고등학생들이 60년 전,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선배들의 용기와 정신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기념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비문을 읽어 내려가면서 끝내 아쉽고 서운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3.15의거에서 잊혀가는 또 다른 주인공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마산항쟁은 결코 '학생'만의 업적이 아니다

'4.19혁명' 또는 '4월혁명'이라고 부르는 1960년 봄의 민주항쟁은 대구 2.28에서 대전 3.8, 마산 3.15와 4.11(김주열 열사 시신 발견), 4.12, 4.13 그리고 서울의 4.18. 4.19로 이어졌다. '학생 피에 보답하라'는 4.25 대학교수 시위가 일어난 다음 날, 마침내 4월 26일 이승만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이와 같은 4월 혁명의 전 과정을 통해 전국 곳곳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항쟁의 대부분은 학생들이 주동했다. 마산의 4.12, 4.13도 학생들이 집단으로 교문을 박차고 거리로 뛰쳐나온 시위였다.

그러나 마산에서 일어난 3.15와 4.11의 두 차례 항쟁은 다른 도시의 시위 형태와는 완전히 달랐다.

정·부통령 선거일인 3월 15일 마산 오동동 민주당사 앞에서 자유당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시작된 낮(오후 3시 30분~5시 30분) 시위는,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한 가운데 민주당 당원들이 앞장선 평화적 시위였으나, 행진 도중 당간부들이 모두 경찰에 연행되고 시민들은 소방차의 물대포와 경찰과 반공청년단의 몽둥이에 밀려 해산됐다.

그러나 밤 시위는 전혀 다른 양태로 전개됐다. 시민들은 낮처럼 일방적으로 경찰의 폭력에 당하지만은 않았다. 옛 남성동파출소, 마산시청 일대, 북마산파출소에서 경찰의 총탄과 최루탄에 시민들은 돌멩이로 맞서는 격렬한 저항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3.15에서 행방불명이 됐던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마산 중앙부두에 떠오른 4월 11일, 마산도립병원(현 마산의료원)에서 시작된 시위는 3.15보다 훨씬 더 규모도 크고 격렬했다.

3.15의 밤과 4.11은 특정 집단이 주도한 항쟁이 아니라 이승만의 자유당 부정선거와 경찰의 폭력에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온 자연발생적인 민중봉기였다.

물론 시위대열에 개별적으로 참가한 학생들의 활동이 돋보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가난으로 인해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생활전선에서 갖가지 고통과 서러움을 안고 살던 청소년 노동자들이 두려움 없이 항쟁에 뛰어 들었다. '성매매' 여성들도 나와 돌멩이를 나르는 등 다양한 부류의 시민들도 몸을 사리지 않았다. 그들 모두가 항쟁의 주인공들이다.

3.15의거 노동청소년기념비가 필요한 이유

마산항쟁에서 희생된 14명의 명단을 보면 학생이 6명이고, 나머지 8명은 학생 또래의 청소년 노동자를 포함한 '비학생'이다.

3.15의거부상자회에서 발행한 <3·15의거>에 기록된 '3.15의거 당시 부상자 명단'에 실린 205명 중에는 학생이 아닌 부상자들이 훨씬 많다.

바로 이 때문에 1960년 3, 4월 마산에서 일어난 민주항쟁이 4.19와 쌍벽을 이루는 역사적 의미를 부여받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3.15에서 학생들의 역할을 100번 강조해도 좋다. 하지만 학생만을 부각하게 되면 이는 3.15의 역사를 우리 스스로 반으로 축소해 버리는 꼴이 된다. 3.15의거기념탑에 세워진 남녀 고등학생과 대학생뿐인 3인의 동상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마산의 3, 4월 민주항쟁에서 희생된 학생들은 모교에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그러나 자신들을 기억해 줄 모교도, 추모해 줄 후배도 없는 희생자들은 누가 챙겨 줄 것인가? 그들도 학생과 같이 우리에게는 똑같은 3.15의 영웅들이다.

'3.15의거 학생참가기념비' 옆에 '3.15의거 노동청소년기념비'도 함께 세워 주는 것이 민주성지 시민다운 도리요, 배려가 아닐까 싶다.

이 일에는 평소 약자의 편에서 일하는 시민운동단체와 노동단체들이 나서야 할 것 같다.
 
창원마산에 있는 3.15의거 기념탑 뒤에 세워진 학생참가기념비.
 창원마산에 있는 3.15의거 기념탑 뒤에 세워진 학생참가기념비.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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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마산합포구청(옛 마산시청) 앞에 세워진 3.15의거 관련 기념비.
 창원 마산합포구청(옛 마산시청) 앞에 세워진 3.15의거 관련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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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마산에 있는 3.15의거 기념탑 뒤에 세워진 학생참가기념비.
 창원마산에 있는 3.15의거 기념탑 뒤에 세워진 학생참가기념비.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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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마산에 있는 3.15의거 기념탑.
 창원마산에 있는 3.15의거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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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3.15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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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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