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3.09 18:59최종 업데이트 21.03.09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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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주전장>의 한 장면 ⓒ (주)시네마달

 
존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학 교수를 둘러싼 세계적 상황은 다큐 영화 <주전장>을 떠올리게 할 만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살아 있는 권력의 눈치도 보지 말라"라며 윤석열 신임 검찰총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2019년 7월 25일, 미키 데자키 감독의 이 다큐 작품이 국내에서 개봉됐다.

위안부(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관한 국제적 논쟁을 다룬 이 작품의 '주된 전장'은 미국이다. 한국과 일본을 중재할 능력이 있는 미국이 이 영화가 말하는 주전장(主戰場)이다.


이 표현은 감독이 창안한 게 아니라 일본 극우세력에서 나온 것이다. 영화가 24분쯤 경과할 때 등장하는 호소야 기요시(細谷清) '역사의 진실을 찾는 세계연합회' 부이사장이 이 표현을 언급했다.

호소야 부이사장은 "주의해야 할 것은 앞으로는 미국이 주전장이 될 거라는 겁니다"라며 "중국도 미국을 공략하고 있으며 미-일 관계 균열을 바라고 있죠"라고 한 뒤 "큰 선전을 일으켜 널리 퍼트려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세계 정치의 '살아 있는 권력'인 미국을 주 무대로 만들어 선전전을 펼쳐 중국 등의 의도를 물리쳐야 한다고 말한다.

<주전장>에 등장하는 일본 극우들은 위안부 소녀상 설립을 주도하는 진짜 실체가 중국이라고 주장한다. 작품이 22분쯤 경과했을 때 스키타 미오 자유민주당(자민당) 출신 의원은 "미국에서 소녀상 설립을 주도하는 것은 한국이 아니라 배후의 중국"이라며 "돈을 대고 있는 것도 중국이죠"라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펼친다. 중국을 겨냥해 미국 선전전을 강화해야 한다는 극우세력의 주장은 한국을 중국의 2중대쯤으로 격하하고 싶어 하는 일본 극우의 심리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영화는 1차적으로 중국, 2차적으로 한국을 겨냥해 주전장을 선점하려는 일본인들의 전 방위적 노력을 보여준다. 일본인들의 지원 혹은 영향을 받는 미국인들이 일본 극우를 대변해 방송 활동 등의 방식으로 선전전을 펴는 모습들이 스크린에 비친다.

일례로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캘리포니아주의 켄트 길버트 변호사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위안부들을 조사한 미국 군대의 문서를 거론한다. 위안부들을 인터뷰한 미군 장병들이 그들을 매춘부로 기록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문서들에서 그녀들은 그저 매춘부에 불과"했다고 그는 주장한다.

일본군을 제압한 뒤 비전투원 여성들을 발견한 미군으로서는, 그들이 어떤 경로로 부대에 있게 됐는지보다는 그들이 점령 직전까지 부대에서 어떤 일에 종사했는지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식민 지배를 경험하지 않은 미군 장병들이 자기 눈앞의 여성이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 혹은 중국인이라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피해자들이 자기 처지를 정확히 표현할 영어 능력을 갖추기도 쉽지 않았으므로 미군의 오해는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군 문서에 적힌 매춘부라는 표현에 증거 가치가 있을 수는 없다. 길버트는 이런 기본 사항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일본인들의 말만 믿고 그런 선전전에 가담했다.

역사적 정설로 굳어진 일본의 전쟁범죄를 부정하는 역사 수정주의자들이 길버트 등을 앞세워 전개하는 그 같은 선전전과 관련해, <주전장>은 25분경의 내래이션에서 "수정주의자들은 여러 방법을 동원해 영어권을 대상으로 이를 실행하고 있다"라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를 들면 영어 웹사이트 '역사적 사실 보급 협회'를 만들고 미국 주요 도시에서 강연회를 개최하거나 백인 미국인을 고용하여 그들의 주장을 전파시키고 있다. 토리 머라노, 켄트 길버트 같은 사람들 말이다. 이런 미국인들은 수정주의자들에게 희망의 상징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과 일본의 위대함을 미국으로 하여금 깨우치게 하기 때문이다."

램지어 역시 머라노나 길버트와 다를 바 없다. 하버드대학 교수라서 공신력이 있다는 점은 다르지만, 일본 극우의 이해관계를 대변해 '주전장'에서 선전 활동을 편다는 점은 차이가 없다. 그런데 그런 램지어가 지금 세계적으로 두들겨 맞고 있다. 역사적 근거도 없이 '위안부는 매춘부'라는 논문을 발표하려 했다가 하버드대학 내에서조차 '몹쓸 인간' 취급을 받고 있다.

"램지어 논문, 몸서리치고 역겨워"    
 

일본군 위안부가 공인된 매춘부라는 하버드대학교 램지어 교수의 논문이 국제적 비난을 사고 있다. ⓒ 인터넷에서 갈무리

 
현지 시각 8일 자 교내 신문 <하버드 크림슨>은 사설을 통해 램지어의 주장을 '매우 유해한 역사학적 거짓말'로 규정하면서 "램지어 논문은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위안부 여성의 실존과 트라우마, 그들이 당한 학대에 영향 받은 이들을 부인하는 쪽에 확성기를 줬다(giving a megaphone)는 점에서 실질적인 피해를 초래하고 있다"라고 진단했다.

램지어는 학교 안에서조차 '역사학적 거짓말쟁이'가 됐을 뿐 아니라 미 전역의 법대생과 정치인들에게서도 비판을 받고 있다. 호소야 기요시가 '앞으로는 주전장이 될 것'이라고 말한 그곳에서 일본 극우를 변호하는 주장이 거센 공격을 받고 있는 현실이다.

램지어가 얼마나 불리한 상황에 처했는가는 미국 내에서 한국사 및 일본사에 대해 권위를 갖고 있는 학자들이 비판 대열에 동참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하버드에서 각각 한국사와 일본사를 가르치는 카터 애커트 교수와 앤드루 고든 교수는 현지 시각 2월 17일 자 학교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최악의 학문적 진실성 위반'이라는 표현으로 이번 사태를 규정했다. 매우 점잖은 방법으로 램지어를 거짓말쟁이로 규정한 것이다.

램지어 논문을 싣기로 한 <국제 법경제학지> 편집장의 의뢰로 논문을 분석한 두 교수는 '태평양전쟁에서의 성매매 계약'이라는 제목이 붙은 논문에서 실제 위안부 계약서가 단 한 건도 검토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램지어가 중국인 위안부 계약서라고 제시한 것도 실상은 일반 주점에 근무하는 일본인 여성 직원의 계약서라고 두 교수는 지적했다. 학문적 진실성을 언급할 만했다.

뉴욕 북쪽 코네티컷대학에서 한·일 역사를 가르치는 알렉시스 더든 교수는 램지어가 매춘부 표현을 운운하는 것에 반감을 드러낸다. 현지 시각으로 지난 2월 8일 <연합뉴스>와 한 이메일 인터뷰에서 그는 "매춘부라는 단어는 어떠한 (위안부와) 관련된 표현의 올바른 영어 번역도 될 수 없다"라며 자신은 수업 시간에 한국어 발음 그대로 '할머니(halmoni)'로 부른다고 말했다. 자기 강의에서는 '위안부 역사'를 '할머니 역사(halmoni history)'로 지칭한다고 그는 말했다.

할머니라는 번역어가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표현해주지는 못해도, 한국인들이 위안부 할머니로 부르는 피해자들을 미국 학생들도 할머니로 부르게 하려는 더든 교수의 마음을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더든 교수는 '피해자들이 강요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위안부로 나섰다'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난징대학살 이후인 1938년 일본 내무성과 육군성이 젊은 여성들의 위안소 모집을 포함한 명령을 내린 바 있다"라며 "이는 명백히 일본 정부의 대리인들이 인신매매를 금지한 국제협약과 국내법 위반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라며 램지어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뿐 아니라 수많은 미국 학자들도 이번 일을 역겨워한다고 전했다. "아시아학은 물론 그 외의 분야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램지어 교수의 논문에 몸서리치고 역겨워한다"라고 미국 학계 분위기를 전해준다.

한·일 역사에 관한 한 미국인들은 자국 내의 한국사·일본사 연구자들을 우선적으로 신뢰할 수밖에 없다. 다른 나라 역사학자들은 물론이고 미국 내의 한국사·일본사 교수들 역시 램지어를 맹렬히 비판하고 있으므로, '주전장'에 사는 미국인들이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게 될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 일본 극우를 옹호한다고 나선 램지어가 도리어 그들을 얼마나 불리하게 했는지 알 수 있다.

일본 극우의 착각 
 

24일 부산 동구 일본영사관 평화의소녀상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62차 부산 수요시위가 열리고 있다. 참가자들은 최근 '위안부' 피해자를 '매춘부'라고 주장한 미국 하버드대 램지어 교수를 강하게 비난했다. ⓒ 김보성

 
램지어가 일본 극우를 위해 한 일은 머라노나 길버트가 한 일보다 양적·시간적으로 많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램지어가 한 일은 머라노나 길버트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후폭풍을 일으키고 있다. 하버드대학 교수라는 위치로 인해 램지어 발 허리케인은 일본 극우와 정부에 상당한 피해를 끼치고 있다. '주전장에서 큰 선전을 일으켜 널리 퍼트려야 한다'라는 호소야의 목소리를 떠올리게 하는 일이다.

<주전장> 개봉일에 한국에서는 "살아 있는 권력의 눈치도 보지 말라"라는 언급이 있었다. 그 영화 속의 일본 극우들은 '살아 있는 세계 권력'을 주전장으로 삼아 선전전을 전개하자고 주장했다. 이들은 미국의 눈치를 살피며 미국의 힘으로 남북한과 중국의 비판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주전장 전략이 이번처럼 후폭풍을 일으키게 될 줄은 미처 예측하지 못했다.

진정으로 '살아 있는 권력'은 미국의 자본과 군사력이 아니라 시민 혹은 민중 중심으로 역사를 재해석하는 거대한 흐름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미국을 과도하게 믿은 일본 극우가 이번과 같은 자충수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주전장'은 세계 시민들의 마음속인데도, 이를 미국으로 착각한 결과가 낳은 사태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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